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 충격

안도현, 박치성, 나태주, 최승자의 시

by Mignon

우리는 시를 읽으며 무엇을 원하는가. 그 다양한 감정은 ‘감동, 공감, 그리고 충격’으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감동이다. "꽃게가 간장 속에/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로 시작하는 안도현의 널리 알려진 시 「스며드는 것」은 고통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어미 게의 모습으로 깊은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이 마음이 먹먹해지게 감동한다. 이 시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준다. 저항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자식을 보호하려는 어미의 태도는 독자의 무의식을 조용히 흔든다. 분석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눈물이 나는 이유다.


감동이라는 큰 울림은 아니더라도 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혹은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하는 그런 느낌으로 마음을 살짝 건드리는 시도 있다.


민들레가 어디서든
잘 자랄 수 있는 건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는 바람에
기꺼이 몸을 실을 수 있는
용기를 가졌기 때문이지

어디서든 예쁜 민들레를
피워낼 수 있는 건
좋은 땅에 닿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고
바람에서의 여행도 즐길 수 있는 긍정을 가졌기 때문일 거야

아직 작은 씨앗이기에
그리 조급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리 불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넌 머지않아
예쁜 꽃이 될 테니까
-박치성, 「봄이에게」 전문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나태주, 「멀리서 빈다」 전문


나의 시 강의에는 ‘인생 시 발표’ 시간이 있다. 복잡한 이미지 분석이나 거창한 이론은 접어두고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인생의 소중한 보물로 남은 그런 시를 발표하는 시간이다. 위의 두 편의 시는 학생들의 인생 시 발표에서 가져왔다.


박치성의 「봄이에게」는 읽는 순간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고등학교 시절 학력평가 필적 확인란에 이 시의 마지막 구절 “넌 머지않아 예쁜 꽃이 될 테니까”가 제시문으로 나왔다고 했다. 시험지를 막 받아든 수험생들에게 이 시구절이 얼마나 따뜻한 위로가 되었을지 짐작이 긴다.


나태주의 시도 학생들이 좋아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로 시작하여 “너도 그렇다”로 끝나는 「풀꽃」은 누군가에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남고 싶은 스무 살 청춘의 마음을 대변한다. 그리고 이 시 「멀리서 빈다」에서 시인은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이 다시 눈부신 아침이 되니 부디 아프지 말라며 독자의 여린 마음을 다독인다.


이런 시들은 삶을 바꾸지 않는다. 그러나 미세한 힘으로 삶을 보다 잘 견딜 수 있게 만든다. 따뜻한 공감의 힘이다. 이런 시들이 여러분에게 치유를 가져다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충격이라는 또 다른 카타르시스가 삶을 다양한 각도에서 되돌아보게 한다.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있는 기억의 폐수(廢水)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전문


이 시는 불쾌하다. 거칠고 추하고 노골적이다. 일상에서조차 잘 안 쓰는 언어들이 시어로 자리 잡고 있다. 재목부터 충격적이다. ‘개 같은’ 가을이라니. 그리고 매독과 폐수, 말 오줌 냄새 언저리에서 사물들은 말라비틀어지거나 썩어 문드러진다. 그렇게 오감을 자극하는 불편함과 불쾌함이 독자에게 강한 정서적인 충격을 준다. 문학치료에서 카타르시스는 반드시 따뜻함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충격이 억눌린 감정을 일깨우는 열쇠가 된다.


최승자.jpg 최승자 (1952-)


상처의 표현은 아름다운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감정은 추하고, 악취가 나고, 모욕적인 언어로만 표현할 수 있다. 최승자의 시는 그러한 감정의 정당성을 회복시킨다.


카타르시스


카타르시스는 억압되거나 응어리진 정서를 해소하여 마음을 정화하는 작용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이 관객에게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통해 정서의 정화를 이끈다고 보았다. 책 읽기를 통해 경험하는 카타르시스 역시 이와 유사하다. 독자는 작품에 몰입하는 과정에서 우울감과 불안, 긴장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해소함으로써 심리적인 안정에 이른다.


또한 정신분석학에서는 억압된 감정을 외부로 표출하는 과정이 정서를 회복하는 데 중요하다고 본다. 글쓰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카타르시스다. 이때 문학의 상징적 표현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데에 따른 심리적 저항감을 완화하는 유효한 장치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문학치료에서 카타르시스는 책 읽기와 글쓰기의 두 과정 모두에서 작용한다. 읽기를 통해 흔들린 감정을 쓰기를 통해 자기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해 나가는 과정이 문학치료의 핵심적 실천 단계이다. 결국 문학치료에서의 카타르시스는 ‘타인의 이야기로 마음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로 마음을 회복하는’ 이중의 치유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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