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팥 추수를 끝으로 밭은 동면에 들어갔다. 겨우내 눈과 찬바람을 맞으며 얼기도 하고 따스한 햇볕에 녹기도 하면서 밭은 봄을 준비하고 있다. 새 찬 공기가 스며 꽁꽁 얼기도 하지만 눈 덮인 땅은 새싹이 자라기에 따뜻한 내음을 품기에 올해 117년 만의 폭설은 풍년의 예고인가 싶기도 했다. 작년에 신청했던 정부 지원 비료가 400포대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기도 했고, 간이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정성스레 심어 놓은 마늘이 얼마나 자랐나 보기도 할 겸 오랜만에 밭으로 향했다. 일이 고되긴 해도 밭을 향해 가는 발걸음은 늘 설렌다. 정성 없이도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를 생각하면 설레설레 손사래가 쳐지지만, 내 새끼 같은 종자들이 땅을 뚫고 초록초록 커가다가 열매를 맺는 과정을 생각하면 그렇게 보고 싶고 궁금해서 발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지금 밭에 가면 발이 푹푹 빠져 장화 신어도 될 게 아니라고 말리는 친정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간 제발 자랐기를 바라는 마늘을 보고 싶어 갈 수밖에 없었다. 밭에 가는 도중에 시댁에 들러 어머님도 모시고 갔다.
날씨가 따스했던 땐, 어머님께서 외손주와 같이 밭에 가끔 가셔서 답답하실 때 땀 흘리며 근심과 시름을 잊곤 하셨는데 그렇게 든든한 외손주가 작년 여름 군대를 가고 나서부터는 혼자서는 발걸음을 안 하셨다. 어머님의 발걸음이 끊긴 이후로, 밭 일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 되었다. 어머님께서 심어 놓으셨던 팥도 산마늘도 두릅도 그리고 얻어다 심어 놓은 뒹굴뒹굴 호박이며 콩도 낯선 주인의 손길을 타야만 했다. 뭐 모르고 덤벼 잡초만 벨 줄 알았던 우리는 땀과 흙이 범벅이 되도록 밭을 돌보았고 그 틈틈이 매실도 따서 매실청도 만들고, 두릅 순도 꽤나 많이 따다 먹고, 두릅 잎사귀로 장아찌도 담고 바쁜 농사꾼 흉내를 조금 낼 줄 알게 되었다.
산기슭에 자리 잡은 밭은 아직 눈이 남아 있었다. 얼음이 녹지 않은 군데군데 눈부신 햇볕에 하늘이 반사되어 반짝거렸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꿩이 날아갔다. 바람에 부대끼며 춤추는 나뭇잎의 군무에서 들리는 솨솨한 교향곡은 아직도 멀었지만 나무마다 제법 움이 트고 있었다. 농막 지붕에 매달렸던 고드름이 녹으며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청량했고, 얼었던 땅이 녹아 질퍽거렸지만 그 땅엔 이미 봄이 찾아온 듯 연둣빛을 머금고 있었다. 다시 시작될 밭 일이 이제는 겁이 나질 않고 기다려진다. 우리가 쓸데없이 정성스레 깊이 심어 절대 언 땅을 뚫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마늘이 혹시 반전을 일으켰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비닐하우스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 접을 심어 육쪽마늘의 기적으로 여섯 배의 수확을 기대했던 순진한 마음이 폭설을 맞으며 처참히 무너졌지만 그래도 실오라기 한 가닥 같은 희망을 가져 보았다. 두근두근.
싹이다. 싹을 보았다. 비닐하우스 위로 아직 녹지 않은 얼음이 덮여 있어 그 무거운 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얼마 안 남은 봄에 다시 오기로 했지만 기대 이상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산자락 안쪽에 자리 잡은 밭은 마을 어귀의 좁다란 언덕길을 올라가다 야트막한 산자락을 넘어 내리막 길을 내려가야 하는데, 오르막을 넘자 내리막엔 아직 눈이 녹지 않았었다. 어머님께서 가지 말자고 차가 올라오지 못할 거라고 말리셨는데 그때 어머님 말씀을 들었어야 했다. 내리막 길이 문제가 아니라 밭을 보고 나서는 차가 오르막 길을 올라오지 못했다. 결국, 보험회사에 전화해서 견인차가 와서 끌어주어 겨우 눈에 처박혀 헛바퀴만 돌고 있던 차를 꺼낼 수 있었다. 잠깐 밭의 마늘만 보고 온다는 것이 큰 일을 만들었다. 잠깐의 강도 높은 삽질에 마음이 고생스러워서 그랬는지 몸이 쉬이 피로해졌다. 뭐라도 먹어야 기운이 날 터 저녁을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가 어머님께서 아버님과 자주 가셨던 송어횟집을 가기로 했다.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미국에서 10년을 살다가 나오니 시부모님 뿐 아니라 시댁식구들과는 대면대면한 사이였다. 시댁은 바쁜 사업으로 인해 생일이며 명절도 잘 챙기지 않고 크리스천이라 제사도 챙기지 않았기에 시부모님과 1년에 네다섯 번이면 많이 본 거였다. 대화도 그렇게 많이 나누어보질 못하고 서먹서먹했는데 아버님께서 재작년에 돌아가시고 나서는 그래도 자주 찾아뵌 듯하였고 서먹함은 조금 줄어든 것 같았다. 주황빛 바알간 송어 회를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야기의 주된 주제는 역시 '농사'. 3월에 무얼 심는가 하는 고민부터 어떻게 1년을 꾸려갈까, 종자며 비료에 드는 비용은 어찌 충당하냐, 각종 장비와 기계를 사게 된 계기까지 우리의 대화는 오로지 농사. 농부가 따로 없었다. 그러던 중 어머님께서 처음 땅을 사시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뭐든 등기내기까지가 그렇게 고되더라고. 우씨 아저씨가 땅이 나왔다고 귀띔을 해주면 또 어찌 되었든 빚으로 사고 등기를 내고 또 죽어라 일해서 갚고. 그 과정을 대여섯 번은 반복해서 그 땅이 된 거야. 왜 필지가 다 다르잖아."
"맞아요. 어머님! 등기내기까지 얼마나 마음이 졸이던지. 그래도 등기 나니까 숨이 좀 쉬어지고 웃음도 나더라고요."
내 집 마련으로 마음을 얼마나 썼는지 이심전심, 동병상련의 전우가 어머님이었다고 맞장구를 쳐드렸더니 좋아하시면서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처음에 논을 샀는데 그 논 있잖아. 너네 미국 차 사준다고 팔은 논. 그 논이 처음 산 땅이거든. 그 논에서 첫 해 열 가마니 쌀이 나왔어. 그리고 그 곁 밭에 고추를 심었거든. 고개를 숙여서 밭두렁 사이를 보는데 빠알간 고추들이 춤을 추더라고. 넘실넘실. 이렇게 흔들흔들"
어머님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몇 십 년 전에 그 춤을 추는 고추를 본 듯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 빛에 따뜻한 온기가 가득했다. 어머님의 살아온 날을 책으로 쓰면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에 관하여'에 버금가는 천 페이지 이상의 양장본은 될 듯했다. 지독하게 없는 집으로 시집와서 온갖 설움 받으며 남의 집 식모살이부터 기사식당을 십수 년을 하기까지 큰 딸의 병치레에 둘째 딸의 이혼에 외손녀 외손자까지 키워가면서 홀로 집을 일구어냈다. 지금도 현역으로 작은 모텔 숙박업을 하시면서 집안일까지 다 손수 하신다. 틈만 나면 주먹질로 사고 쳤던 아버님을 늘 사랑하셨고 아이들도 부족함 없이 키우셨다. 그 무거운 수고와 짐이 덜어질 만도 하지만 여전히 어머님의 어깨는 무겁다. 시집도 가지 못하고 지금까지 어머님의 아픈 손가락인 예순에 가까운 큰 딸은 얼마 전, 뇌경색이 와서 한 달간 병원 신세를 져 그 병시중을 팔순 노모가 다 했다. 그래도 살려야 한다면서 갖은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고, 입원 중에 심장에 구멍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시술도 해주었다. 뇌의 병증으로 인해 평생의 짐이지만 미안함으로 최선을 다하시면서 몇 해전까지는 삶의 기운이 다하신 아버님을 마지막 가는 길에 요양원은 안 보내시겠다면서 집에서 돌봐주셨다. 어디 그뿐이랴. 작은 딸은 4년에 걸쳐 이혼 소송을 했는데 소송비용이며 패소하여 재산을 일부 내주기까지 속을 썩었고, 태어날 때부터 키워 준 두 아이들은 꼭 맡아야 한다면서 끝가지 싸우셨다. 두 아이 중 큰 아이는 작년 8월 입대해서 몇 달간 모은 군인 월급을 어머님께 드렸다. 물론, 그걸로 어머님의 헌신에 보상을 해드릴 수는 없지만 아주 작은 미소를 머금은 순간 정도는 선물해 드릴 수 있지 않을까. 늦둥이 막내아들인 내 남편은 고스란히 어머님의 그 치열한 삶을 짓눌린 마음의 무게로 갖고 있다. 이제 팔순에 가까운 어머님께서 조금 편하게 사셨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해드릴 수 있는 사람은 남편이 유일무이하기 때문에 묵직한 추를 나 또한 같이 지고 사는 것 같다.
젊은 날, 손이 다 무르도록 남의 집 걸레질부터 아파트 계단청소로 일구어 낸, 작은 논 마지기. 그 사이 심어 놓은 고추가 햇볕에 빨간빛이 되어 바람에 한들한들 춤을 추는 걸 발그레한 얼굴과 환한 미소로 보고 있는 나와 비슷한 나이였을 어머님의 얼굴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우리가 다시 그 미소를 머금게 해 드릴 수 있는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