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생활을 시작한 지 벌써 넉 달이 지났다. 다섯 번째 월급날이 가까워 오고 있다. 정신없이 일을 배우던 석 달의 시간이 지나가 이제 제법 일이 손에 익어 시간이 안 갈 때도 있다. 물품들이 밀려 도착하는 아침나절 몇 시간 쉴 사이 없이 일하다 겨우 앉아 서류 작업을 하려다 보면 허기가 진다. 그제야 시계를 보고 늦잠을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우려고 전화 한 통을 한다. 그 덕에 화장실도 가고, 차창에 쏟아지는 햇살을 숨을 들이마시며 흠뻑 흡수해보기도 한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 있다 보면 눈부신 햇볕이 몸에 보약인 듯싶은 때가 아주 많다. 잠깐씩 내다보는 바깥 풍경이 액자처럼 변함이 없어 지루하지만 때때로 부는 바람과 흔들리는 나무와 매일 다른 날씨가 이 지리멸렬한 쳇바퀴를 잊게 해주는 비타민이 된다. 시간은 아직과 벌써의 맞물림으로 흘러가고 어느덧과 또다시로 반복된다. 겨우, 한 통화의 전화로는 아이들의 방학의 긴 꼬리를 붙잡고자 하는 늦잠을 깨울 수가 없다. 서 너 번 통화음이 길게 이어지고서야 부스스한 목소리 또는 짜증의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한다. 얼르고 달래서 눈이라도 뜨게 한다. 그렇게라도 해야 정오 전에는 이불 밖으로 나와 제 할 일을 한 두 시간은 할 수 있다. 햇살도 내게 귀한 그 나름의 영양소이기는 해도 아이들의 목소리만큼은 신체를 비옥하게 해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이럴 때, 가끔 엄마 생각이 난다.
'우리 엄마도 그럴까?'
그렇게 10분의 숨 고를 시간이 앞으로 남은 다섯 시간의 근무시간을 견딜 수 있는 충전제가 된다. 일을 배우며 긴장의 연속인 나날을 보낼 때, 박대리가 사장님께 이런 말을 했다.
"문주임님은 쉬지도 않아요. 쉬는 시간도 없이 일을 하세요."
사장님께 잘 보이려고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다. 워낙 성실이 무기인 탓에 뭐든 열심히 하다 보니 공부도 잘하게 된 것이라 머리가 좋아 잘하는 아이들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적은 능력이지만, 이 나이에 어디 가든 한 두 달 정도면 일이 손에 익고 석 달 정도면 99프로를 해낼 수 있다는 소소한 자랑과 자부심이 생긴 것뿐이다. 그래도 근무시간 중 두 번의 10분 정도의 쉬는 시간을 때맞춰 챙기기는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점심시간도 잘 챙기지 못해 입사동기 박대리님이 매번 전화했지만 그것이 미안해서 자재실의 고장 난 시계도 고쳐 달아 놓았다. 덕분에 12시가 넘지 않는 시각에 2층으로 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2층의 주임님들은 점심시간 시작 5분 전에 담배 한 대 피우려고 먼저 나가 불이 꺼진 지 벌써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쯤 되면 남편의 말과 은행에서 팀장으로 15년째 일하고 있는 남동생의 말이 괜한 말이 아닌가 싶다.
"아이고 말도 마! 담배 피우는 사람들을 월급을 깎아야 해. 사람들이 밀려오는데도 그저 그 담배 피우려고 쉬는 시간을 꼬박꼬박, 화장실 가면서도 틈틈이 꼬박꼬박 담배를 피우고 와. 나는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사람들 받는데 말이야."
남동생의 직급이 열사람의 아랫사람을 거느리는 팀장이기는 해도 사람들의 은행 업무가 몰리는 월말과 월초가 되면 여전히 바쁜 모양이기에 열을 내면서 제 취향과 입맛만을 이기적으로 취하는 요주인물들을 힐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거 알아? 처남!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안 피우는 직장인들보다 건강하다고들 하네. 때맞춰 잘 쉬어주어서 말이야. 담배 한 대 피우면서 하늘 보며 바람 쐬며. 그 시간에 더 일한다고 돈 더 안주지만 담배 안 피우는 사람들은 습관이 되어서 엉덩이 떼기 싫어한다니까. 길게 일하려면 어쩜 그들이 현명한 거지."
머리에서 김이 나기 시작한 남동생을 향해 남편이 진정하라고 하는 말인지 휘발유를 붓는 것인지 여하튼 설 연휴에 만난 그들의 잠깐 지나가는 대화였다. 이기적임에 대한 현명함의 발견이란....
오늘도 씁쓸하게 바쁜 하루가 지나갔다. 전에 말했던 수십, 또는 백여 가지의 물품들이 한꺼번에 도착하는 화요일이었던가. 땀 흘릴 일 없는 사장님이야 자재실에 오시면 춥다고 몸을 웅크리고 목을 어깨 사이로 비집어 넣고는 잠바 주머니에서 손도 안 꺼내고 계시지만 나는 숨을 헐떡이며 땀이 날 정도로 바빠 히터를 켜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그렇게 8 시간이 지나가니 퇴근이 아니라 탈출에 가까웠다.
"내일 봬요!"
부리나케 차에 타 시동을 걸자마자 이 올가미 같은 구역을 벗어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액셀을 밟을 상황이 안되었는데 오늘따라 차들이 때맞춰 초록신호등을 받고는 바로바로 빠져주는 바람에 시원하게 그 꼬리를 물고 좌회전을 할 수 있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회사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어린이 보호구역이 한 군데 있다. 회사에서 나오기 시작하여 좌회전을 하자마자 100미터쯤 직진을 하다가 우회전하는 커브 초입에 카메라가 위치하고 있다. 그 커브는 야트막한 산을 끼고 있어서 커브를 돌 때는 보이지 않고 커브를 하자마자 나타난다. 그러니 아차 싶어 인지하지 못하고 깜빡 액셀을 밟으면 여지없이 딱지를 떼고 마는 것이다. 집을 향한 질주 본능으로 시작된 액셀이 신나는 감정 분출 3분 만에 좌절의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이었다.
바로 그 순간.
커브 길에 매번 걸리던 빨간 신호등이 그날따라 내게 길을 내어주었다. 이게 웬일이냐며 초록 신호등에 눈이 부시던 찰나. 차의 속도는 40km/h를 막 넘고 있었다. 어쩐지 햇살이 눈이 부시게 날이 좋았더랬다.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보는 순간. 심장도 멎을 뻔하고 내 차도 심정지상태였다.
급정거를 했지만 이미 찍혔을 것 같았다. 후회가 밀려들었다. 오늘 진짜 열심히 일했는데 후회할 꺼리라고는 쉬지 못했던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회사를 향한 나의 열정이거늘 이렇게 과태료로 갈무리하는 하루라니...
쉼은 무엇에든지 오래 지속하기 위한 필요가 아니라 필수조건이었던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