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은 엄청난 폭설로 시작되었다. 해가 바뀌어 아이들의 길고 긴 방학이 끝난 3월 4일에도 종일 눈이 내렸다. 끝 눈이련가. 겨울이 가기 전에 꽃이 피는 봄이 옴을 시샘하는 지극히 겨울 입장에서의 어학사전 의미 '꽃샘추위'. 아직 봄의 일각은 여삼추인가.
올 겨울은 겨울답게 추웠다. 몇 해 전,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이변으로 겨울임에도 따뜻한 날씨가 지속된 적이 있었다. 그 해, 겨우내 해충이 죽지 않아 모기가 찬바람에도 기승을 부려 12월 초까지도 리퀴드형 전자모기향을 계속 꽂아 놓았었다. 그런데 올 해는 눈 구경도 실컷 했고, 추위에 손발과 볼이 꽁꽁 얼었던 적도 살갗이 찢어질듯한 적도 있었다. 출근 직후, 3층 자재실은 냉동창고 같이 차가웠으며 15시간 열이 지속되는 국내산 핫팩이 없었다면 진작에 그만두고 싶었을 혹독한 수습기간이었다. 지난주부터 날씨가 제법 풀려 영상기온을 회복했다지만 봄바람이 살을 파고든다는 엄마의 말이 문득문득 생각날 정도로 거센 찬바람에 롱패딩을 벗어던질 수가 없어 다시 꾸역꾸역 입었다. 역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따뜻한 온기가 금세 올라오는 패딩만큼 성능 좋은 옷은 찾아볼 수가 없다. 새 학년 새 학기 첫날, 멋 좀 부리고 학교에 가겠다는 아이들을 뜯어말려 기어코 롱패딩을 입혀서 학교를 보냈는데 정말 칭찬받을 만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점심시간이다. 보통 점심을 같이 먹는 동료는 천상 영업부 박대리, 입사동기 구매부 박대리, 그리고 얼마전 뇌경색으로 2주간 병원에 입원하셨던 영화광이자 음악광 50대 허기사님과 울진에서 상경하여 입사한 지 두어 달 된 영업부 김과장까지 나를 포함하여 총 다섯 명이다.가끔 영업부 박대리나 김과장이 거래처로 납품을 가서 점심시간 내에 회사에 복귀하지 못한 날은 인원수에 변동이 있기는 하지만 보통 변동 없이 점심 메이트는 유지된다. 점심은 회사에서 약 1km 정도 거리에 있는 한식뷔페에서 먹는데 오고 가는 길이 도보로 15분 정도 되지만 마땅히 걸을 수 있는 길이 없어 회사 차로 오고 간다. 나머지 사원들인 고양이 엄마 박차장과 자재부 주임님들 포함 다섯명은 다른 차로 이동해서 오기때문에 식당에서 합석하지 않는 이상 따로 먹는거나 다름없다. 회사 차량이 SUV인데 어쩌다가 영업부 사원들의 부재로 한 두 자리가 빌 경우, 동갑내기 사장님이 합석을 하신다.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동갑내기 사장님은 입이 짧다. 입이 짧은 것을 미식가인 것처럼 포장하기는 하지만 한식뷔페에서 시판용 소스로 버무린 떡볶이가 나오는 날을 좋아하는 걸 보면 미식가엔 못 미치는 미각의 소유자다. 주변 제조업 공장 직원들을 상대로 하는 점심이기는 하나, 나름의 철학을 갖고 건강식도 시도하고 같은 가격의 냉동식품이라도 좋은 걸 찾으려 하는 주인장의 노력이 엿보여서 꽤 손님이 늘고 있다. 이런 노력과 수고도 나같이 급식실 짬밥을 조금이라도 맛 보아 대량급식의 위생과 재료선택에 관해 아는 사람이나 훈수를 둘 수 있는 것이지 이를 알 턱이 없는 일반인들은 공장직원들용 한식뷔페는 그렇고 그런 짬밥이라 평가절하해 버리기 십상이다. 여타 다른 한식뷔페보다 훨씬 낫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영업부 박대리도 경상도에서 횟집을 한 적이 있는 김 과장도 식사를 꽤 맛있게 하는 걸 보면 내 평가가 영 근거 없지는 않다. 어찌 됐든 모두가 괜찮다고 여기는 이 식사를 한 사람만 제외하고 참 맛있게 먹는다. 그래서 그런지 식당도 그 한 사람이 가끔 오는 날이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사장님이 점심을 같이 먹는 날은 유독 그 맛있는 식당에 그렇게도 먹을 반찬이 없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한 두 번 우연이 겹치는 거겠다 했지만 어김없이 오늘도 오비이락. 영업부 김과장님의 빈자리에 사장님이 타시길래 설마 했지만 식당에 들어서서 반찬을 보는 순간, 역시나였다. 반전은 없었다. 유자청에 버무린 우엉샐러드는 맛이 없고, 잘 튀겨낸 냉동 김말이를 맛있다 했던 자칭 미식가 사장님의 식판엔 국도 없고 김치도 없고 당면만 있는 잡채와 무말랭이 몇 개뿐이었다.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나의 식판은 들깨 푼 배춧국도 있고 요즘 비싼 파프리카가 채 썰어진 잡채도 있고, 잘게 썰어진 진미채 볶음과 제육볶음도 있었다. 물론, 매일 이보다 더욱 맛깔스러운 반찬이 즐비하지만 사장님이 오신 날 치고 이 정도면 선방한 메뉴였다. 먹을 복이 있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도 있다던 어른들의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닌 것 같다.
텅텅 빈 식판의 식사시간은 대략 5분. 그래도 가득 찬 내 식판의 음식들을 쑤셔 넣으려면 적어도 10분은 필요한데 서둘렀다. 보통 사장님이랑 같이 식사를 하면 사장님이 수저를 놓는 순간 모두들 대략 먹던 것들 거의 다 국에 말아 식사를 마무리하는 편이라 내가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해도 그 정도 사회생활은 따라가는 편이기에 오늘 여유 있는 식사는 종 쳤음을 애초에 마음먹었었다. 그래도 먹성 좋은 내게 10분의 식사는 너무 가혹했다. 국을 떠서 몇 수저 뜨니 앞자리에서 벌써 수저를 놓았다. 내 식판에는 진미채도 조금, 부침개도 한 장, 단감 두 조각도 남았는데 말이다. 포기하면 마음이 가벼워져 남은 음식들과 사회생활을 맞바꾸니 아직 차지 않은 배 덕에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벼워졌다. 덕분에 든든한 한 끼로 핫팩 없이 지내보려 했던 3월 출근 첫날의 추위는 가시지를 않았다.
' 아, 춥다'
배가 부르지 않으니 얼었던 손도 제대로 온기를 찾지 못하는 것 같아 주머니에 손을 욱여넣고 다시 차에 탔다.
"저! 지갑 찾았어요."
박대리가 신이 나서 자랑을 했다.
"응? 정말?"
얼마 전, 사장님 집 앞 술집으로 회동했던 영업부 박대리가 명품 지갑을 잃어버렸었다. 모두들 안타까워했고, 애꿎은 대리기사를 의심했지만 술이 원수라고 자책하며 마무리 짓고는 지갑에 있던 신용카드와 신분증 분실신고를 한 후였다. 그리고 한 2주 정도 지난 것 같았다.
"누가 경찰서에 그대로 갖다 놓았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이 시대에 그런 선량한 시민이 아직 남아있어? 괜히 대리기사님만 의심했네."
"그러게요. 아직 살 만한 세상이네요. 하하하하하"
라디오 드라마 성우 뺨치는 박대리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모두가 같이 웃었다.
반전은 있었다. 바라던 곳이 아니어서 실망했지만 예상치 못했던 곳의 반전은 허기진 뱃속까지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이제 곧 봄이다.'
햇볕이 따뜻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