技術: 사물을 잘 다룰 수 있는 방법이나 능력
김밥을 쌌다. 한 겨울에 웬 김밥? 누가 이 겨울에 소풍을 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났다. 막둥이가 김밥을 먹고 싶다고 해서다. 7시 반에 출근하러 나서려면 그 전에 싸 놓아야 해서 일찍 일어나기도 했지만 나이탓인지 긴장하는 탓인지 주중에는 핸드폰 알람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저절로 눈이 떠진다. 일단, 밥통에서 엊저녁 했던 밥을 덜어 놓고 흰 밥으로 새 밥을 지었다. 시금치를 데치고, 햄도 데쳤다. 아이들에게 나름대로 건강하게 가공육을 먹이는 방법으로 3-4분정도 데치면서 발색제, 방부제, 염분, 기타 첨가물등으로부터 조금 도망치는 방법인데 햄이 탱글탱글해지기도 하지만 감칠맛이나 염도가 낮아져 맛이 심심해지는터라 아이들이 싫어한다. 그래도 나름 고수하고있는 요리철학이다. 다음, 냉장고 채소통에서 굴러다니던 하나 남은 당근을 채 썰어서 살짝 볶고 계란도 부치고 맛살도 두툼하게 반을 갈라 찢어 놓았다. 원래 우엉은 김밥용으로 나온 것을 잘 사지 않는다. 웬만하면 가공된 우엉 대신 기다란 우엉을 몇 뿌리 사서 채썰어서 볶고 졸이는데 게을러지기도 했지만 이사 온 동네 마트에서 우엉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궁여지책으로 마련했다. 여하튼 김밥용으로 용이하게 썰어진 우엉과 단무지, 마지막으로 어제 먹고 남았던 불고기까지 준비되었다.
내가 이전까지 싸왔던 김밥은 입이 찢어지도록 벌려야 겨우 반 정도 들어갈 수 있도록 큼지막한 것이었다. 재료도 풍성하게 넣어 보기에도 먹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재료가 단출해도 여러개씩 넣다보면 금세 두툼해지고 화려해졌다. 그러나 먹기에 영 불편해서 아이들은 김밥을 한 입에 넣지 못하고 가위로 잘라 먹었다. 김밥을 싸는 습관은 웬만해서 바뀌지 않았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손은 왜 이리도 큰 지 먹는 거라도 푸짐하게 먹어야 한다면서 반찬이며 고기며 뭐든 할 때 모자라지 않게 하는 것이 내 고집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 수록 소화가 잘 되지 않고 뷔페보다는 단품으로 외식을 하는 것이 차라리 속이 편한터라 이 고집스러운 생각도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김밥을 말 때, 조금 밥을 줄여 보았고, 또 조금 재료를 줄여 보았다.
햄, 맛살, 계란, 당근, 단무지, 시금치, 우엉, 불고기. 형형색색의 재료를 줄지어 반주걱 정도의 잘 펴진 밥위에 가지런히 놓고 말기 시작하니 내 작은 손에도 한 줌 들어오는 날씬한 김밥이 되었다. 썰어보니 작고 동글동글 한 것이 아이들이 한 입에 넣기 딱 좋아 보였다. 내 뚱뚱한 허세 가득찬 김밥은 온데간데 없고 속이 알찬 옹골지고 야무진 녀석들로 도시락에 가득찼다. 도시락을 보고 있자니 남편의 말이 생각이 났다.
얼마 전, 저녁에 남편과 산책을 나갔다. 올 겨울 눈 구경을 실컷 한다며 눈 쌓인 길을 저벅저벅 손을 잡고 걸었다. 남편은 나와의 산책을 좋아한다. 이 시간이 우리 둘에게 온전히 우리 둘뿐인 시간이기때문이다. 매일 얼굴 보며 무슨 얘기를 또 할까 싶기도 하지만 우리 부부사이에는 할 얘기가 그렇게 많다. 이직한 새 직장의 사장님의 비하인드 스토리, 영어 울렁증 우리 딸래미들의 영어학원 적응기, 돌아가신 아버님에 관하여, 그리고 3월에 지을 밭농사 때 심을 나무며 종자에 관해서까지 두서없이 시작하다보면 온갖 주제를 떠들게 된다. 한 시간 5킬로미터 정도의 산책 코스는 남편의 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을 사면서 잠깐 쉬는 시간을 제외하면 계속 연중무휴로 수다스럽다. 수다가 웃고 떠들고 즐거움으로 가득찬 것만은 아니다. 푸념도 있고, 원망도 있고, 짜증도 있어 유치찬란하기 그지 없지만 어떤 날은 꽤나 어른스럽게 마무리 되곤한다.
"진이(막둥이를 애칭하는 이름)는 영어가 많이 모자라는데 그래도 제 언니한테 자극 받아서 어떻게든 따라 해보려고 하네."
"그러게. 어떻게 적기에 둘 다 영어학원을 다니게 되어서 다행이다."
"이렇게 영어학원 안보내고 싶어서 미국까지 갔는데 또 이런 현실이네."
"뭐든 억지로 안되네. 제작년에 비자가 나왔다면 그 때 갔겠지. 이 집으로 이사 오지 않고...."
"아마 그랬겠지?"
"비자가 안나왔고 이 집을 사게 되어 이렇게 엉뚱한 동네에서 1년을 살게 되다니... 뭐든 어거지로 되는 건 문제가 생기더라. 비자가 그 때 안나온건 다행이었어. 갈 때가 올거야. 우리가 꼭 같이 가지 않더라도 아이들이 가진 시민권 제 스스로 찾아 쓸 수 있을 능력이 갖추어지면 가면 되지. 우린 그 준비만 해주면 돼. 이젠 이렇다할 모든 일에 대해 자연스럽게 인정하게 돼. 힘이 빠지는 거지. 인생에 제일 큰 교훈은 힘을 빼는 기술을 배우는 거야."
남편의 먹먹한 말이었다. 제 작년, 큰 아이가 6학년이 될 때 미국으로 들어가려고 준비를 했었다. 유학시절 두 아이들을 낳아 10년을 길렀지만 아이들의 시민권은 그저 아이들의 것이었다. 우리의 유학생 신분은 취업비자를 거쳐 영주권까지 고된 고생길을 가야했다. 남편의 선택은 한국행이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고 아이들을 공부시키려고 미국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하자면 우리 부부의 비자상태가 문제였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던 이력이 있기는 하지만 다시 학생신분으로 비자를 받으려고 하니 문제가 되었다. 미국에 체류했던 기간이 길고, 다시 학생으로 입국하는 것은 한국의 기반이 약해 보이는 까닭으로 보였기에 비자 발급 때 거절당했다. 다시 도전해보려고 변호사를 사려고 했지만 어려운 케이스였다. 재도전했는데 또 다시 거절된다면 거절 이력이 남아 나중에 아예 발급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워낙 미국 비자는 인터뷰를 보는 영사의 재량이 크고 주관적이기때문이다. 불법체류의 기간이 단, 1일도 없고 운전 중에도 위반 한 번 없었던 모범적인 유학생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워낙 체류했던 기간이 길어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했다. 비자가 나오면, 청약에 당첨되었던 집을 포기하고 가는 걸로 합의했었던터라 비자에 거는 기대가 컸었다. 그런데 거절되었고 진행중이던 상황은 모두 정지되었다.
당시,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들뜬 아이들은 학교를 다시 가야했고, 포기하려고 했던 집을 장만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여 집을 사기 위한 많은 과정을 감내해야 했다. 절망과 용기는 한 페이지에 있었다. 주저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마음을 다시 고쳐 먹고 기회를 다시 만들때까지 버텨보기로 했다. 비자는 거절 되었지만, 새 집에 가기 위해 입주 박람회를 갔고, 은행을 가서 대출을 알아보았고, 내 삶에 없을 것 같은 새 가구며 가전제품을 사러 다녔다. 온통 빚 잔치이기는 했어도 모든 과정이 순탄했다. 그래서 낯선 곳이기는 하지만 새 둥지를 틀었다.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 때가 지금이다. 마흔 중반 즘 되고보니, 모든 일들은 그렇게 될 만한 일들은 그렇게 되었다. 누가 막아도 그렇게 될 일은 그렇게 되었고, 될 수 없었던 일들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다 때가 있으되 그 때의 모든 일들은 필연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걸 나는 그리스도인이니 하나님의 뜻이라 하지만 여타 다른 사람들은 '순리'라고 한다. 그 순리를 따를 만하기까지 우리는 삶에서 힘을 빼야 된다는 걸 깨닫는숱한 고된 과정을 거친다. 힘이 빠져야 보일 게 보이고 버릴 걸 버리게 된다.
김밥에 힘 좀 주는 걸 빼니 먹기 편해진 것 처럼 삶에 내 힘과 안력을 빼니 흘러가는 많은 일들에 원망과 한탄보다는 여유로운 관망으로 지혜를 배우게 된다. 그리하여 지금 나는, 한 입에 쏙 들어가는 김밥을 먹으면서 아주 편안하게 씹음을 하고 있다. 아구에 힘이 빠지니 이토록 여유로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