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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과의사 닥터오 Nov 13. 2021

내 딸도 나랑 똑같은 병이 있는데..

치질, 통증, 존중

2달 전부터 저의 외래로 진료 보러 오시는 환자가 있습니다. 제가 수술하지 않았지만 다른 병원에서 치질 수술을 하고 문제가 되었던 치질은 좋아졌지만 오히려 항문 통증이 심해져서 좀 더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던 것입니다.


작고 왜소한 할머니 한분이 제외래로 들어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OO병원에서 치질 수술하셨나 봐요.

그쪽 병원 원장님 치질 수술 잘하시고 수술도 많이 하실 텐데요.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수술하고 나서 항문이 너무 아파요.

수술 괜히 했나 봐.

이래서 어디 수술하겠어."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을 듣자마자 왜 오셨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치질 수술을 하다 보면 드물게는 항문 통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수술 방법은 PPH(자동봉합치핵고정술)라는 치질 수술기구를 이용해서 하는 방법과 PPH기구가 나오기 전부터 해오던 치질 조직만 절제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보통 치질 수술 직후에는 당연히 항문 통증이 있습니다. 어떤 논문에서는 항문 통증이 수술 직후 87%에서 발생하고 1주일 후에는 33%, 1달 뒤에는 6% 정도에서 나타날 수 있다고 보고하기도 합니다. 즉, 1달 정도 지나면 대부분 항문 통증이 좋아진다는 얘기죠.


수술하고 1달 정도 지나면 수술한 부위 상처도 괜찮아지고 통증도 좋아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환자는 작년 6월에 치질 수술했던 것이니깐 꽤 오랫동안 항문 통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항문 통증이 오래가는 경우는 치질 수술 후에 항문 주변의 신경이 손상돼서 아픈 경우가 많습니다. 수술할 때 치질 덩어리뿐만 아니라 치질 아래쪽에 있는 근육의 일부가 같이 제거되면서 신경손상이 생기는 것이죠.


"이거 왜 이런거에요??

염증이 생긴거에요??

아니면 뭐 수술이 잘못된 건가??"


"할머니.

수술한 지 벌써 1년이 넘었잖아요.

염증이 생긴 것은 아니고요.

지금까지 이렇게 항문통증이 남아있는 것은 항문 주변의 신경이 좀 다쳐서 그런 거예요.

이거 치료하려면 시간이 좀 오래 걸려요."


"아이고.

참나. 별꼴이야.

염증이 생긴 것은 아니죠??"


"네. 맞아요.

신경이 좀 다쳐서 그래요."


이런 경우 진통제와 대변 잘 볼 수 있는 변완화제를 복용하고 좌욕을 하면서 증상이 좋아지기를 기다려봐야 합니다. 근데, 할머니와 상담을 해보니 항문 통증 때문에 이미 여러 병원을 다니셨던 것을 알 수 있었고 수술했던 병원뿐만 아니라 정형외과도 가보시면서 치료받으셨던 거 같았습니다.


제가 처방해드렸던 약을 다 드시고 다시 외래에 오시면.


"약 드시고 좀 어떠세요??

괜찮아지셨어요??"


"좀 좋아지긴 했는데.

이거 염증이 생긴거예요??

왜 그런 거야??


글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매번 오실 때마다 비슷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염증이 생긴 건지?

왜 그런 건지?

수술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항상 오실 때마다 하시는 질문에 비슷한 대답을 해드리지만 매번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어쩌면 다른 병원에서도 이렇게 물어보니깐 좀 더 큰 병원 가보라고 권유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약은 좀 어떠세요.

좀 효과가 있어요??

염증이 생긴 게 아니라 신경이 다쳐서 좋아지는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어요."


"좋아지긴 했는데..

예전엔 요상하게 아팠거든.

아픈 것이 돌아다니는 것 같았는데, 이번 약 먹고 나서는 돌아다니는 것은 없어졌어.

뺑뺑뺑 돌아다니던 것이 이제 한 군데만 아프네.

별꼴이야.

나 수술하고 이렇게 고생하는 것은 처음이네.

이래서 어디 수술하겠어요.."


병원에서 진료하다 보면 많은 환자들을 만납니다. 어떤 병은 약이나 수술로 치료가 빠르게 되는 경우도 있고, 어떤 병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환자는 힘들고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면 환자는 의사에 대한 불신이 생길 수 있고 결국 다른 병원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환자는 자신의 말을 이해해주지 않거나 믿어주지 않는 순간, 또는 치료기간이 길어지면서 환자와 의사의 신뢰(라포, rapport)가 깨지는 순간 환자들은 마음을 다치게 되고 그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게 됩니다.  


이미 다른 병원에서 수술하셨던 환자이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저 외래에 진료 보러 오시면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 잘 들어 드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할머니가 오실 때마다 똑같은 말씀을 하시고, 똑같은 넋두리를 하는 것은 마음이 불안하고 어딘가 의지하고푼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화가 나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때 친구들과 대화하면 속이 좀 뻥 뚫리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할머니가 언제까지 오실지는 저는 모릅니다. 정말로 항문 통증이 좋아져서 안 오신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언제 통증이 없어질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할머니 성함이 외래 명단에 적혀있는 날이면 "오늘은 어떤 말을 하실까? 항문 통증은 얼마나 좋아지셨을까?" 내심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며칠 전 외래 오셨을 때 진료 보고 가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내 딸도 나랑 똑같이 이런 병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남들은 수술하고 금방 좋아졌다고 하는데.

나처럼 치질 수술하고 나서 이렇게 고생하면 어떡해. "


"선생님.

여기서도 수술하죠??

내 딸 여기서 수술해도 괜찮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할머니는 딸이 안전하게 수술받을 수 있는 곳을 찾으러 다니셨을지도..

본인처럼 고생 안 하고 수술 잘 받을 수 있는 곳을 찾으러 1년 넘게 다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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