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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죽림헌 Aug 24. 2024

#12, 잠 못 드는 밤

매일의 간절한 기도

잠 못 드는 밤이 너무 많았다.

나는 내가 무척 강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엄청 겁보다, 밤에도 집 밖을 나가지 못한다. 무서움도 많고 잘 놀란다. 

무섭고 음험한 영화도 보지 못한다. 음산한 분위기도 싫어한다


내가 업무를 열심히 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흔히 뒤탈 없이 하기 위해서다, 엉뚱하게 서류정리를 잘 못하여 감사에 걸리거나

허를 남겨 다른 이에게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


그래서 서류를 정리하고 또 정리하고 조사하고 또 조사하여 끝난 서류는

다른 이가 함부로 손대지 못하도록 편철 후에 펀칭하여 묶어버린다.

그리고 나의 표식을 하고 반드시 사본을 다른이 몰래 별도 준비해 둔다.

지나치게 조심성도 많아 잘 알지 못하고 친분이 없는 사람들과는 왕래나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오기와 자존심을 세우고 두려워도 두려움을 내색할 수도 없었다.

사람이 변한 것이었다. 무서움도 감추었고 두려움도 감추었다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시댁에서 어쩌다 물어볼 때 자초지종 경과를 이야기하려고 하면

바로 말을 끊고 다른 대화를 하거나 무엇인가 바쁜 일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고작 불쌍하다는 묘한 표정들, 더하여 시어머니의 끌끌 혀를 차는 모습,

돌아가신 지가 오래오래 되었건 만 어쩌다 꿈에 와서도 못된 표정과 말을 하였다.

시어머니의 그런 모습이 나오면 바로 큰 동서를 필두로 태세전환하여 다른 화제로 돌리는 것이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기가 막힌 행동을 한다.


다행히 진정 걱정해 주시는 분, 짧게나마 진정 걱정해 주시는 분은 둘째 고모님(시누이)이다

나의 예쁜 큰아이를 돌보아주시는 고마운 둘째 고모님, 둘째 고모는 남편에게도 잘해주었다고

하였다. 남편은 평생 그 고모를 고맙게 생각하고 잘하였다. 나 또한 지금까지 그런 마음이다.

처음 마음이 끝까지 가기를 바란다.


그런 연유로 그 이후로는 우리의 이야기, 아이의 이야기는 시댁에서 하지 않는다.

혀를 끌끌 차는 소리도 듣기 싫고 아이를 괴물 보듯이 보는 눈도 싫다.

도움을 한 번씩 받았다 채혈을 해주었다. 그들은 평생 그럴 것이다.

이 글을 읽어보신 분은 알 것이다. 결국은 처분해야 했던 것을, 수혈을 할 수 없었기에 버렸다

결국은 나의 어머니와 나 둘 뿐이었다. 

어머니의 땅을 팔아주신 돈은 벌써 동이 났다. 남편은 그 조차 묻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았다.


남편은 한 푼도 구해오지 않았다. 그렇게 부자라고 자랑하던 시댁에서 한 푼도 빌려오지 않았다.

시댁에 부탁을 한번 하라고 하면, 돌아오는 그의 말은 

'남부끄럽다.  어디 산골에 가서 살자' 한다.

더 이상은 남편에게 병원비의 내막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온전히 친정어머니의 땅판돈, 월급,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구해오신 돈이 전부였다.

결국은 결혼예물을 팔려고 마음먹었다.


패물이래야 다이아 2부짜리 반지 하나와 금목걸이였다.  유색보석도 없었다.

우리는 어머니는 우리에게 오메가금장시계에 다이아 3부 반지를 해주었다.

그래도 다이아몬드 반지니 돈이 조금 되겠다, 생각했다.

금방에 찾아가 결혼반지라고 팔려고 한다고 하였다. 보석, 특히 다이아몬드는 면밀히 감정한다.

눈에 확대경 끼고 살피더니  이것 어디서 샀느냐고 물었다.

큰 형님이 잘 아시는 금방에서 해주었다고 하였다. 역 앞에 있는 금방이라 하였다.


"그분에게 가서 팔아달라 하세요.  상품가치가 없고 큰 형님이라는 분 엄청 흥정해서 깎았나 봅니다."

결과적으로 안 사겠다고 하였다. 


집에 와서 우리 어머니에게 말씀드리니 사위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하시며,

"본 데없는 무식한 인간들" 딱 그 말만 하셨다.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어머니는 우리에게 오메가금장시계에 다이아 3부 반지, 시아버지브로바시계, 

시어머니 금목걸이, 시아버지 금반지를 해주었다. 두 분 돌아가시고 그 반지, 목걸이, 시계는 

누가 가지고 갔는지 참 알 수 없다. 그러니 어머니가 <본 데없는 것들, 무식한 것들>이라고 하였다

병원비에 보탬이 되지 못했다.

그 대학교수, 국립대 차관급 교수부인 때문에 우린 결혼예물로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때 마침 여직원들이 우리끼리 외부인 없이 계를 넣자고 하였다. 

계주는 나보고 하라고 하였다. 

직원들은 자기 순번에 곗돈을 받게 되면 나보고 이자돈을 놓아달라고 하였다.

그것이 병원비의 원천이 되었다.

정말 나는 내 머리를 수도 없이 분할하여 일을 처리했다. 

아이, 병원비, 업무, 계, 집안 대소사 참여 나의 머리는 그렇게 분할되어 처리하였다

그 곗돈은 병원비해결에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치료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쩜 지금 내가 기억이 없어지려고 하고 생각이 쉬 지치는 것이 그때 너무 진을 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직원들에게 감사한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한참 열심히 기도를 할 때는 그들의 가족과 그 하는 일의 평탄과 안녕을 기도했다.

계는 수차례 번복하였다. 그 말인즉은 아이의 병원생활과 치료에 긴 세월이 걸렸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중에도 전세를 옮긴다. 학비를 내어야 한다며 맡긴 돈을 달라고 하면 정말 어떤 말로도 

그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까. 정말 죽음이다. 아직은 아닌데,

그래도 혹시 하고 남편에게 또 말해본다 역시나다.

그런데 뜻밖에 다른 여직원이 돈을 놓아 달라고 부탁한다. 

그것이 기도의 응답인지 그렇게 하나씩 해결하며 시간은 흘러갔다.

그 여직원들 대학졸업, 유학, 집도 구입하고 하였다. 시간은 걸렸지만 해결되었다.

내 아이를 살린 일등공신들 은혜를 베푼 사람들은 직장동료였다.

잘난 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며 서로 긴 시간을 상호부조하였다.


처음 병원비를 해결하지 못하였을 때 나는 끝없이 기도했다.

나도 모르게 꿇어앉아 깍지 낀 손을 뼈가 어스러지도록 쥐며 몸은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공포였다, 다른 아무런 말도 표현되지 않는다

그냥 공포였다.

우리 어머니 새벽마다 기도하러 가셨다. 

두 모녀가 각자의 방법으로 신께 염원을 올린 것이다.

신은 들으셨는지요. 그때의 두모녀의 부르짖음을  들어셨는지요.

자식을 살리려는 간절한 외침을 뼈가 으스러지듯 듯 끓어앉아 올린 그 간절한 부르짖음을

신은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우리 인간은 믿는다. 신이 도우셨다. 고 생각한다.


아침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며 잠들었다.

매일 밤이면 아침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며 잠들었다.


그런 중 업무조사차 외근을 나갔다.

그곳에 사찰이 하나 있었다. 비구니사찰이었다

그곳에서 법당에 앉아계신 부처님을 보게 되었다.

지나가시던 여승의 머리가 파르스름하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예쁜 두상에 면도날로 깎은 머리는 파르스름하다

나를 보더니  '보살님, 들어가셔서 앉아서 만나 보시지요'하였다.

그 비구니사찰의 젊은 스님이셨다. 많아야 스물대여섯 정도로 보였다.

내가 머뭇거리자, '종교기 달라도 괜찮습니다.'

'그냥 들어가셔서 마음을 편히 하시고 쉬다 간다 생각하세요'. 하신다.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그때 누군가가 건드리면 참았던 설움과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부처님은 다 이해하십니다. 아무도 없으니 그냥 앉아계시면서 마음을 맡겨보세요

눈물이 나면 나오는 대로 두시고 소리가 나면 소리를 내셔도 됩니다.' 하였다.

내 나이보다 어리거나 비슷해 보였다. 신뢰가 가는 차분한 말투에 다정하기까지 하였다.


인사를 하고 법당으로 들어갔다.

방석 위에 앉아 손을 합장하고 가만히 있었다.

눈물이 끝없이 쏟아졌다. 종내는 흐느끼기까지 하였다.

울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소용없었다. 


나는 그날 오래오래 참고 버텼던 내 마음의 방벽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눈물은 이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내렸다. 아니 쏟아져 나왔다.

제방이 터진 듯 쏟아져 내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주위는 고요하고 산속이라 나무 위에서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맑게 들렸다.

그런 상태로 조금 있으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머리도 맑아졌다.


한편 부끄러웠다. 누가 들었을까 봐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눈물을 닦고 옷매무새를 고치고 방석은 제자리에 두고 합장하여 고개 숙인 후 

옆문으로 조용히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여름햇살이 눈이 부시다 못해 시리다.

스님이 밖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셔서 차나 한잔하시고 가시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차탁에 마주 앉으니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다과와 차를 내어 놓으셨다.

'올해 딴 햇차입니다. 맛이 순하고 향이 좋습니다 마음을 편하게 해 줍니다'하신다

차 우린 물이 연하고 맑으며 향이 그윽한 것이 햇 우전차 같았다.

우전차의 그윽한 향을 맡으며 차와 다식을 먹었다. 생각해 보니 점심도 굶었다.

마음이 온전히 비워진 것 같았다.


얼마 만에 가져보는 호사인지, 언제였던지도 기억도 안 난다.

내가 얼마나 팍팍하고 고통스럽게 지난 수년을 살았는지...

나의 본모습을 오래도록 잊고 있었다.


여기 문은 열려있으니 마음이 아프거나 쉬고 싶으시면 오셔서 조용히 앉아

번뇌를 내려놓고 저와 차나 한 잔 하시다 가세요, 하신다

그 이후 나는 그 스님과 친구처럼 지내었다.

그 스님은 자신의 옆을, 지나는 힘든 사람에게 한 자락 내어 주신 것이다.

스님은 대학을 졸업 후에 스님이 되셨다고 하였다.

그런 것을 뭐라 하는지는 모르지만 불자가 되었고,

그렇게 몇 번을 만나 대화하며  나의 이야기를 듣고는 위로해 주셨다.

'괜찮을 겁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얼마 후에 알았다. 그 스님은 공부하러 합천해인사로 가셨고 나와 아이를 위해

그곳에서 우리 두 모자의 이름으로 가사불사를 하셨다고 하였다.

가사는 스님들이 입는 법복으로 어깨를 반을 걸쳐 입으시는 것으로 예불드릴 때 입는 예불복이라 하였다.

가사는 아무나 걸치는 것이 아니고 의식을 행하여 받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절에 법당의 작은 범종에 아이의 이름을 올리셨다고 하였다.

예불을 올릴 때마다 범종은 울릴 것이고 부처님께로 염원이 전달될 것이라고 하였다.

아이러니다 우리 아이는 가톨릭이고 명동성당에서 윌리엄으로 세례를 받았다.

윌리엄은 영국식이고 독일식으로 빌헤름이다.


내가 이 내용들을 글로 쓰 두는 이유는 선을 가장한 악한자들에게 고통을 받기도 했지만

생면부지의 사람이, 또는 가깝지도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 선의의 행함과 도움을 받은 것이다

그 선함에 감사드린다, 선을 행하여 주심에 감사드린다.


때론 계산하는 친지보다 가까운 이웃이 소중한 것이다. 도움은 그분들에게서 왔다.

언젠가 이 글을 아이가 읽는다면 그런 분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같은 선을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조건 없이 베풀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웃 돕기를 잘하고 있고 해외자매결연과 봉사활동도 한 것을 안다.


도움을 받으려고 생각하지 말고 도움을 베풀어라 

때가 되면 내게 돌아온다.


나는 그때 그랬다.

밤만 되면 내일 아침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며 수많은 날을 보냈다.

#잠 못 드는 밤 #사랑 #베풀다 #도움의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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