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사랑하고 나누는 법
드라마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 첫 인터뷰의 주인공은 서해인 에디터다.
서해인 에디터
대중문화 뉴스레터 <콘텐츠로그> 발행
책, 드라마, 영화 이야기를 하는 팟캐스트 <두둠칫 스테이션> 운영
이 외에도 각종 플랫폼에 콘텐츠를 발행하는 1인 콘텐츠 창작자
서해인 에디터의 <콘텐츠 로그>에 등장하는 드라마 리뷰를 읽다 보면 잊고 있던 작품이 생각나 그날 바로 시작하기도 하고, 취향에 잘 맞을 것 같은 친구에게 추천을 해주기도 한다. 또, 재밌게 본 드라마가 <두둠칫 스테이션>에 등장하면 리뷰가 궁금해 설레기까지 할 정도다.
갈수록 공개되는 드라마는 많아지지만, 정교화되는 알고리즘 추천에 오히려 각자의 취향에 맞는 드라마만 보며 우리는 각자의 모니터만 지켜보게 되었다. 이런 시대에 서해인 에디터의 콘텐츠는 드라마에 대한 깊은 몰입과 열정적인 영업으로 드라마를 ‘같이 보고 있다는 감각’을 실감하게 해 준다.
그래서 서해인 에디터와 드라마를 사랑하는 법, 그리고 사랑하는 드라마를 나누는 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들어가는 질문]
Q.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해인님이 드라마를 가장 편안하게 즐기시는 세팅은 어떤 것인가요?
올해 초 타임지가 주최한 행사에서 편집장이 “넷플릭스가 할리우드를 파괴했는가?"라고 물었을 때 넷플릭스 공동 CEO 테드 사란도스가 “아니요, 우리는 할리우드를 구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해요. 사람들이 극장이라는 공간을 좋아하거나 거기에 담긴 추억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집에서 영화를 보는 걸 즐기기 때문에 영화는 망하지 않을 것이며 이 산업이 지속될 거라는 논리였죠.
저는 넷플릭스의 ‘투둠’ 징글 사운드를 들을 때 세상에서 가장 익숙한 상태로 모드 변경이 되는 걸 느껴요. 그래서 저는 드라마를 볼 때 완벽한 세팅을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어디서든 온갖 불편을 감수하고 보거든요. 누워서 몸을 구긴 채 아이패드로 보기도 하고,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중에 스마트폰으로도 잘 보고요. 그래서인지, 테드 사란도스에게 반문을 제기하고 싶은 건 드라마를 보는 장소가 꼭 집일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드라마 입문반] 드라마를 아직 사랑하지 않거나, 드라마를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사랑의 비법
Q. 처음 사랑에 빠지신 드라마가 궁금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콘텐츠를 좋아하는 해인님이 ‘아! 나 드라마도 좋아하는구나!’라고, 자각하게 된 드라마가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넷플릭스 드라마 <그레이스 앤 프랭키>요. 2015부터 2022년까지 방영된 장수 시리즈인데요. 시즌 1의 오프닝 크레딧이 드라마의 메시지를 온전하게 담고 있어요. 이것만 봐도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너무 궁금해지죠. 오프닝 크레딧이 흐르고 나서 시작하는 드라마 1화도 처음부터 대놓고 전말을 알려주면서 시작되는데요. 40년 가까이 알고 지낸 노년의 두 부부가 식사하는데, 거기서 현재의 아내들을 향해 이혼을 공동 요청해 버려요. 자신들은 사실 퀴어이고 오래전부터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고백하면서요.
이 드라마는 그런 상황에서 남겨진 두 여성이 혼란을 수습하는 법, 어쩌면 그 혼란에 얻어맞는 법을 보여줍니다. 제가 이 드라마와 사랑에 빠진 이유는, 인생의 어떤 지점에서는 40년이나 마음을 놓고 지냈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것이 보란 듯이 한 사람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는 걸 잘 보여주기 때문인 것 같아요.
Q. 드라마 외에도 다양한 콘텐츠를 접하고 계시는데요, ‘드라마’만이 가진 매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떤 매체가 가진 고유성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은 재미있고 또 까다로운 일인 것 같아요. 저에게는 드라마, 영화, 책, 음악이 같은 마을에 와글거리며 사는 사이좋은 주민들처럼 느껴지긴 합니다.
그래도 이 질문에 대해 답하자면, 드라마는 연출자의 의도대로 끊어갈 수 있는 구간이 만들어져 있다는 점이 독특하게 느껴져요. <지붕 뚫고 하이킥>의 카페베네 로고 같은 걸 볼 때의 아쉽지만 쏜살같이 흘러간 시간을 감각하는 기분은 오직 드라마만이 줄 수가 있잖아요. 꼭 다음 화를 보게 만들기 위해 가장 궁금한 부분에서 “다음 화에 계속…”을 나타나게 하는 ’클리프행어‘가 아니더라도, 무한히 진행될 것 같던 이야기가 잠시 멈추면 왜 여기서 끊었을까를 고민하게 만들어줘서 좋아요.
*클리프행어 : 이야기의 마무리가 흥미를 이끌만한 내용으로 끝나 시청자가 궁금증을 가지게 만드는 기법
Q. 드라마라는 장르적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영화나 유튜브 콘텐츠, 책이 아닌 ‘드라마’라는 장르를 영업할 때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은 작품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디즈니+ 드라마 <완다비전>이요. 사실 2025년의 저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이탈한 사람이에요(...) 마블 신작이 개봉하면 전 시리즈 복습을 착실히 하던 때가 있었는데 점점 과부하가 오더라고요. 칼 같은 히어로와 방패 같은 히어로가 정면 승부하는 세계관에 대한 피로도가, 타노스가 손가락을 튕겼을 때 함께 폭발했던 것 같아요. (<어벤져스: 인피니트 워>(2018)의 내용 참고.) 그 와중에,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자장 안에 있으면서도 여기서 더 인지적 부담을 요하는 것 같은 스핀오프 드라마 <완다비전>은 크게 마음이 가는 작품은 아니었어요. 제목 그대로 ‘완다 막시모프’와 ‘비전’이라는 두 캐릭터를 들여다본다고는 하는데, 제가 전작들을 볼 때 두 캐릭터의 서사를 크게 궁금해하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보고 나니까 이건 드라마여야 했던 이유가 있더라고요. 언제나 최악과 차악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뿐이었던 인물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는 9부작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서요. 또, 액자식 구성 같으면서도 액자의 틀까지 이야기의 그 일부로 취하는 대범함이 엿보여요. 이것이 ‘액자 속인가? 아니면 액자 바깥인가?’ 헷갈리면서도 계속 취하게 되는 힘이 있달까요.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하시다면 한 번 <완다비전>을 보시는 것도 좋겠네요!
[드라마 심화반] 드라마를 이미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재밌게 본 드라마를 다른 사람들도 재밌게 볼 수 있도록 영업하는 법
Q. 드라마를 영업하다 보면 주인공의 설정, 주변 인물들의 설정, 드라마 속 사회적 배경 등을 같이 설명해야 해서 하나의 세계관을 영업하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관점에서 드라마를 영업할 때, 세계관의 어떤 부분에 중심을 두고 이야기하시는 편인가요?
저는 ‘공식이 말아주는 해석’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드라마를 드라마로만 말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들에게 작품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마이크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잘 쓰는 창작자들을 보는 것도 좋거든요. 그래서 드라마를 작업한 연출가와 배우들의 인터뷰라면 공적으로 공개된 것은 최대한 다 찾아보는 편인데요. 연출가는 이 장면에서 어떤 의도를 전달하고 싶었는지, 배우는 그 말과 행동을 해야 하는 역할을 어떻게 ‘캐해’ 했는지 자신의 언어로 들려주는 걸 참고하려고 해요.
다만 참고하는 대신 그 해석에만 매이지는 않는데, 저도 감상자로서 그 이야기에 평등하게 참여하는 감각(혹은 착각)을 즐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Q. 해인님의 뉴스레터를 읽거나 팟캐스트를 듣다 보면 드라마와 다른 콘텐츠들을 엮어서 많이 추천해 주시는데요, 그런 콘텐츠들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하나의 지도 같기도 했고요.
특히 드라마같이 연속되는 콘텐츠를 엔딩까지 보고 나면 앞부분 감상은 흐려지고, 좋다는 ‘느낌’만 남기도 하잖아요. 이런 콘텐츠를 본 후 개인적으로 어떻게 기록하시나요? 콘텐츠 기록이 어려운 분들에게 조언을 주실 수 있을까요?
드라마를 보고 나서 글로 주접을 많이 떨어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정제된 언어로 좋은 점을 쓰려고 하면, 끝까지 정리를 못 하게 되거든요. 물론 저는 ‘모호하지만, 분명히 +에 가까운 느낌’만 품고 지내는 것에도 그 나름의 미덕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역시 내 안의 좋음을 알리고 싶다면 그게 바깥으로 발신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일단 내게 좋았던 부분을 많이 늘어뜨려 놓아 보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무엇이든 나만 알아볼 수 있으면 됩니다.
또, ‘함께 보면 좋은 콘텐츠’가 감상자에게 쌓인 지식과 데이터베이스를 자랑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늘 조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말하고 있는 콘텐츠와 분명한 연결고리가 있을 때만 다른 콘텐츠를 함께 언급하고 추천하게 되는 것 같고요.
기록은 앞서 말한 것처럼, 드라마를 보는 와중에 간략하게 주접식 메모를 적어두는 식이에요. 가끔 어떤 대사들은 맥락과 상관없이 완성도가 높아서 포스트잇에 적어 붙여두고 싶을 때가 있어요. 16부작 드라마에서 ‘한 화마다 대사 한 줄씩을 건져서 16가지의 문장을 모아보자’는 목표로 메모하게 될 때도 있어요. 나중에 그렇게 잡아둔 문장들만 쭉 살펴보면, 드라마의 원본과 상관없이 아주 이상하지만,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보이기도 한답니다.
Q. 드라마는 같이 보는 콘텐츠라는 생각이 강해서 그런지, 보고 나면 누구에게든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요즘은 알고리즘이 콘텐츠 선택에 영향을 많이 주면서 ‘같이 본다’는 게 어려워진 것 같아요. 이런 시대에 드라마를 ‘같이 보는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서로 다른 알고리즘을 갖고 사는 시대에 만일 누가 “너, 오늘부터 나랑 같은 알고리즘을 하자!”라고 제안한다면 저는 무례하다고 느낄 것 같아요. 정말로 그런 시대가 되어버렸네요. 그래서 ‘같이 본다’라는 감각이 드문 만큼 무척 소중하고요.
어떤 드라마를 누군가와 같이 보고 싶은 마음이 커지고 있으시다면, 드라마를 리뷰하는 팟캐스트 <두둠칫 스테이션>을 들어주시면 좋겠어요. 저는 이 팟캐스트를 친구와 공동 진행하면서 같은 드라마를 보고 말할 수 있는 한 사람을 곁에 두고 있지만, 어떤 드라마를 리뷰할지 정하기 위해 회의할 때를 보면 나름대로 치열하거든요. ”이 드라마 안 본 사람이랑 겸상 안 함“이라는 회심의 카드를 아무 때나 쓸 수는 없지만, 보고 나면 누구와든 같이 얘기하고 싶은 드라마를 고르고 있어요.
Q. 해인님께 ‘드라마’는 무엇인가요?
내가 살아보지 않은 인생을 정주행해 보겠다고 도전했다가 넘어지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