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이 시작되었다.
이번 감기를 심하게 앓고 난 후, 후유증이 생겼다. 두 딸이 번갈아가면서 아팠던 터라 내 몸의 감기바이러스를 이길 시간도 힘도 여유도 턱없이 부족했던 탓이었다. 막둥이의 항생제 부작용으로 인한 전신 콜린성두드러기, 그 뒤 바로 이어진 큰 녀석의 독감치레. 나도 말하고 싶었다.
'엄마도 아프다'
이번 감기는 지독하게 오래갔다. 11월 중순즈음 시작된 감기는 12월이 지나고 새해를 맞이할 때 끝이 났지만, 그 이후로 왼쪽 귀에서 오른족 귀를 관통하는 듯한 진동 소리를 남겼다. 근무를 하고 생활소음에 노출되는 시간이 많은 낮 시간 때에는 느낄 겨를이 없지만, 밤이 되면 이명소리가 커진다. 특히, 자려고 침대에 머리를 누이는 순간 절정에 이른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씨에 비염이 심해지자 소리의 울림이 더욱 커지는 듯 하다. 그렇게 2주가 흘렀다. 견디다 못해 요며칠 한의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와! 이겼다."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자 두 딸의 환호소리가 들렸다.
"엄마! 아빠랑 공기놀이했는데 우리가 이겼어."
"그래?"
"자기야! 어서와. 오늘 내가 자기 먹고 싶다고해서 카레했지."
"자기야! 어떡해. 나 사고쳤어. 한의원에 가려고 건물 주차장 진입하는데 앞서가는 두대의 차들이 들어가면서 만차가 되니까 주차 차단기가 내려온거야. 경사가 많이 급했는데 당황해서 후진을 밟아야 하는데 악셀을 밟아서 차단기를 차로 조금 밀어서 휘어졌지 모야."
깔깔대던 분위기에 한 순간 찬물을 끼얹었다.
남편은 요새 유급 휴가 중이다. 회사에서 남편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직장내 괴롭힘을 일삼던 상사가 있었는데 아내와 자식 생각해서 남편은 끝까지 싫은 소리 한번 내지 않고 인내했고 때마침 좋은 기회에 이직이 결정되어 사표를 냈다. 남편은 처우나 급여 면에서 회사를 떠날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그 상사와 같이 회사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정도의 폭언은 계속되었고 사장도 그 사정을 직원들에게 들어 인지하고 있었지만 사내에 그 상사가 중책을 맡고 있어 이를 간과할 수 없는 사장은 이직 전에 남편에게 사직을 권하였다. 결과가 이직이 되어 사장도 양심의 가책 정도만의 무게를 덜 수 있어 남편을 위해 작은 송별회도 열어 주었지만 결국은 권고사직이 그 실체다. 이직 결정 후, 더 악랄해진 상사와의 마찰을 피하케 하고자 사장은 남편에게 원래의 마지막 근무일자를 앞당겨 재촉했고 유급휴가를 권하면서 뜻하지 않은 쉼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편은 결혼 후 17년만에 평일 낮에 방학을 맞이한 아이들과 늦잠도 자고 학원도 데려다주고 밥도 하면서 내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얼마만인지. 주말부부는 할 게 못된다. 서로 떨어져서 평일의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고작 이틀인 짧은 주말을 아이들과 복닥거리면서 보내면 이내 다시 일주일이 시작되고 평일에 일어나는 집의 대소사의 짐을 나눌 수가 없었다. 온전히 나의 짐이었다. 아이들의 식사도 학업도 학원도 일상들도 그에 관련된 모든 푸념과 부수적인 책임들도 나의 몫이었다. 거기에 집이나 차에 관련된 어떠한 일들의 발생도 짬을 내어 해결해야 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속되다보니 내 몸이 어떠한 지 살펴볼 여력은 당연히 없었다. 머릿속은 늘 다음에 할 일에 관한 계획이 분단위로 가득차있고 발은 늘 바빴고 심지어 운전대도 급했다. 그런 내게 드디어 평안이 찾아왔다. 업무중에 늦잠자는 아이들을 깨우지 않아도 되고, 아이들 아침과 점심 식사를 위해 새벽 밥을 해놓고 출근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며, 퇴근 후 아이들의 학원으로 가지 않아도 되고, 급히 저녁 식사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결정적으로 방학동안 아이들과 보내지 못하는 시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서 정말 하루가 이렇게 고요하고 편한 마음으로 지나가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정신적 육체적 휴가를 즐기고 있다. 그래서 이때다 싶어 받으려던 이명치료였던건데 하필 이런 때에 사고를 치다니...
"잘 다녀와. 오늘도 한의원 다녀올거지?"
"아니야. 그냥 올게."
"한의원 가서 치료 받고 와. 내가 밥 해놓을게. 여행갔다 온 셈 치자. 어디가서 돈 쓰느니 등산도 다녀오고 어머님 아버님도 뵙고 그러면서 소소하게 보내면 되지. 괜찮아. 그리고 사고관련해서 연락오거든 나한테 넘겨. 자기 일하는데 내가 다 처리할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침 출근 길에 남편의 이런 배웅을 받는 건 참 기분 좋지만 어제의 일로 마음이 무거워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누워 있을 수가 없기에 오늘은 퇴근 후 집에 오려고 마음 먹었다. 대략 파손 수리 비용은 50만원에서 60만원이 될 듯 싶지만 차단기의 사양에 따라 금액이 더 높아질 수도 있어서 걱정이 앞섰다. 다음주 즈음에 가족끼리 겨울 여행이라도 다녀올 모양이었는데 속이 상했다. 전전긍긍하는 내게 두 딸과 남편은 뭐라 하지 않았지만 남편은 내심 많은 비용 청구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경찰이 남편에게 연락을 했다. 나는 사고 직후, 주차시스템에 신고를 해서 시스템고장접수를 했는데 주차시스템 고장 담당자가 건물 관련 관리사무소장에게 연락을 하기 전에 관리사무소장이 CCTV 확인 후 뺑소니라 생각하고 경찰에 신고를 한 것이다. 남편은 뺑소니가 아니라고 확인시켜주었고, 관리사무소장은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근무하는 내내 마음이 편치를 않았다.
'하나님! 제가 사고치고 튀고 싶었는데 양심에 찔려서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어 자진 신고 접수를 했습니다. 제발 큰 비용이 발생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점심시간이 지났고, 남편에게 연락이 왔다.
"엄청 좋은 소식이야. 건물 담당자가 파손처리 이번에 그냥 넘어가겠다고 했어. 그 주차장 차단기가 최근에도 파손된 적이 있어서 어차피 수리하려고 했었다고 하네."
눈물이 찔금 나왔다. 정말 홀가분했다. 내 휴가가 주차장 차단기 파손 수리 비용으로 온통 날아가는 줄 알았다. 아직 안된다고 조금 더 남았다고 제발이라고 어젯밤 꿈속에서 얼마나 외쳤던가. 엄마의 휴가가 엄마로 살아가는 동안 몇 번이나 오겠는가. 이토록 짧은 휴가가 얼마나 달콤한지 심심한 꿀차를 마시는 느낌이랄까. 나에게 혹독하고 급했던 지난 날들에 대한 작은 보상이지만 남편이라는 든든함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남편의 휴가는 진실로 나의 휴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