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시를 구원하다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의 시

by Mignon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Elizabeth Barrett Browning)은 당대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시인이었다.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남자 형제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았고,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익히며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재능을 드러냈다. 열네 살에 시를 쓰기 시작했고, 열일곱에 첫 시집을 출판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말 그대로 ‘신동’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선천적으로 허약했고 십 대 때 승마하다 척추를 다쳐 평생 극심한 통증 속에서 살아야 했다. 스무 살 무렵에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녀의 방은 침실이자 병실이자 서재였다. 시 쓰기만이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1844년 엘리자베스는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출간하고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시인이 된다. 그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여섯 살 연하의 젊은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이 그녀의 시에 깊이 감동해 보낸 편지였다. 편지는 곧 수백 통으로 이어졌고, 두 사람은 글로써 생각과 감정을 나누며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문제는 가족이었다. 특히 아버지는 딸의 결혼을 완강히 반대했다. 가난한 젊은 시인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고집스러웠다. 결국 두 사람은 비밀리에 결혼을 하고 이탈리아로 떠난다. 사랑의 도피행이었다.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jpg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1806-1861)


이탈리아의 찬란한 햇빛과 따뜻한 공기,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과의 생활은 기적을 만들었다. 평생 침대에 누워 있었던 여인은 걷기 시작했고, 여행을 하고 사람들과 교류하며 마침내 아들까지 낳았다. 스무 살에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여인이 이후 십수 년을 더 살며 창작과 삶을 이어간 것이다. 사랑은 그녀를 병약한 몸의 감옥에서 꺼내 세상 속으로 나서게 했다.


이 사랑의 체험은 시로 남았다. 그중 대표적인 작품이 「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이다.


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다른 아무것도 아닌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 주세요.
이렇게 말하지 마세요.
‘그녀의 미소와 외모와 부드러운 말씨 때문에 그녀를 사랑해.’
연민으로 내 볼에 흐르는 눈물 닦아주는 마음으로도 사랑하지 마세요.
당신 위로 오래 받으면 우는 걸 잊고
그래서 당신 사랑까지 잃으면 어떡해요.
그저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 주세요.
사랑의 영원함으로
당신이 언제까지나 사랑할 수 있도록.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당신이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 전문


이 시에서 화자는 사랑의 조건을 하나씩 지워 나간다. 미소, 외모, 부드러운 말씨는 당시 보수적인 빅토리아 시대에 여성이 갖추어야 할 보편적인 덕목이었다. 당연하게도 이것들은 변한다. 연민과 동정 역시 사라질 수 있다. 가여워서 사랑하게 된 마음은 더 이상 가엽지 않게 되면 사라져 버린다. 그러므로 그녀가 요구하는 사랑은 단 하나다.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 달라는 것. 이것은 조건 없는 사랑, 즉 존재 그 자체를 향한 사랑이다. 늙어도, 병들어도, 아름다움을 잃어도 지속될 사랑. 병약한 몸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엘리자베스는 사랑의 영원함을 염원하며 그렇게 노래했다. 그 절절함이 시 전체에 조용한 울림을 남긴다.


이 시는 단순한 연애 시가 아니다. 삶의 불안 속에서 ‘나는 어떤 존재로 사랑받을 수 있는가?’를 묻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래서 이 시를 읽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묻게 된다. “나는 조건 없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실제로 이 시를 읽으며 눈시울을 붉히는 학생을 여러 번 보았다. 누군가에게 이 시를 건네받았던 기억을 떠올리거나,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사랑에 대한 갈망을 확인한다. 시를 매개로 잠재되었던 내면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문학치료에서 말하는 치유는 바로 이런 지점에서 일어난다. 시는 읽히는 순간, 한 사람의 내면에 닿아 삶의 경험과 결합한다.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의 삶은 극적인 대비로 완성되었다. 고립과 병약함은 사랑과 회복으로, 억압과 도피는 자유와 창조로 변화시켰다. 그녀는 사랑을 통해 삶의 악조건을 넘어섰고 그 체험을 시로 남겼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남편 로버트 브라우닝은 아내의 시적 유산을 이어받아 영국 최고의 시인이 된다. 예술가 부부로서 함께 성장하고 서로의 정신세계를 확장한 드문 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사람을 단순한 연인이 아니라, 서로를 살린 진정한 사랑의 동반자라고 부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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