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나는 딱 70살까지만 살다 죽어야지”
아버지는 뒷산 노적봉을 한 두바퀴 돌면서 하루를 시작하신다. 삶은 계란 두 개와 사과 몇 조각을 드신 뒤, 학생 지킴이 일을 하시기 위해 나서신다. 오전에 세 시간 정도 일하시고, 집에 귀가 하신 후 더운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해서 냉방비나 난방비 걱정없는 집 근처 도서관에 가셔서 잉크 냄새나는 신문을 읽으시고 문학책 몇 권을 읽으시면서 오후를 보내신다. 녹내장이 와서 아침과 저녁에 안압을 낮추어 주는 안약을 넣어야 하는 충열되는 피로한 눈에도 불구하고 독서는 아버지의 하루를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낙이다. 주말에는 고등학교 동창이자 60년지기 친구 두 분과 5-6km 되는 수원 화성 행각 둘레길을 돌고는 반주 한잔을 걸치시면서 백반 맛집에서 소박한 식사를 하시고 귀가 길에 만두 한 팩을 사서 집에 오신다.
어머니는 늘 125살까지 사시겠다고 하셨지만 아버지는 심심해서 그렇게까지 살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삶에 그렇게 미련이 없었던 이유는 아버지의 삶이 녹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하나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던 사방이 막힌 곳에 좁다란 길을 홀로 걸어갔던 삶이라고 할까. 아버지는 목소리가 좋아 어릴 때 합창 대회에 나가면 상을 받았고, 문학소년이라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바지런해서 청소와 빨래도 하며 집안일을 도와드렸고, 공부도 잘 했다. 가난한 형편이었지만 인고의 삼수 끝에 할머니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의대를 갔는데 등록금을 낼 형편이 아니었다. 가정교사를 하면서 근근이 그리고 악착같이 버텨봤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동생 네 명과 홀어머니를 먹여 살려야 하는 장남의 책임감에 의대를 포기했다. 그 의사의 꿈을 자식들 중에 누군가 이루어 주었기를 바랐다는 것을 마흔이 돼서야 알았다. 아버지의 삶은 그 후, 치열했다. 60명씩 과외를 하면서 가족 생활비를 벌었다. 의대 중퇴에 딱히 기술도 없었고, 그래도 똑똑하셨던 덕분에 몸이 고생치 않고 할 수 있는 거라곤 과외 선생이 전부였다. 그 때, 아버지 집의 형편이 어떠했는지 다 알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가 열심히 일해서 동생들도 결혼을 시켰고, 아버지는 서른 넷, 그 시대의 어른으로 꽤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셨다. 그 후로도 아버지는 직장을 여러 번 옮겼고, 부동산 중개업도 해보았고, 운수사업도 해보았고, IMF때 사업이 망해 막다른 길에 놓여 다단계도 해보았고, 대형 마트 야간 청소도 해보았고, 대리운전도 해보았고, 환갑이 넘으신 후부터는 노인복지센터에 등록을 해서 정부해서 주는 노인 일자리를 지금까지 꾸준히 하고 있다.
올해 팔순이신 아버지는 연로하시지만, 일을 놓을 수가 없다. 아이 셋을 그렇게 온갖 일을 마다 않으며 했어도 늘 모자랐고, 자신을 위해 남은 건 아무것도 없기에 노인 일자리로 버는 삼사십과 정부에서 주는 노령연금 이십만원이 아버지의 한 달 소득이다. 아버지는 아직도 아끼고 또 아껴야 하는 삶을 사신다. 나도 사는 게 빠듯해 용돈 한 번 제대로 드린 적이 없다. 불효의 죄책감을 늘 앉고 사는 건 할 짓이 못 되지만 나도 아이들을 데리고 경쟁 사회에서 버티다보니 그 죄책감과 죄송스러움이 무뎌질 때도 있고 잊혀질 때도 있다. 누군들 떵떵 큰 소리 치며 지갑을 열어 놓고 살고 싶지 않을까. 나도 아버지가 지났던 그 시간의 발자욱을 따라 어른이 되었고, 부부가 되었고, 부모가 되었고, 쓰린 마음과 말 못 할 사정이 점점 많아지는 어느덧 그런 아버지의 인생을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가는 시간보다 내 자식의 가는 시간을 더 안타깝게 여기는 아직도 부모 앞에 철없는 자식이다. 가끔 아버지는 사위와의 술자리에서 두런두런 얘기할 때면 의대 다닐 때 상당히 재미있었고 천성이었다고 아쉬움에 말씀하시며 자식들이 아니라도 손자들 중에서라도 의사 한 명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말씀하셨다. 얼마 전, 부모님을 봉양하느라 장가가 늦은 마흔 갓 넘은 남동생이 딸의 돌잔치를 했는데 돌잡이 때 청진기를 잡자 아버지는 뛸 듯이 기뻐하셨다. 마치, 소원성취를 하신 듯 연신 손녀 손을 잡고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오늘은 아버지의 팔순 생신 잔치를 위해 열다섯이나 되는 우리 가족이 한 자리에 모였다. 가족사진을 찍었고 고급 중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생각해보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우리 삼남매는 사진관에 가서 가족사진 한 번 찍은 적이 없었다. 그만큼 삶에 경제적 여유라고는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친정에 가면 우리의 가족사진은 모두 결혼식 사진이 대체했다. 부모님은 사시는 동안 오늘 처음 사진관에 오셨다. 메이크업도 받으셨고,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도 입었다. 깜찍한 티아라도 썼고, 나비넥타이도 멨다. 결혼 46년. 빡빡한 형편에 우여곡절도 많았고, 그래서 늘 다투고 싸우고 그러려니 돌아서고 또 참고 살고 그렇게 버티다보니 커버린 자식들이 제 형편에 맞게 짝을 찾았고 결혼자금 하나 없이 결혼했던 자식들이 아이들 잘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래도 뭐 하나 제 뜻대로 된 적이 없던 인생의 고됨과 힘듦의 연속은 지우개로 지울 수 없는 삶의 발자욱이기에 몇 살까지만 살아야지라고 떠남을 정해 놓은 아버지.
완고하신 아버지는 그렇게 입기 싫다던 턱시도를 입고 활짝 웃으셨고, 저녁 식사를 드시면서 행복해 하셨다.
“10년 뒤에도 또 이렇게 하면 좋겠다. 내가 살아 있을까?”
처음이다. 아버지께서 더 살고 싶다고 하신 건. 아버지의 얼굴에 삶을 붙잡고 싶은 아쉬움을 느꼈다. 삶이 무료하고 힘들 땐 죽음을 모르셨지만, 삶이 살만하다 행복하다 느끼시는 순간 죽음이 가까웠음을 깨달은 아버지는 이제야 더 살고 싶으신 것 같았다. 순간, 밀려오는 슬픔을 참을 수 없어 난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이제야 나는 정말 진심으로 아버지가 오래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불혹의 성장통은 왜 이렇게 아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