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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사랑을 지키는 법

디테일즈 매거진 웹진 1호 <사랑>_상대가 사라진 사랑은 어디로 흐를까?

by 디테일즈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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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드라마 <스타트업> 1화를 보고 몇 시간을 운 적이 있다. 주인공 달미의 아빠가 퇴근길 버스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었다. 그날 아침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일에 치여 병원에 들르지 못했던 그는, 결국 핑크빛 벚꽃이 만개한 도로 위에서 생을 마감한다. 한 손에는 달미에게 줄 치킨 한 봉지를, 한 손에는 가족사진을 배경으로 한 핸드폰을 들고서였다. 화면을 가득 채운 벚꽃, 그 아래 다시 속도를 내는 마을버스가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나는 그게 서러워 몇 시간을 울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마치 나에게 요란한 사이렌 정도는 울려줄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드라마에서 본 죽음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당장 내일이라도 벌어질 수 있는 일처럼. 때문에 나에게는 이 장면이 머리통 하나 뎅강 날아가는 액션신보다도 두려웠다. 곁에 있는 사람이 당장 사라져 버리면 어쩌지? 나는 그 이후의 삶을 견딜 수 있을까? 나 혼자 남겨진 삶을? 이런 두려움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스타트업>을 본 지 5년이 흘러가는 지금도 그 장면을 보면 눈물부터 난다. ‘남겨짐’에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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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남겨지는 건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괜찮다가도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갈 때가 있어.”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나뿐만이 아닌 듯하다. 드라마 <내가 죽기 일주일 전>에서 첫사랑 람우(공명)의 죽음으로 이별을 겪은 희완(김민하)에게, 선배 영현(심은경)은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내뱉으며 위로를 건넨다. 갑작스레 상대가 떠나버린 사랑, 그 안에서 남겨진다는 건 어떤 감정일까. 아직 직면하지 않았기에 두렵게만 느껴지는 감정을 이 드라마는 따뜻하지만 명확하게 풀어낸다.


“내가 김람우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아니, 우리가 친구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 바보 같은 이름 바꾸기 하지 않았다면, 그랬더라면...”


람우가 떠난 희완의 시간은 온통 자책으로 채워진다. 람우의 죽음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사고 때문이었지만, 희완은 그 ‘탓’을 자신에게로 돌린다. 애초에 친구가 되지 않았더라면,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람우는 살 수 있었을 텐데. 자책의 밑바닥에는 받아들이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다. 람우는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 희완은 여전히 만약에, 하는 가정법으로 다시 살아 돌아올 람우를 상상한다. 그렇게 이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희완은 저승사자로 돌아온 람우를 맞이하며 두 번째 이별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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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ing


“잊어버리지 마. 우리가 함께한 거? 다 없어지지 않아. 다 너한테 있어. 너는 정희완이기도 하고 김람우이기도 하잖아.“

“이제 알겠지? 너를 구하는 게 나를 구하는 거야.”


둘이 학창 시절 만우절 장난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설정은, 저승사자 람우가 희완을 구한 뒤 소멸하는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 ‘너를 구하는 게 곧 나를 구하는 거야’라는 직관적인 대사는 <내가 죽기 일주일 전>이 6시간에 걸쳐 공들여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다. 남겨진 사람의 잘못은 없으니, 스스로를 탓하지 말고 다시 살아가야 한다는 말. 어쩌면 남겨진 사람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대사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너의 죽음을 뒤로 하고 다시 살아봐도 될까, 하는 죄책감 잔뜩 묻은 질문에 이렇게 답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일 수도 있겠다.


“너를 기억할게. 나는 살아갈게. 우리에게는 나를 사랑하는 일이 결국 너를 사랑하는 것이니까.”


답이 돌아올 수 없는 질문에 드라마는 대신 전한다. 그래도 된다고, 다시 살아봐도 괜찮다고. 드라마의 말미, 희완은 람우를 ‘기억하기로’ 약속한다. 이제 더 이상 람우와의 마지막에 갇히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떠나간 이를 기억으로 남겨두고 나아가보겠다는 다짐이다.


남겨진 희완의 사랑은 그렇게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람우를 떠나보내야만 했던 스스로를 용서하는 쪽으로. 람우를 기억하고 그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 함께 살아가는 방식으로. 이 지난한 과정은 결국 언제까지나 함께할 수 없는 상대를 향한 새로운 사랑의 방식일 테다.



스크린샷 2025-05-18 오후 9.40.25.png ©JTBC


한편 <멜로가 체질>의 은정(전여빈) 역시 ‘남겨진’ 사람이다. 다큐멘터리 PD와 후원자로 만난 은정과 홍대(한준우)는 아낌없이 서로를 사랑했다. 하지만 홍대가 병으로 입원하면서 둘은 이별을 예고 받는다. 그리고 몇 달 뒤, 은정은 사랑하던 홍대를 떠나보냈고, 이별의 과정은 은정의 자해로 이어질 만큼 쉽지 않았다, 은정은 그 뒤로 줄곧 홍대의 환영을 본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인터뷰 촬영본을 보던 은정은 그제야 허공에 대고 말을 건네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자신이 보던 홍대가 환영이라는 사실, 그로써 재확인되는 홍대의 부재에 무너지는 은정. 드라마는 은정이 자해로 병원에 입원한 날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준다.


“나 좀 기억해 줘. 그냥 나 말고, 너랑 같이 행복했던 나. 네가 여기 없으면 누가 그렇게 행복한 날 기억해 주겠어.”


홍대는 왼쪽 손목에 붕대를 감고 누운 은정의 앞에 나타나 ‘기억해달라’고 말한다. 자신을 기억해 주기 위해서라도 살아달라는 간절한 부탁이다. 은정은 그 부탁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아래 홍대를 잊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애써왔다. 하지만 홍대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환영을 불렀고, 은정은 사랑인지 자책인지 모를 것을 혼자 끙끙대며 품어왔던 것이다. 결국 은정은 이별을 마주하기 위해 홍대가 남기고 간 일기장을 열어본다. 은정에게 남기는 홍대의 마지막 일기에는, 람우의 마지막 말과 같은 이야기가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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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위해서 부디 너를 지켜줘.”


희완의 자책이 ‘내가 아니었다면 람우가 살 수 있었을 텐데’의 방향이었다면, 은정의 자책은 ‘홍대를 까맣게 잊고 나만 행복할 수는 없어’의 방향이다. 은정은 부재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상대를 어디까지 잊어도 되는지의 딜레마에 놓여있다. 여기에 홍대의 일기는 ‘완전히 잊어도 괜찮다’는 답변 같은 것이다. 은정은 끝내 무엇이 홍대를 위하는 길인지 생각하고, 여기에 ‘그럴게. 내가 해낼게’라고 응한다.


홍대를 보낸 후 은정의 사랑은 ‘잊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으로 은정을 괴롭혀왔다. 하지만 손안에 꽉 쥐고 있던 홍대를 놓아주는 순간, 은정의 사랑은 비로소 괴롭지 않은 것이 되었다. 눈앞에 보이지는 않지만, 눈을 감으면 함께 했던 날들을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랑. 홍대와의 진짜 이별을 맞이한 후 은정의 얼굴에는 그런 미소가 서려 있다. 단단하게 뿌리내린 사랑은 매 순간 움켜쥐지 않아도 늘 내 안에 있음을 증명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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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tving



희완과 은정, 두 인물이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뒤 다시 만들어가는 사랑은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람우와 홍대, 먼저 떠나간 사람이 말하는 사랑은 동일하다. 남겨진 너를 챙기는 것이 떠나간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것. 나는 직설적으로 단언해 내뱉어주는 드라마의 태도에 위안을 얻는다. 잊는 것도, 기억하는 것도 모두 사랑이라고 말하는 인물들이 비로소 남겨진 사람들의 사랑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듯하다.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돼’라는 말이 틀린 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부연이 필요한 말이라고 느낀다. 얼마나 걸릴지 모를 시간을 어떻게 지나야 하는지, 당장 슬픔을 직면한 이들에게는 막막하게 느껴지는 탓이다. <내가 죽기 일주일 전>과 <멜로가 체질>은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돼’라는 말에 몇 시간 공들여 덧붙인 부연이다. 지나야 하는 시간은 이렇게 힘들 수 있고, 남겨짐에 완전히 적응하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부연.



나는 앞으로 마주할 이별의 순간마다 두 드라마를 꺼내봐야지, 하고 다짐한다. 홍대와 람우의 대사는 때마다 다른 목소리를 하고 나에게 올 것이다. 어떤 때는 사랑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하고, 어떤 때는 가장 아끼던 친구의 목소리를 하고, 어떤 때는 나의 목소리를 하고. 몇 번이 반복되어도 익숙해지지 못할 이별 앞에 남겨질 때마다, 두고 간 편지처럼 차곡차곡 써 내려간 두 드라마 덕분에 소리 내어 울다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다시 남겨지고 그것에 익숙해지기를 반복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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