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꼴찌의 삶을 몰랐다. 알 리가 없었고, 관심도 두지 않았다. 내 삶의 그 어떤 순간도 꼴찌였던 적이 없었다. 기억이 있는 유치원 때부터 단, 한 순간도 공부를 못했던 적이 없었고 , 운동을 포함한 그 밖의 것도 늘 우위를 차지했다. 대학을 포함해 학교라는 공적 또는 사적 교육기관의 학생에 대한 수도 없는 평가에서 엎어져서 책상에 코를 박고 자는 이들의 감정을 전혀 몰랐다. 문제를 다 풀고 남는 시간에 검토를 하고 엎드려 쉬고 있기는 해도 일찌감치 지적기능과 상관없이 손이 가는대로 점을 찍고는 결과와 머나먼 꿈나라로 가는 그들에 대해 단, 1의 감정도 소비한 적이 없다. 무관심했다. 평균이하의 점수 언저리를 오고감에 그 어떠한 감정의 동요가 있든 없든 내 관심사는 한 개를 틀리냐 두 개를 틀리냐에 1등과 2등을 다투며 자존심 대결의 승자가 누가되느냐였다.
학생의 인권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던 학창시절, 교사들의 매서운 눈초리가 따라다녔던 눈썹을 밀고 치맛단을 줄이는 소위 '날라리'들은 범생이였던 나를 참으로 좋아했다. 그들이 수학 문제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이 어쩌다 물어 오는 문제에 대해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어떤 아이는 귀찮아 하기도 했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알 리 없었겠지만 난 그들의 수준을 내 스스로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늘 별 거리낌이 없었다. 그들은 중학교 때 늘 2등이었던 나를 응원했고, 내가 반 석차 1등이 아니라 전교 1등을 하면서 날라리들에게 홀대했던 머리가 크고 잘난척이 심했던 1등을 갈아치우자 환호했다.
날라리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찬란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요즘 말로 덕후질이라고 해야하나? 나는 서태지 덕후였다. 태지 오라버니의 벙거지 모자부터 멜빵바지를 따라 입었고, 당대 최고의 가수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내일은 늦으리' 환경 콘서트를 보기 위해 잠실 주경기장을 매년 갔다. 하드보드지로 필통을 만들어 태지 오라버니의 사진으로 도배를 한 다음 아스테이지로 빳빳하게 싸는 것은 기본이고 잡지에서 받은 브로마이드와 사진들은 자손에게 물려줄 생각으로 코팅을 해서 구겨짐이 없도록 벽에 붙여 놓고 보고 또 봤다. 앨범이 나올 때마다 정식 앨범 테이프를 사서 늘어질 때까지 들었던 건 덕질하는 팬으로 당연했다.
또 다른 덕질로는 농구. 농구에 미쳐있었다. 지금은 한화이글스 야구 팬이지만 내 어린 시절 농구를 빼놓고는 논할 수가 없다. 중학교 시절 학교에서 외고과고 입시 보충수업까지 마치면 5시반이었다. 그 시간에 지하철을 타고 두 시간 걸려 잠실에 도착해서 팬들로 빼곡히 차 있는 경기장에 비집고 들어가 앉아 두 세 시간씩 경기를 보고 집에 11시반 12시에 오곤 했다. 어떤 날은 경기장 입구를 잘못 찾아가는 바람에 뱅뱅 돌아 헤매고 있었는데 상무 선수들을 마주치기도 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농구대잔치에서 연세대학교가 우승하는 것. 대학연맹전부터 농구대잔치 경기까지 모조리 다 챙겨보았다. 특히, 한일전처럼 영원의 숙적 고려대학교와 경기하는 날이면 어떤 날은 잔칫집이 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초상집이 되어 펑펑 울기도 했다.
언니는 꼴찌였다. 어릴 때부터 눈이 아주 나빴다. 엄마 말로는 어렸을 적부터 텔레비젼 앞에서 살았다고 했다. 엄마 말을 잘 안 들어서 오죽하면 쌀 바가지로 때리기까지 했다고 늘 말씀하셨는데 반 백살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에도 여든을 바라보시는 엄마 말을 여전히 안듣는 걸 보면 그 말씀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언니는 빨간 뿔 테 안경을 썼었고, 안경 알은 아주 두꺼웠다. 당시에 안경을 쓰는 아이들은 외모를 일찌감치 포기해야 할 만큼 렌즈압축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었다. 마음이 여리고 울보였던 언니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따돌림을 당했다. 그 안경이 문제였기는 했지만, 언니는 수업에 집중을 잘 하지 못해 선생님께 자주 지적을 받았고, 그런 잦은 지적으로 인해 학생들 사이에서 언니는 의기소침했고 무시를 당했던 것 같았다. 엄마는 언니를 무척 걱정했고, 선생님께 편지를 쓰셨던 기억이 있다. 엄마는 언니 때문에 초등학교 때 학교 임원이란 임원은 매년 자처해서 맡으셨다. 딸래미 기죽지 말라고 교문이 닳토록 학교를 오셨다. 덕분에 언니는 아람단도 했고, 5학년 때는 베스트 프랜드도 생겼다. 심지어 6학년 때는 언니 담임 선생님께서 아파트 같은 층에 사시게 되어 오고 가면서 친분을 쌓았고 언니는 무사히 졸업을 했다.
중학교 때부터였다. 언니는 밥을 마아가린에 비벼서 '응답하라'의 정봉이처럼 한 대접씩 먹곤 했었다. 그 정도로 식욕이 넘쳤다. 그런데 밥을 대접으로 먹던 언니가 중학교 때부터 밥을 반공기 이상 먹지 않았다. 대체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언니는 다이어트를 한다면서 독하디 독하게 밥을 먹지 않았다. 언니가 그렇게 마음을 먹은 데에는 분명 속이 상할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짐작이 되지만 언니는 그에 대해서 절대 말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부터 엄마는 학교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사실, 중힉교부터는 엄마의 적극적인 손길과 참여가 독이 될 수 있어 참여하지 않기도 했겠지만 그래서 더욱 언니의 중학교 생활을 알 수가 없었다. 언니는 초등학교와 다르게 아주 조용히 학교 생활을 했다. 나와 다른 학교를 다니는 바람에 더욱 언니의 중학시절을 알 수 없었다.
언니는 신승훈을 좋아했다. 서태지 덕후질을 했던 나와는 달리, 언니는 신승훈을 좋아했다. 언니가 사서 모은 신승훈 테이프를 나도 즐겨 들었다. 매달 첫 날 잡지가 서점에 깔리는 날이면 언니와 서점에서 몇 시간씩 서서 주구장창 패션잡지를 뻬놓지 않고 보았더랬다. 만화책도 봤는데 나는 슬램덩크를 언니는 원수연의 블루를 보았다. 여하튼 언니의 취향은 그야말로 소녀 감성이었고, 나는 사내아이 감성이었다. 중학교 3년을 건너 뛰고 언니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언니는 학교에서 유명했었다. 그야말로 맨 앞자리에서 수업시간에 자는 걸로 말이다. 모르는 선생님이 없을 지경이었다. 어느 날 모의 고사를 본 후였던 것 같은데 안방에서 아빠 앞에 무릎을 꿇고 심각하게 있던 언니의 모습이 기억이 난다. 엄마한테 들어보니 정말로 꼴찌를 한 모양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녀의 성적이 부모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다고 해도 그것이 혼쭐이 날 만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건 정말 개인의 타고난 의지의 문제다. 어떤 계기가 있어야 한다고 해도 부모의 나무람이 그 계기가 될 수는 없다. 언니의 성적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나아질 문제가 아니었다. 언니는 언니가 원하는 곳으로 갔다. 서울에 있는 패션학교를 졸업했고 밀리오레와 두타가 주름잡던 시절 동대문 패션업계에서 디자이너로 근 10년간 일을 했다. 새벽 4시에 지하철을 탔고, 밤 11시가 되어서야 퇴근을 했다. 언니는 원없이 언니가 원하는 옷을 입었다. 값비싼 명품들은 아니었지만, 청바지만 족히 100개는 되었다.
언니와 나는 달랐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도 정말 달랐다. 동과 서, 남과 북이었다. 언니의 딸들은 언니 같았고, 나의 아이들은 딱 나와 같았다. 사촌인 아이들은 혈족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섞이지 못했다.
얼마 전, 언니의 첫째가 미대에 합격했다. 공부라고는 담을 쌓고 살았고, 모의고사 시간에 꿈나라로 가고, 치맛단이 한참 짧았으며, 일찌감치 쌍커풀 수술을 할 정도로 외모에 지대한 관심이 많았던 큰 조카는 100% 실기만으로 미대에 합격했다. 여덟군데인가 여섯군데인가 원서를 썼고, 몇 달에 걸쳐 실기 시험을 보러 다녔다. 난 합격하리라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기대조차 없었다. 그런데 기특하게도 재주가 뛰어났던 모양이다. 서너 군데 합격을 했고, 어떤 곳은 차석으로 붙었다. 전국의 고3 수험생들이 시험장에서 심장과 머리를 쥐어짜는 그 날에도 수시 합격증을 명분 삼아 수능을 치르지 않기로 하고 제 방에서 늦잠을 선택했다. 그런 아이가 내 조카라는 사실은 내 삶 밖의 영역이었다.
언니의 전화였다.
"합격했어. 나 많이 울었다. 그런 기분이었구나."
언니는 큰 딸의 합격에 감격했다. 난 감흥조차 오지 않았다. 울었다는 말도 그런 기분이었구나라는 말도 그저고개만 끄덕일뿐 공감하지 않았다. 어쩌면 큰 조카에 대한 나의 편견으로 인해 합격이라는 기쁜 소식이 시덥지 않았던 배 아픈 사촌 마인드였던 모양였을 것이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돌아서서 '그 아이가 차석이라고?' 하면서 어처구니 없어 했었는데 어른답게 축하는 못해 줄 망정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그 후, 언니의 말이 계속 생각이 났다. 언니가 단, 한 번도 나의 대학 생활을 부러워했을 법하다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다. 언니는 언니의 삶을 나는 나의 삶을 살 뿐이었다. 언니의 기분을 한 번 쯤이라도 헤아릴 만큼 내가 그렇게 착한 종자는 아니었나보다.
'언니도 대학을 가고 싶어 했을까? 나를 부러워 했을까?'
처음이었다. 언니가 큰 딸의 미대 입시를 위해 대학이라는 문턱을 밟고 구경을 하고 올 때마다 수화기 너머로 '우와! 대학이란 데가 이런 곳이었구나. 엄청 크더라.'라며 설렘을 들려주었건만 나는 언니가 그 때 대학 생활을 부러워 했을 거라는 생각을 대학이란 곳을 가고 싶어 했다는 생각을 결코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살아 오면서 언니가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전혀 생각 해 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가족이라해도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
미안했다. 그리고 언니가 큰 조카의 합격 소식을 들려주려고 울면서 전화 했을 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더럽게 속이 좁아 비아냥거리는 속내로 전화를 받았다는 것 때문에 더 미안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했던 이미연의 말은 맞았다. 꼴찌였던 언니는 차석으로 아이를 미대에 합격시켰다. 내 성적이 자녀의 성적이 될 수도 없고, 자녀의 성적이 내 성적이 될 수도 없다. 행복을 찾아가는 사람의 본능과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방법도 선택도 다 다르기때문이다. 언니는 언니의 행복을 위해 무수히 많은 선택을 했고, 나는 나의 행복을 위해 선택을 했다. 같을 수는 없었다하여도 우리는 가족이었고, 영겁의 초와 분과 시간을 나누었다. 그래서 나 밖에 몰랐던 걸 이제야 알게 되어 미안하지만, 다른 공간에서 다른 가치관을 갖고 달리 살면서 세대를 이어가는 주체인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언니를 이제부터는 헤아리고 응원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