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연애는 사치였고, 우정은 생존이었다

by 꿈의복지사

새로운 세기가 열리던 2000년.
빛나는 숫자에 온 세상이 환호했지만 내 삶은 여전히 소박한 일상 속에서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전역 후 누구보다 먼저 학교로 돌아온 나는 멈춰 있던 시간을 다시 움직이기 위해
책과 아르바이트 사이를 오가며 하루를 버텨냈다.

형식적으론 ‘복학’이었지만, 실제로는 내 인생을 다시 세우는 과정이었다.

친구 자취방 한쪽에서 몸을 구겨 잠들고, 아침이면 도서관 문이 열리는 소리를 기다렸다가 들어섰으며,
밤늦게야 다시 몸을 끌고 돌아와 쓰러지듯 누웠다.


그러던 어느 봄,
군 복무를 마친 동기들이 하나둘 학교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교실에 웃음이 다시 채워졌고 각자의 인생이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웃음 너머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IMF의 후폭풍은 여전히 현실을 짓누르고 있었고, 졸업은 더 이상 희망의 출구가 아니라
본격적인 생존의 시작처럼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그때 대학 캠퍼스는 ‘꿈’보다 ‘준비’가 더 중요해진 공간이었다.
도서관 자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경쟁해야 했고, 전공 서적과 자격증 교재는
가방 속 가장 무거운 짐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속에서도 생계를 붙잡기 위해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예식장 무쇠 밥솥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던 토요일,
비닐하우스 공사장 흙냄새 속에서 땀과 먼지를 함께 들이켰던 여름,
명절이면 고향 대신 새벽시장의 냉기를 먼저 맞이해야 했던 겨울.

방학이라고 해서 쉼이나 해외 배낭여행을 꿈꿀 여유도 없었다.
누군가는 방학을 미래를 향한 도약으로 삼았지만, 나에게 방학은 ‘더 많이 일해야 하는 계절’이었다.

그 치열함 속에서 내 마음은 계산서보다 조금씩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손에 쥔 얇은 봉투는 많지 않았지만 그 봉투 속에는 책임과 자립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었다.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했고, 두려워도 부딪혀야 했고, 부족해도 버텨야 했다.

나와 비슷한 처지로 돌아온 동기들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하는 사람들이었다.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불안을 숨기기 위해 더 바쁘게 움직였으며,

작은 위로에도 조용히 기대어 서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때의 우정은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진했고, 어떤 연애보다도 절실했다.


연애는 사치였고, 우정은 생존이었다.


희망과 불안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어디론가 향하고 있으면서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던 이십 대.

세기말과 세기초가 뒤엉킨 그 혼란의 공기 속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속도로 자기 인생을 조금씩 세워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가 살아가던 시대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기억하고, 어떤 이는 잊고 싶어 하고, 또 다른 이는 도망치고 싶어 했던 특별한 시간.

그때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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