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6장 49절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 행함이 곧 믿음이다. 예수님께서 가라하면 가고 와라하면 와야한다. 사랑하면 사랑하고 용서하라 하면 용서해야 한다. 백날 천날 교회에서 봉사하되 용서치 못하는 자가 있고, 사랑치 못하고 정죄하며 비방하는 자가 있다. 아니 허다하다. 그들은 자신의 어떤 봉사하는 행위에 구원이 그리고 상급이 있다 생각하고 확신하며 자신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라 믿으나 실상은 듣고도 행치 아니하는 흙위에 주초없이 집을 지은사람으로 곧 무너짐이 예견되어 있다. 교회 청소나 식당봉사 각종 헌신에 구원이 있다 생각한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다를 바 없다. 이들에게 행위에 대한 구원을 구원이라 믿는다면 그것은 자기만족의 대가인 것이다. 일명 사랑장이라고 하는 고린도후서 13장 3절 '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없이도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없이 봉사도 할 수 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도 헌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상은 이미 이땅에서 받은 자기 만족과 세상의 인정 그 뿐이다. 자기만족의 헌신과 봉사와 예수님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들의 행위가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세상에 나가 자기 이름을 내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인데 주님과 이들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읽었다면 그 말씀을 믿는 자는 행해야 한다.
식사시간에 엄마가 정성들여 맛있는 새로운 음식을 만들었다. 원래 먹던 메뉴는 아니었지만 엄마의 야심찬 시도였다. 아이들은 낯선 음식이라 먹기를 꺼려하지만 엄마는 재차 먹어보라고 권한다. "한 번만 엄마 믿고 먹어봐봐. 아주 맛있어" 라고 설득한다. 그 말에 믿고 순종하는 아이는 두려움의 한 입을 먹어보고는 신세계를 맛보았느라 하고 신나게 즐거움으로 식사에 참여한다. 그러나 끝까지 두려운 아이는 엄마의 말을 믿지 못했다. "나는 괜찮아"라며 자기 위로, 자기 합리화를 시키며 식사시간 내내 즐겁게 먹는 형제나 자매를 부러움반 의심 반의 시선으로 쳐다볼 것이다. 결국, 그 끝은 무엇일까. '맛이 없었을 거야. 안 먹기를 잘 했어. 그런데 정말 맛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될 것이다. 믿지 못함은 의심의 연속이 발목을 잡는다. 그 아이는 그런 상황이 또 오고 또 오더라도 자신을 이기지 못한다면 자신의 고집스러운 미련한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면 똑같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엄마의 심정은 어떨까? 잘 먹는 아이가 예쁠 것이다. 나중에는 아예 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잔치에 우리는 순종으로 참여해야 한다. 새포도주가 아닌가? 묵은 포도주가 맛있다고 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집스럽고 미련한 자다. 두려움에 편식하는 자가 아니라 즐거움과 도전의 담대함으로 믿고 순종함으로 주님의 솜씨를 맛보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은 그런 자들을 위해 더욱 신이나서 잔치상을 준비하신다. 순종하는 자에게 더 맛있는 더 좋은 걸 준비하시고 일하신다. 어떤 엄마가 편식하는 아이를 위해 음식준비를 하는 것이 즐겁겠는가?
주님이 주신 모든 말씀을 듣고 맛있게 먹어야 한다. "들었으면 행해야 한다." 믿고 실천하자. 처음에는 두려워도 놀리운 일이 생길 것이다. 주님이 행하심의 참된 기쁨을 맛볼 것이다. 그리고 계속 놀라운 일을 평안한 마음으로 우직하게 행하게 될 것이다. 혹 타인이 손가락질 하며 비웃는 어처구니 없는 일일 지라도 말이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 분이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다. 이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신 분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두려움이 있는가? 하나님의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행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아라. 그 기쁨과 평안은 헤어나올 수 없는 참된 안식이다. 들었으면 하라. 그게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