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랑

by MAMA

"러브 이~~~즈 더 모멘트"

이민호가 스물 여덣이었을 때, 어쩜 그렇게도 교복이 잘 어울리던지 박신혜와 애절한 하이틴 로맨스 드라마였던 상속자들은 보고 또 보아도 명작이다. 막둥이 녀석이 뱃 속에 있었을 때 한국 드라마를 불법으로 다운로드해서 미국 워싱턴주 어번 촌동네에서 큰 아이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보았었다. 그 때가 2013년 가을이었다. 입덧도 심하지 않아서 밥을 밥 솥째 먹을 때였다. 배가 불룩해서는 바가지에 간식이며 과일이며 끌어 안고 소파에 앉아 큰 아이와 '상속자들'을 보고 또 보고, 보고 또 봤다.


작년 추석이었다. 연휴 끝에 뒹굴거리다 막둥이 녀석과 '상속자들'을 이틀만에 정주행했다. 스즈메의 문단속에 빠져있던 중1 큰 아이는 '상속자들'이 유치하다면서 혀를 끌끌 찼다. 얼마 전, 채널을 돌리다가 얻어 걸린 '상속자들'을 보았다. 주말에 다섯 회씩 연속방영을 해주다보니 새벽 두 시가 다 된 시각에 잠이 들었다. 이번에는 큰 녀석도 함께 했다.


저렇게 고등학생들이 창자가 다 녹을 듯하게 사랑을 할 수 있는지 내가 갖지 못했던 저 시절의 뜨거운 아름다움이 부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볼 때마다 늘 새로운 것인가 보다. 난 참 밋밋하고 건조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재미라고는 1도 없는 학창시절을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 난 꽤 새침떼기였다. 아니, 그 그보다도 얌전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소녀였다. 아버지가 무뚝뚝하고 엄한 경상도 분이시라 대화라고는 밥 먹을 때 몇 마디뿐이었던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러다 보니 남자와 어떻게 소통해야하는 지 조차 몰랐고, 남자 아이들이 말이라도 시키면 얼굴이 벌게져 하루 종일 심장이 나대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를 괴롭히던 남자 아이들 둘이 있었다. 반전은 그 둘이 나에게 고백을 했다는 데 있다. 그 두 녀석때문에 어찌나 학교 생활이 힘이 들었는지 모른다.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려서 혼이 나도 놀리고 괴롭히고를 일삼던 아이들이 고백을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집 앞에 놓인 선물과 편지를 내동댕이 쳐버렸다.


중학교 시절엔 외국어 고등학교를 간다고 공부를 엄청나게 했다. 입시학원을 다녔던 그 때, 학원 버스에서 어느 고등학교 오빠에게 반해버리는 사건이 있었다. 난 그 오빠를 그 후로 약 7년동안 짝사랑 했다. 대학생이 되어서 그 오빠가 친한 친구의 오빠와 베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백을 하려면 아니, 얼굴을 볼 수 있는 자리라도 만들려면 만들 수 있었지만 난 결국, 아무 사고도 치지 않았다. 그렇게 7년의 짝사랑, 아니 외사랑을 홀로 마무리지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짝사랑의 대상이 되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일자로 시원하게 뻗은 건물이었다. 남자 여섯반 여자 여섯반 정확하게 중앙현관을 기준으로 남녀가 나뉘어져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난 7반이었고 남녀가 마주치는 중앙을 기준으로 2층 첫 번째 교실에 위치했다. 그렇기에 중앙현관은 우리 반이 청소를 담당했다. 1층 중앙현관을 빗자루로 쓸고 있으면, 1학년 남학생 마지막 반이었던 6반 아이들이 2층에서 내려다 보고 소리를 질렀다. 휘파람을 불고 누구야 누구야 부르는데 청소시간마다 식은 땀이 났다. 그 반에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남자 아이가 있었는데 어느 날은 그 아이가 청소를 하고 있던 내게 쪽지를 건내고 갔다. 알고보니 그 아이는 심부름꾼이었다. 러브레터 우체부. 또 얼굴이 화끈거리고 어쩔 줄을 몰라 쪽지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졸업식 사진을 보고서 내게 쪽지를 주었던 친구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대학교 시절엔 더 어이가 없다. 맷돌에 어이를 뽑아 버린 사람이 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결혼을 한 게 신기할 따름이다. 대학생이 되니 사람이 좀 달라졌다. 지나버린 과거를 잊을 작정을 하고 놀고 먹었다. 술도 퍼 마셔보니 맛이 없어서 그렇지 못 먹을 건 아니었다. 물론, 알탕에 밥이나 비벼 먹는 게 더 맛있는 나를 진작에 알아차린 선배들이 첫 잔 외에는 술을 권하지 않아 다행이긴 했지만 말이다. 이런 나를 귀엽다며 무지하게 따라다니고 좋아했던 선배가 있었다. 내가 받은 술은 흑기사 자청해서 다 마셔주고, 나 만나자고 내 친구들 밥값, 술값에 노래방 비용까지 선배가 다 내주었다. 아프면 약 사다주고, 늦잠자면 깨워주고, 밤이고 낮이고 수업을 들으러 갈 때도 어찌나 챙겨주던지. 그 선배가 나를 좋아하는 사실은 과 전체가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 선배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 선배가 고백을 한 기억도 없다. 그냥 스멀스멀 물들어버린 노을처럼 그의 나를 향한 친절이 일상처럼 되어버려 특별하지 않았다.


지난 학창시절 성냥깨비에 작은 불씨라도 붙이려 했다면 아주 다채롭고 입체적인 연애사를 썼을 터. 후회가 남기도 했다. 그러다 미국을 갔다. 내 볼 품 없는 학창 시절의 연애 이야기는 창피하리만큼 뜨겁지 않았고, 설렘도 없었는데 20대 중반 부모를 떠나서야 불이 붙었던 것 같다. 미국으로 취업을 했던 남자 친구가 자기가 데리러 올테니 1년만 기다리라고 했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미국으로 짐을 싸들고 대학원을 핑계삼아 날아갔다. 그 때부터 만신창이, 엉망진창, 좌충우돌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려운 형편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합리적인 기회였던 마음에 기대보면 조금 내가 불쌍하기도 하다. 공부를 더 해보겠다고 날아 간 미국이었지만, 목표는 한없이 높아 내 사정으로는 이를 수 없었고, 남자친구도 만날 수 없었고, 시간은 갔고, 우린 헤어졌다.


그러나 '김탄'처럼 나를 뜨겁게 사랑한 사람이 생겼다. 바로, 북치는 소년. 그와의 사랑과 연애, 결혼에 이를 때까지 스펙타클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시애틀에서 보스톤까지 보스톤에서 다시 시애틀 그리고 한국. 김탄이 차은상을 열열히 사랑하고 안아주었던 때처럼 나의 북치는 소년은 내 손을 꽉 잡아주었고, 안아주었고, 결국, 고백을 했고, 결혼을 했다. 우리의 마흔이 꿈이라고 부르고 싶었던 그 자리에 있지 않지만 서로의 흰 머리를 보듬어 가면서 늘어가는 주름에 안타까워하면서 그래도 같이 걷고 있다. 야근을 하고 지금 들어와 코를 골며 곯아 떨어진 그는 배를 두드리면서 자고 있다. 우리의 뜨거웠던 그 때는 따뜻함과 은은함이 되었고, 이제 내 아이들이 그 뜨거움을 꿈꿀 때가 되고 있다.


내 아이들이 나보다 더 솔직한 연애와 사랑을 했으면 좋겠고, 10대다운 설렘과 서툼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기도 하고, 고백을 받아들이기도 했으면 좋겠다. 내가 하지 못했던 그 시절의 풋풋함을 좋은 기억 또는 쓴 기억으로 잘 써내려가는 아이들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엄마가 모르는 아빠가 질투할 만한 첫 사랑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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