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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맛 꼬깔콘

by MAMA

이게 바로 나야. 나는 3년 연속 반장이야 얘들의 추천을 받아 공약 준비도 없이 바로 즉흥연설로 당선!

나도 반장 해 봤어. 2학년 하고 5학년때. 3, 4학년 때는 코로나 때라 선거를 못했지만...

언니는 전교 부회장 선거 나갔다가 떨어졌잖아. 내가 전교회장 당선증을 가져다주겠어.

나는 기말고사 반 1등 했어. 아마 전교에서도 1등 했을걸.

그건 모르잖아. 나도 전 과목 매우 잘함 받았거든.

나는 콩쿠르 대회도 나갔었어. 바이올린 6개월 밖에 안 배웠는데. 상도 받았어.

나는 굿네이버스 편지 쓰기 상 받았어. 언니 못 받은 거.

나는 5학년 때 미술대회에서 대상도 받았어.

그건 나도 받았어. 그 나이에 받은 거면 언니보다 훨씬 어린 내가 더 잘 한 거지.

나는 경기도 공모전에 나가서 코로나송 작곡작사해서 상도 받고 상금도 받았어.

그건 나도 도와줬잖아.

나는 수영대회도 나갔었어. 교육장상 받아서 학교 방송에 나가서 교장선생님한테 상 받았잖아.

나는 인라인대회에서 3등 했거든.

나도 그건 했어. 인라인 연습 나갈 때마다 옷이 꽉 끼고 터지는 줄 알았잖아. 맨날 연습 때 꼴찌 해서 트랙 두 바퀴 더 돌고 죽는 줄 알았네.


이 즈음에서 끝냈어야 했다.


나는 발도 부러져서 깁스도 했었어. 통! 기브스. 얼마나 가려웠는 줄 알아?

내가 그때 언니 심부름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나도 손가락 부러졌었어.

나는 경도비만이었어. 밥을 2주 동안 한 끼밖에 안 먹었는데 하필이면 검사날 몸무게를 안재고 그다음 주에 쟨다고 해서 얼마나 울었는 줄 알아? 너 그런 거 해봤어?

나도 50킬로그램 지금 찍었거든. 5학년 밖에 안 되었는데.

나는 60킬로그램 찍었었어. 넌 나한테 안돼. 나는 학폭도 당해봤어.

나는.......

나는 유치원 때부터 술래만 했어. 얘들이 나 괴롭혀서 계속 술래만 시키고.

나는.....

나는 선생님도 두 번이나 도망갔었어. 내가 친구 복도 선생님 복도 없어서 문제아들만 있는 반에 걸리니까 선생님이 두 번씩이나 도망갔어.

나는.....

나는 수학여행도 못 갔어. 하필이면 교장선생님이 퇴직한다고 6학년들 사고 칠까 봐 수학여행도 안 보내주고.

나는......

나는 축구부 그 녀석 때문에 학교 생활 내내 얼마나 괴로웠는 줄 알아? 사탄인 줄 알았어. 반 분위기 다 망쳐놓고...

나는......


큰 녀석이 울어 버리려고 한다.

장난으로 시작한 아이들끼리의 말싸움이 너 잘났나 나 잘났나가 되더니 이보다 더 최악은 없다는 경쟁으로 치달았다. 요새 큰 녀석의 사춘기에 내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날이 많아 크면 얼른 내보내야지 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내 자식이지만 못돼졌다 하면서 꾹 참고 살았다. 그런데 잊고 살았다. 그 녀석이 정말 착해서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생활 내내 마음의 상처가 깊어 이사를 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눈시울이 붉어진 큰 딸이 지금껏 자신에게 있었던 많은 일들을 장난 삼아 이야기했지만 이내 내 마음은 찌릿해진 슬픈 감정으로 아리고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숱한 경험들 속에 좋은 기억도 있지만 원래 사람은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을 더 오래 간직하고 산다. 시간이 한참이 지나 잊히는 파편들도 있지만 대게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뇌리에 그리고 가슴에 감정의 상처로 깊이 박힌 것들은 빼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비슷한 경험으로 다가오는 그림자에 묻혀 불현듯 또 생각나 자존감이든 자존심이든 뭉그러진 자욱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이제 고작 열다섯인데 인기 많은 막둥이 녀석의 무난했던 학창 시절에 비해 큰 녀석의 학창 시절은 상처투성이다.


나 때문인 것 같았다. 내가 못난 엄마라서? 내가 많이 혼내고 키워서? 없는 살림에 잘 못 해 입혀서?

무거운 이유들로 나에게 또 반성의 기회를 주며 채근질하고 있는 순간,


"나 그만할래."


딸은 울면서 방에 들어갔다.


이사를 와서 잊혀질 거라 생각했던 지난 시간들에 대한 마무리하지 못한 숙제들로 질책을 받는 느낌이었다. 딸은 새로운 곳에 와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밝고 건강했다. 항상 큰 딸의 일상이 궁금한 내게 지난 1년은 처음으로 안심을 준 시간이었다. 괜찮다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자기 상처를 끄집어 내면서 웃으며 얘기하다 울음이 왈칵 쏟아진 녀석은 괜찮을 리가 없었다.


'맞아. 딸기맛 꼬깔콘.'


딸기맛 꼬깔콘이 먹고 싶다고 했다. 아까 하교 때 집으로 가면서 전화가 왔었다. 딸기 맛 꼬깔콘이 2300원이나 해서 못 사 먹었다고 했다. 그까짓 것 2300원이든 1300원이든 벌써 아끼려 하는 아이의 갈팡질팡하는 마음이 무슨 경제적 관념이라고 그게 무슨 합리적인 소비생활이니 운운하며 떠들었던 나 자신이 초라했다. 마음껏 사 먹으라고 용돈을 줘도 없이 산 지가 오래다 보니 제 먹고 싶은 것보다 싼 걸 찾는 게 마음이 아팠다.


"엄마가 딸기 맛 꼬깔콘 사줄게. 어서 바람 쐬러 나가자."


침대에 얼굴을 파묻은 딸을 꼭 안아주었다. 언제나 내게 이해와 사랑 밖에는 바라는 게 없는 아이. 자식은 다 그렇다. 부모에게 이해와 사랑만 바란다. 그에 비해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건 너무 많다. 미안했다. 어제도 그제도 다 미안했다. 그런데 억지로 쫓아 나온 딸의 손에는 또 딸기 맛 꼬깔콘이 없다. 이런 젠장.


"딸기 맛 꼬깔콘은? "

" 아니야. 나 그거 이제 안 먹고 싶어. 이거면 돼."


콘초코와 롯데샌드. 딸의 손에는 제 먹고 싶은 딸기 맛 꼬깔콘이 아니라 적당한 타협을 본 콘초코와 롯데샌드가 있었다. 울컥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이 녀석은 나라는 사람을 참으로 엄마로서 초라하게 만든다. 엄마인 내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내 인격을 초라하게 만든다. 나는 내 딸에 비해 한참 모자란 사람이다. 내가 부모로서 자식의 인격의 타고남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다. 나의 걸음은 매 순간이 넘어짐이었다. 육아의 모든 순간에 나는 넘어졌다. 단, 한 순간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늘 반성했고 늘 부족한 나를 나 자신이 질책하면서 그 자체를 교만하게도 좋은 엄마의 길이라 위로했다. 요즘은 아이들에게 넉넉한 공간을 제공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감의 시간이 적어짐에 당연한 기회비용으로 여기라 우쭐해져 말하곤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었다.

결핍된 나의 어떠한 부분들은 채워지지를 않는다. 그런데 그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우는 건 이렇게 멋있게 자기 자신의 슬픔을 다스리는 법을 알아가고 있는 아이들이다. 나의 열심이 나의 열심인 줄만 알았다. 아니었다. 그 어린아이들도 자기만의 시간 속에서 치열하게 생각하고 부딪히고 넘어지고 일어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더 성숙된 인간으로 마주한 내 자녀의 모습 속에서 조금 더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엄마! 그네 탈까?"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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