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암, 치매, 섬망
저한테는 2달 넘게 입원 치료받고 있는 할머니 환자가 있습니다. 처음 응급실로 아들과 함께 왔을 때 배가 아프고 열도 나고 힘들었던 것이 대장에 구멍이 생겨서 그런 것이라는 것을 알려드렸습니다. 그 당시 보호자(아들)는 먹는 약으로 치료가 가능하고, 며칠 입원하시면 좋아지겠지라고 생각하셨던 거 같았습니다.
"할머니는 대장이 터졌어요.
근데, 이렇게 대장이 터지는 것은 그냥 터지지 않아요.
대장벽에 염증이 생기면서 터지거나 뭔가 대장을 꽉 막으면서 막힌 부분 주변으로 압력이 올라가면서 터지게 됩니다."
"할머니가 요 며칠 식사도 잘 못하시고 토하신다고 하셨죠.
대변도 잘 못 보시고.."
"여기 복부 CT를 보면 오른쪽 대장 주변으로 염증도 심하고 대장벽이 두꺼워져 있는 것이 보이시죠.
주변으로 까맣게 뽀글뽀글 점처럼 보이는 것이 공기(air)에요."
"공기는 대장이나 소장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공기가 대장 밖에 이렇게 보이죠.
장이 터졌다는 증거인데 이렇게 대장이 두꺼워져 있고 안쪽으로 이상하게 생긴 덩어리 같은 것이 있어요.
물론 수술해서 제거하고 조직검사를 봐야 정확하지만
대장암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CT 사진을 보며 큰 한숨 소리를 내었던 보호자(아들)는 다른 가족들과 상의 후 어렵사리 수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연세가 90이 넘으셔서 그냥 집으로 모실까 하다가 수술하기로 했어요.
이 연세에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어요.
대장암, 그 암도 터졌다고 하니깐 위험한 거 압니다.
수술하다가 돌아가시나, 집에 가서 돌아가시나 어차피 위험하니깐..
그래도 아프지는 않게 해 드려야죠."
긴 수술이었지만 다행히 잘 끝났고 할머니도 잘 버텨주셨습니다. 계획했던 수술은 할 수 있었지만 배안의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오히려 수술 내내 버티어주신 할머니가 더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암(Cancer)이라고 하는 것은 병기(stage)가 있습니다.
암이 몇 기다.
암이 초기다, 말기다.
재발이 되었다.
전이가 되었다.라는 말들은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암은 1기, 2기, 3기, 4기로 나누게 됩니다. 당연히 1기에서 4기로 갈수록 환자의 생존확률은 떨어집니다.
이때 "암이 4기"라고 하는 것은 쉽게 생각해서 처음에 생겼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으로 암이 전이되거나 수술했던 자리에 다시 재발하는 경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할머니는 눈에 보이는 대장암과 주변의 터진 병변들은 수술로 제거될 수 있었지만 수술할 때부터 이미 대장암이 천공되어 있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대장암의 씨앗들이 배 전체에 퍼진 것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암을 수술하는 외과의사 선생님들은 당연히 이 부분을 가장 주의해서 수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암 수술을 한 후에는 항암치료가 중요합니다. 모든 암환자들이 항암치료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초기 암이다. 말기 암이다.라고 부르는 것처럼 "초기 암"이라고 하면 항암치료를 안 하지만 3기, 4기처럼 "진행된 암"이면 항암치료를 하게 됩니다.
수술받은 이 할머니의 경우는 연세도 90세가 넘으셨고, 대장암이 천공된 상태라 보호자들과 상의 후 항암치료는 안 하기로 했습니다. 항암치료는 암의 종류에 따라서 치료기간이 다르지만 체력적으로 힘든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 이유로 보호자들은 할머니가 큰 수술 잘 버티고 회복하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셨던 거 같았습니다.
수술 후 폐를 감싸는 흉막에 물이 차는 흉막삼출액(pleural effusion)도 생겨서 배액관을 넣는 치료도 하고 식사를 잘 못해서 회복하는데 다소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수술받은 지 2달이 넘어가는 지금은 식사도 잘하시고 여러 가지 컨디션이 좋은 상태입니다.
이렇게 위험한 고비 넘기고 건강이 회복되면서 가족들은 할머니 개인간병을 공동간병으로 신청하셨습니다. 조직검사에서도 대장암이 확인되었고, 게다가 암 4기나 마찬가지인 상태이기 때문에 집으로 바로 모시고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언제 퇴원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아마도 2달 넘게 개인간병을 하고 병원에 입원하셨던 것이 경제적으로 부담이셨던 것 같았습니다.
연세 많으신 환자분들이 병원에 오래 입원하게 되면 섬망(delirium) 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그래서 헛것이 보인다든지,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증상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인도 모르게 주삿바늘이나 수액라인들은 뽑는 행동들을 할 수 있죠. 그래서 수술하고 나서 충분히 회복이 되면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것이 이런 섬망 증상의 치료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가족마다 환경과 상황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집에서 환자를 돌보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하게 됩니다.
할머니가 공동간병실로 옮기신 후 회진을 돌러갔습니다. 최근 점점 식사 양도 늘어나고 컨디션도 좋아지셔서
"오늘은 식사 얼마나 하셨는지??
통증은 어떤지??
대변은 어떻게 봤는지"를 확인하려던 찰나에
할머니 양손을 보니 침대에 묶여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거 누가 이렇게 했나요??
누가 할머니 손 묶으라고 결정했나요??"
순간 병실에 정적이 돌면서 회진을 같이 돌던 간호사, 공동 간병실의 간병하시는 분이 말이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병실을 옮기기 전에는 양손을 압박해서 묶어놓지 않았거든요.
"할머니 병실 바꾸기 전에는 이런 거 안 했었는데.
왜 묶어둔거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공동간병실로 옮기고 나서 주사 바늘이나 수액 라인을 뽑으려고 하셔서 위험하니깐 양쪽 침대 안전바에 묶어놨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환자의 치료를 도와주는 간병인, 간호사가 악의를 가지고 그런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섬망 같은 증상이 있어서 주삿바늘 뽑다가 출혈이 생기거나 다치면 안 되기 때문에 묶어놨던 것입니다.
왜 묶었는지 알기에 더는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할머니의 회복을 지켜봐 왔던 저로서는 양손을 묶을정도의 상황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 묶었을지는 저도 이해하는데요.
섬망이 약간은 있지만 그동안 괜찮으셨거든요.
우선 묶은 거 풀어주고 잘 지켜봐 주세요.
그런 거 안 하고도 문제없었거든요."
대장암 천공과 암 4기.
할머니에게 얼마간의 시간이 남아있는지 모릅니다. 물론 긴 시간이 남아있을 수도 있고, 당장 며칠밖에 안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할머니는 괜찮은지 물어보면 항상 아프다고만 하십니다. 주무시는 시간도 많고, 치매와 섬망 때문에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지만 할머니의 마음속 깊은 곳은 어떨까요?? 병문안 오는 가족과 자식들에게 예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을까요??
보호자와 상담하다 보니 할머니가 암환자이고 연세가 많으신 상태라 다른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서는 모셔가기 힘든가 봅니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배안의 대장암 씨앗들이 자라고 커지면서 할머니 병세는 더 안 좋아질 것이고, 지금의 섬망은 더 나빠질 수 있습니다. 그때는 할머니의 안전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묶어야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오늘도 아침 회진을 돌면서 이불 위로 올려저 있는 할머니의 예쁜 양손을 보았습니다.
곤히 주무시는 그 모습을 보니
더욱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직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