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기다림 끝에 반가운 손님이 왔다. 비록 불청객과 함께 했지만 반갑다. 켜켜이 쌓아진 겨울의 흙먼지를 털어 버리려는 땅의 손놀림이 바빠 보인다. 점심을 마치고 나와 직원들끼리 소소한 행복을 편의점에서 산 오로나민 씨와 함께 나누고 있을 때, 점박이 주황색 나비가 날아와 입사동기 박대리 주의를 맴돌았다. 나비가 유산균음료를 마시고 있는 이 순수한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보통 손으로 쫓아 보내면 날아갈 법도 한데 떠나려 하질 않아 박대리는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손사래를 치며 도망쳤다. 편의점 앞의 벤치에 앉아 있는데 뜨끈해진 의자의 온기에 취해 따사로운 햇볕에 취해 시간이 멈추었으면 했다. 덕분에 고양이 엄마 박 차장과 자재실 주임들은 담배를 연거푸 세 대나 피웠다. 담배 냄새도 모락모락 데워진 공기에 제자리걸음을 하는 거 보니 겨울은 어느새 저만치 떠나 발자국 하고 있나 보다.
나비가 점찍은 내 입사동기 예쁜 아가씨 이야기를 잠깐 해봐야겠다. 나이는 서른넷. 스물 넷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만치 앳돼 보이고,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으며, 짧은 보브컷 스타일에 동그란 눈과 은테 안경, 170CM 가까운 큰 키로 건강한 신체를 갖고 있다. 화장도 잘하지 않지만 그렇기에 하얀 피부가 더 돋보인다. 그러한 피부의 유지 비결은 음주가무를 즐기지 않음에 있고, 편의점에서 음료 고르는 취향을 볼 때 초식동물에 가깝다. 유산균음료, 복숭아 맛 음료, 쌍화차, 실론티 등 웬만해서 누가 저런 걸 사 먹나 할 것 같은 것만 콕 집어 고르는 독특한 취향의 그녀는 비타민 음료조차도 잘 마시지 않는다. 같이 일해보니 말이 앞서는 경우도 없고, 서두르는 경우도 없이 절대 침착한 평정심을 유지한다. 성격 상 자기 몸을 해하는 어떠한 행동이나 습관도 싫어하는 것 같고, 누가 보아도 FM. 다섯 달 동안 보아 온 그녀의 패션은 자기만의 멋을 추구하지만 절제되어 있고, 가끔은 할머니 스타일의 카디건과 스커트를 큰 키로 스타일리시하게 소화해 낸다. 할리우드 배우들이 내한할 때, 공항에 가 볼 정도로 영화를 좋아하고 책도 음악도 좋아해서 가끔 기사님과 하는 대화에 내가 전혀 끼어들 구석이 없기도 하다.
그녀는 8년 동안 주류회사 계열사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녀의 나이를 가끔 잊어 그렇게 경력이 있는 서른 중반을 바라보는 어른인 줄 몰랐다. 8년이라는 경력에 놀랐는데 근무처가 주류회사 계열사라 더 놀랐었다. 술을 좋아하지 않아도 주류회사에서 일은 할 수 있는데 나는 정말 고리타분한 편견을 참 많이도 갖고 있음에 반성을 했다. 여하튼 우리나라 주류회사가 몇이나 있을까. 당연 대기업이고 대기업 계열사라 근무조건이 좋았을법한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역시 문제없는 곳은 없었다. 결정적 이유는 신입사원으로 입사해서 생산부 행정직을 맡아 5년을 정신없이 일했는데 진급을 할 수 없는 구조. 그녀가 주임이었을 때, 부장 다음으로 연차가 있었는데 불구하고 팀장이나 차장 같은 중간 직급의 퇴사자가 많아 회사 측에서 경력직을 채용하다 보니 8년 차까지 되어도 막내 딱지를 뗄 수 없었다 했다. 그래서 사직서를 제출했을 때도 회사 측에서 본사 채용을 제안하며 사직서를 반려했지만 본사에는 더욱 넘어야 할 태산과 같은 별나고 별난 사람들이 많아 결국 퇴사하기로 결정했다고...
나는 그녀가 전직 유명 아이돌 그룹 카페 주인장이라고 했을 때부터 곱상한 외모와 달리 범상치 않을 거라 예견했었다. 법학과를 나와 방송사 피디가 되려고 했던 또는 개그우먼을 하라고 강력히 추천받았던 내 기억을 더듬어보면 약간의 통하는 뭔가를 느꼈다고 해야 하나.
그녀의 숨겨진 능력을 나를 뽑아 준 동갑내기 사장도 알아본 모양이다. 요새 점심 식사 후에 그녀와 같이 걷는다.
“저기 좀 봐봐. 초록초록하지?”
“그러게요. 아직 바람이 조금 차지만 겨울바람이 아니에요.”
“벌써 다섯 달이나 지났네.”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전에 회사에서는 8년을 일하면서도 입사동기가 없었는데 왜 입사동기가 있어야 하는지 알았어요. 일어나기 힘들어 회사에 가기 싫어도 주임님하고 인사해야지 하면서 회사에 나와요.”
“나도 그래. 이 암담한 다섯 달을 그 먼지 많고 아무것도 모르는 물건들 틈에 있으면서 어찌 일을 할 수 있을까 매일 곱씹으면서도 나와 같은 처지에 있어 앞이 보이지 않는 비슷한 시간을 지낼 것 같은 입사동기가 있어 의지가 되더라고.”
“맞아요. 그렇게 의지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입사동기가 있어야 하나 봐요.”
“난 대표님이 면접 보는데 안 될 줄 알았어. 이 아줌마가 경력이 없잖아. 미국에서 10년 한국에서 10년 육아. 경력이 뭐가 볼 게 있겠어. 떨어진 줄 알았어.”
“저도요. 저도 안 될 줄 알았어요. 그래도 이 회사는 사람들이 다 무난하고 좋아서 다닐만해요.”
화장품 향기도 안 나는 그녀를 나비가 좋아했다. 나이 많은 나를 입사동기라고 의지하며 살뜰하게 챙겨주고, 따뜻하게 그리고 깍듯하게 대해주는 그녀는 참으로 좋은 사람이다. 사람 복 많은 내게 그녀는 또 한 명의 보배로운 자산이 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