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별 사랑관에 영향을 미친 드라마 인터뷰
나는 사랑을 드라마로 배웠다. 처음 사랑에 눈을 뜬 중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본 드라마들은 차곡차곡 모여 사랑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상형이 뭐냐는 질문에도, 어떤 사랑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도 늘 드라마 속 주인공들로 답했다. 그 배우들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 그 세계관 속 관계들이 좋았다. 연인 간의 사랑부터 친구, 가족,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까지—나는 드라마에서 사랑을 배웠다.
문득 에디터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깨달았다. 나만 이런 게 아니라는 것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글로 사랑을 배우듯,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드라마를 통해 사랑관을 형성해왔다. 특히 한국 드라마는 시대별로 변화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를 적극적으로 반영해왔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시대별로 다른 드라마를 보며 자란 사람들은 각자 어떤 사랑관을 형성했을까?
드라마를 사랑하는 20대부터 60대까지 물었다.
‘무슨 드라마로 어떤 사랑을 배우셨나요?’
20대 인터뷰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2017)
처음에는 엄마의 희생적인 사랑만 강조한 드라마라고 생각했는데, 고3 때 원작 드라마 대본이 수능 특강에 실려서 다시 봤다. 그땐 악역처럼 보였던 인물의 사랑이 더 깊게 남았다. 특히 치매로 괴팍해진 시어머니와 묵묵히 돌보는 며느리(엄마)의 관계는 애증의 결정체이다. 미워하면서도 돌보고, 원망하면서도 떠날 수 없는 그 감정은 단순히 정이라기엔 더 복잡한 사랑이었다.
처음엔 서로를 괴롭히고 미워하는 관계로만 보였지만, 어머니의 죽음을 앞두고 시어머니가 흐릿한 정신 속에서도 울부짖는 장면에서, 그건 미움이 아니라 말로 표현되지 못한 정과 연민에서 비롯된 사랑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애증은 단지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닌, 그 시대를 살아가던 여성들이 겪었던 반복적 고통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어머니는 그 시어머니의 과거이자 미래였고, 시어머니는 어머니의 그림자이기도 했으니까.
연민이 깃든 사랑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연민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상대의 삶을 이해하려는 데서 나온다. 어머니는 아이처럼 변해버린 시어머니를, 방향을 잃은 자식을, 말없이 가정을 짊어진 남편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족들 역시, 세상을 떠난 엄마의 삶을 끝내 다 헤아리지 못한 자신을 답답해하며, 어머니를 연민했을 것이다. 이 드라마의 주제도 “사랑은 결국 미움과 오해를 지나 연민으로 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드라마를 통해 누군가를 쉽게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단정 짓기보다, 그 사람의 사랑이 왜 그렇게밖에 표현될 수 없었는지를 이해하는 것, 그게 진짜 사랑의 시작이라는 걸 배웠다.
사랑은 꼭 따뜻하고 예쁘게 표현되는 것만은 아니다. 때론 미움과 침묵을 지나, 결국 그 사람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마음, 그게 진짜 사랑일지도 모른다.
30대 인터뷰이
커피프린스 1호점 (2007)
커피프린스의 가장 유명한 명대사 “니가 남자건, 외계인이건 이젠 상관 안해!" 를 듣고 처음엔 많이 놀랐다.
‘어떻게 그 사람의 정체성이 중요하지 않지?, 그럼 최한결한테 사랑이 뭐길래? 고은찬을 사랑하는 ‘이유’가 뭐지? 어떤 마음으로 저렇게 얘기할 수 있었지?’ 등, 어린 마음에 사랑에 대한 엄청 신선한 충격을 줬던 드라마다.
가장 이상적인 사랑은 특정한 형태가 있기보다는, 인간은 모두 이기적인 존재이지만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기꺼이 나보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행동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결국엔 최한결처럼 그 대상이 걱정되고, 자꾸 보고 싶고, 그리운 것이 사랑 아닐까? 걱정돼도 상대방이 바쁘면 기다려보고, 보고 싶을 때 먼저 찾아가서 만나고, 그립기 때문에 자꾸 함께 했던 추억을 곱씹어 보는 것.
세상 모두에게 각자의 사랑이 있는 것처럼 그 형태나 대상은 다양하겠지만,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하는 행동들은 모두 비슷한 것 같다.
50대 인터뷰이
그들이 사는 세상 (2008)
큰 사건보다는 전체적으로 각 배역들의 애환이 회차마다 차분히 그려졌던 드라마였다. 그래서 악역 없는 착한 드라마로 유명하기도 했다.
“내가 잘해준 사람은 잊어도 내가 상처 준 사람은 절대 못 잊는 게 사람이다. 그게 순정과 관계가 있는진 모르겠지만”이라는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알게 모르게 정이 많은 내 성격과 연관 지어지며 공감이 가던 대사였다. 물론 이상적인 사랑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랑이겠지만, 서로에게 상처를 준 관계도 그 감정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 걸 알려준 드라마였다.
60대 인터뷰이
목욕탕집 남자들 (1995)
이 드라마는 가족 간의 사랑의 방식을 배웠던 드라마다.
드라마 속 이순재가 매우 가부장적인 인물로 나와 가족 구성원들에게 험하게 대한다. 그런데 아내인 강부자가 며느리와 아들, 그리고 남편 사이의 관계에서 조율을 굉장히 잘한다. 전형적인 그 시대 여성들처럼 남편의 말에 순응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남편이 독불장군처럼 가족 구성원들을 대하며 나서서 뭐라 하기도 하고, 남편 몰래 구성원들을 따로 챙겨주기도 한다. 또 그 시대 드라마로는 흔하지 않게 여자들이 할 말을 다 하는 그런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족 간의 사랑은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 그것이 가장 기본적이고도 어렵지만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배웠다.
내가 ‘사랑’에 대해 배운 드라마를 말해보자면 단연 <길모어 걸스 (2000)> 다. 대학 입시가 끝나고 한가하던 시절에 본 <길모어 걸스>는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했던 드라마였다.
삶의 태도는 같지만, 취향이 다른 사람 vs 삶의 태도는 다르지만, 취향이 같은 사람 vs 삶의 태도와 취향이 모두 다르지만, 왜인지 계속 끌리는 사람.
살아가며 만날 수 있는 인간을 유형화해보면 다음 셋 정도일 것이다. 물론 태도와 취향이 모두 같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만나기 매우 어려우니까. (이를 배제하면) 앞선 세 가지 유형이 모두 등장하는 드라마가 바로 <길모어걸스>이다. 특히 여기서 ‘삶의 태도’와 ‘취향’은 현실에서도 중요한 이상형의 조건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무려 시즌 7까지 제작된 153부작의 이 드라마는 로리와 엄마 로렐라이의 성장 이야기다. 로리는 1학년 때 전학 간 명문 사립학교 칠튼에서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며 예일대에 진학할 만큼 똑똑한 학생이다. 책벌레로도 유명한데, 해외에서는 '로리 길모어 리딩 리스트'라는 이름으로 400여 권의 책 목록이 알려져 있다. 또한 엄마 로렐라이와의 끊임없는 티키타카 대화 덕분인지, 토론과 글쓰기에서 자신의 의견을 똑부러지게 말하기도 한다. 시즌 내내 로리의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 졸업 이후까지의 연애사를 함께하며, 그녀의 인간적인 성장까지도 지켜봤다.
그래서 처음 정주행했을 때는 이렇게 똑똑한 나의 로리가 연애만 하면 바보가 된다는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 두 번째 봤을 때는 로리가 항상 어딘가 하나는 핀트가 이상한 사람들만 골라 사귀는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다 대학을 다니며 사회에 나온 후 세 번째 볼 때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로리는 지극히 현실적인 연애를 하고 있다는 것을.
1. 삶의 태도는 같지만, 취향이 다른 사람
딘은 로리의 첫사랑이다. (그리고 이 버스 장면은 하이틴 플레이리스트에 자주 사용되는 그 유명한 장면이다.) 로리와 딘은 서로 첫눈에 반한다. 매사에 논리적이고 똑똑하던 로리가 처음으로 뚝딱거리는 모습을 보여주던 것이 바로 딘 앞에서였다. 딘은 꽤나 젠틀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성실함은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내키지 않던 칠튼 교내 무도회 에스코트 요청에도 수락하고, 로리를 위해 자동차를 직접 조립해 선물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헤어지고 나서도 다정하다. 그게 문제다.)
딘과 로리 모두 성실한 삶의 태도를 가졌지만, 그 지향점이 달랐다. 로리는 하버드 진학을 목표로 학업과 커리어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고, 딘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게 목표로 현재의 행복에 집중하는 사람이었다.
또, 로리는 매일 새로운 책을 손에 들고 있을 만큼 책을 좋아했는데, 딘의 관심사는 스포츠였다. 심지어 서로의 취향을 좋아해 보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지도 않는다. 이 둘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안정감을 느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의 재미나, 각자의 성장은 이 관계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2. 삶의 태도는 다르지만, 취향이 같은 사람
딘과의 안정적인 연애 중에 만난 제스는 그 존재 자체로 로리에게 ‘일탈’이었다. 제스와 로리는 삶의 태도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매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로리와 달리, 제스는 학교를 밥 먹듯 빠져 유급하고, 동네 모금함을 털고 (!), 심지어 로리가 사랑하는 동네를 비꼬기까지 한다. 로리의 정반대를 상상해 보면 바로 제스가 될 것이다.
그런데 제스는 학교는 안 가도 로리처럼 책을 사랑했다. 둘의 책 이야기는 굳이 맞추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대사만 말해도 어떤 책의 누굴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는 수준이었다. 대화에서 책 내용을 비유로 자주 사용하는 로리가, 딘에게서는 찾을 수 없던 대화의 즐거움을 제스에게서 느낀 것이다.
그렇게 최악의 첫 인상이던 제스는 로리의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극도의 위험 회피 성향이었던 로리는 제스를 만나며 난생처음으로 일탈을 한다. 제스와의 과외 중에 수업을 빼고 드라이브를 하다 사고가 나기도 하고, 사고에 대한 죄책감으로 갑자기 동네를 떠난 제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겠다’는 핑계로 ‘무려 학교를 빼먹고’ 뉴욕으로 떠난다.
어쩌면 제스와의 연애 자체가 로리에겐 일탈이었다. 로리가 딘과 연애를 하던 중에 제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딘을 ‘영원한 남자친구’로 생각했던 로리는 애써 그 감정을 외면하려 했지만, 참다못한 딘이 마을 행사에서 공개적으로 이별을 고하며 제스와의 연인 관계가 시작됐다.
제스도 로리를 만나며 책과 글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재발견하고 로리처럼 좀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했다. 그리고 시즌 6, 그는 소설을 출간한 작가로 다시 로리에게 찾아온다. 그렇게 둘의 관계는 서로의 세계로 더 넓어지게 했다.
3. 삶의 태도와 취향 모두 다르지만, 왜인지 계속 끌리는 사람
예일대 파티 보이 로건. 지금까지의 남자친구들과 다르게 로건은 로리가 만나는 사람 중 가장 ‘가벼운’ 사람이다. 대학 내 상류층 비밀 모임을 운영하고, 매일 다른 여자와 데이트하고, 수업 때 로리를 놀리려고 즉흥 연극을 벌이기도 한다. 로건은 로리처럼 매사에 열심히 하지도 않고, 그저 ‘지금 하고 싶은 걸 해’라는 태도로 일관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로리가 로건에게 사랑에 빠진 가장 큰 이유는 로건은 자신과 다른 로리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로건은 기자를 꿈꾸는 로리의 글을 항상 궁금해하던 사람이었고, 연인과는 서로에게 충실한 사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로리의 연애관을 함부로 바꾸려 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Casual Dating’을 제안한 건 로건에게 빠져버린 로리였다.) 심지어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딘이나 제스처럼) 참지도, 회피하지도 않고 당장 로리에게 달려가 대화한다. 그리고 <길모어 걸스 - 한 해의 스케치> 편에서, 로리는 결국 다시 로건을 선택한다.
<길모어 걸스>를 보며 사랑에 관해 배운 건 결국 두 가지였다.
삶의 태도나 취향, 모두 중요한 이상형 조건이다. 그러나 좋은 연인은 이 조건을 얼마나 충족하느냐가 아닌 관계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맞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로리가 로건을 택한 이유는 로리도 역시 딘과 제스를 거치며 대화를 통해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관계 유지를 위한 방법임을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첫사랑이었던 딘은 로리에게 자신이 하버드 진학보다 중요하냐며, 자신에게 집중해달라고 화를 냈다. 결국 화해를 하긴 했지만 로리는 자신의 삶 자체를 딘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로리는 안정적인 관계를 해치기 싫어서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는다.
제스는 규칙적인 삶을 사랑하는 로리를 존중했지만 문제가 생기면 도망을 갔다. 로리와의 재회에서 동네 추격전을 벌이는 장면이 있을 정도로. 그는 다름을 인정했지만 이해하려고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만약 로리가 관계를 대하는 태도가 로건과 달랐다면, 로건이 하는 행동들이 더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를 대하는 방식과 태도가 같아 서로의 행동의 맥락 속에서 사랑을 알 수 있었다.
또 사랑은 항상 나를 다른 사람이 되게 한다. 로리는 평소에는 논리적이고 계획적이다가도 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때면 감정에 너무 충실해 충동적이기까지 한 사람이 된다. (심지어 그게 불륜일지라도...) 그래서 처음엔 로리의 성장을 함께한 팬의 마음으로 로리가 마지막에 결국 로건의 ‘숨겨둔 애인’이 되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갔지만, 그마저도 로리의 사랑 방식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사실 로리를 이해해 보려고 10번 넘게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