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가 영혼을 건드릴 때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by Mignon

이제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의 시를 살펴보자. 엘리자베스 배릿 브라우닝이 사랑을 통해 고립의 방에서 세상으로 나왔다면, 로버트 브라우닝은 시를 통해 세상의 영혼을 흔들어 깨웠다. 함께 읽을 작품은 「아침의 노래」이다. 이 작품은 극시 「피파가 지나간다」(1841) 속에서 주인공 피파가 부르는 노래다.


계절은 봄이고
하루는 아침,
아침은 일곱 시.
언덕에는 진주 같은 이슬,
종달새는 창공을 날고,
달팽이는 가시나무 위에 머문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니
이 세상 모든 것이 평화롭다.
— 로버트 브라우닝, 「아침의 노래」 전문


로버트 브라우닝의 「아침의 노래」는 단정하고 짧은 시다. 시간은 봄날의 아침 일곱 시, 화자는 언덕에 맺힌 이슬과 창공을 나는 종달새와 가시나무 위의 달팽이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모습으로 하늘에 하느님에 계심을 확신한다. 마지막 구절 “이 세상 모든 것이 평화롭다.”는 이 시가 지향하는 세계관을 함축한다. 여기서 평화란 막연한 이상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제자리에 놓여 있는 상태를 뜻한다. 이슬은 언덕에, 새는 하늘에, 달팽이는 나무 위에, 신은 하늘에, 그리고 시적 화자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자리에 있다.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존재들의 조화 속에서 세계는 비로소 평화로워진다. 여기까지가 시 자체의 내용이다. 그런데 시 「아침의 노래」는 극 속에서 주인공 피파가 부르는 노래이다.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래가 불리는 상황, 즉 극적 맥락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텍스트만큼 콘텍스트도 중요하다.


러버트 브라우닝.jpg 로버트 브라우닝(1812-1889)


극에서 피파는 산업화 시대 이탈리아의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어린 소녀다. 1년에 단 하루 주어지는 휴일을 맞아 그날을 의미 있게 보내고자 이른 아침 거리로 나와 존경하는 사람들의 집 창가에서 노래를 부르기로 한다. 자신이 노래를 그다지 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에서였다.


피파가 찾아간 첫 번째 집에는 오티마와 세발드가 있었다. 두 사람은 불륜 관계이며, 오티마의 늙은 남편을 살해한 뒤 비뚤어진 욕망과 불안 속에서 살고 있었다. 때마침 창밖에서 들려오는 피파의 노래는 양심을 일깨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평화롭다.”라는 마지막 구절은 그들의 죄책감과 대비되고, 결국 두 사람은 자신의 죄를 참회한다.


두 번째로 피파가 찾은 곳은 부유한 상인 줄스의 집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아내를 맞아 남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었지만, 그녀의 비천한 출신을 알고부터는 분노에 사로잡혀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노래를 듣는 순간 깨닫는다. 아내의 과거는 그녀의 책임이 아니며, 인간은 조건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줄스는 마음을 돌려 아내를 받아들인다.


세 번째 집에는 혁명을 꿈꾸는 정치가 루이지가 있었다. 그는 부패한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왕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피파의 노래가 들려오자, 자신에게 질문한다. 과연 폭력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할 수 있는가. 결국 그는 칼을 내려놓고 다른 길을 찾는다.


마지막으로 피파가 향한 곳은 늙은 성직자의 집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반복된 업무 속에서 신앙의 생기를 잃어가던 그는 노래를 듣는 순간 하느님이 만든 세상의 질서와 의미를 깨닫는다. 피파의 노래는 그의 신앙을 새롭게 정화한다.


이 모든 변화는 피파가 알지 못하는 사이 일어났다. 그녀는 어느 집의 창가에서도 반응을 얻지 못한 채, 자신의 하루가 헛되었다고 느끼며 다시 공장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독자는 안다. 피파의 노래는 다섯 사람의 삶을 결정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진심 어린 언어는 듣는 이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고 결국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여기서 로버트 브라우닝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 건네는 언어는 언제, 어떻게 타인의 영혼에 도달하는가. 피파는 누군가를 변화시키려는 의도를 갖지 않았다. 다만 성실하게 노래했을 뿐이다. 그 노래는 죄책감, 분노, 폭력, 무기력 속에 있던 영혼들을 이렇게 각자의 자리로 돌아오게 했다. 문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치유의 힘을 갖는다.


에밀리 디킨슨이 작은 새를 제자리에 올려놓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고 말했듯, 로버트 브라우닝 역시 언어가 영혼의 질서를 회복시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시는 직접적인 설교나 교훈 없이도 사람의 내면에 스며들어 변화를 일으킨다. 문학치료에서 시를 중요한 매개로 삼는 이유다.


우리가 건네는 하나의 문장, 한 편의 시, 그리고 한 마디의 진심 어린 말은 즉각적인 반응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군가의 내면에서 오래 울려 퍼지며 삶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 피파는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다섯 개의 영혼이 다시 살아났다. 언어는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다. 문학치료는 바로 이 믿음에서 출발한다.

월요일 연재
이전 03화사랑이 시를 구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