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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과의사 닥터오 Nov 11. 2021

삭막하지 않습니다. 아직 세상은 따뜻합니다.

담석증, 이웃, 할머니

우리나라에는 24절기가 있습니다.

저도 이런 '절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네이버를 참고해보니.


24절기란??

태양의 황도상의 위치에 따라 계절적 구분을 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황도에서 춘분점을 기점으로 15도 간격 점을 찍어 총 24개의 절기로 나타낸다고 합니다.


이런 24절기 중에서 최근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입동" 이 지나가면서 아침, 저녁은 물론 낮에도 쌀쌀한 바람을 자주 느끼게 됩니다.

출처 : 네이버

이렇게 날씨가 추워지고, 겨울이 다가오면 TV에서는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독거노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쌀을 기부하거나 김장김치를 전달하거나 연탄과 같은 난방을 지원하는 따뜻한 소식이 방송에 많이 나옵니다.


며칠 전 응급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과장님.

90세 넘으신 할머닌데요.

배가 아프셔서 검사를 했는데, 쓸개에 돌이 있는 담석증이네요.

피검사에서 염증수치는 올라가 있지 않은데, 통증이 좀 심하신거 같아요."


"열나지는 않으시죠??

응급실로 갈께요."


응급실로 가보니 할머니 혼자만 침대에 누워계시고 다른 보호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보호자분들은 없나요??

환자 상태에 대해서 설명하고, 치료에 대해서 상의해야 하는데."


그때 할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 혼자야.

할아버지도 오래전에 보냈고, 자식들도 없어.

나한테 얘기해요."


"자식들도 없으세요??

연세가 많으셔서 젊은 보호자와 상의해야 해요."


"자식 하나는 나처럼 요양원에 누워있어.

다른 하나는 연락 끊긴 지 오래고.

지금은 나 혼자니깐 상의할 거 있으면 나랑 하면 돼요."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환자가 고령일 경우 작은 수술도 여러 가지 위험성과 합병증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보통은 젊은 보호자에게 수술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연세가 많은 경우 병과 수술, 앞으로의 치료에 대해서 이해를 잘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할머니 환자분은 기억하는 것부터 말씀하시는 것까지 너무나 정신이 맑으셨습니다.


요즈음은 90세가 넘는 환자들도 수술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수술하는 장비, 스킬이 좋아진 것도 있지만 예전보다 건강검진도 많이 하고 자기 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건강하게 수명연장이 되는 환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이가 많고, 고령이라는 것이 수술 후 합병증의 위험성을 높이는 부분이긴 하지만 실제 이런 환자를 수술하다보면 "고령" 이라는 것 때문에 해야 할 수술을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외과학에서 보면 노인인구 비율 

1990년 5.1%

2000년 7.2%

2007년 9.9%

2008년 10.3%

2018년 고령화사회(노인인구 비율 14 ~ 20%)

2026년 초고령화사회(노인인구 비율 20% 이상)로 진입하는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나이만으로 수술의 위험성(합병증, 사망률)을 평가할 수는 없으나, 고령 환자는 생리학적 또는 기능적 능력이 감소되어 있고 다양한 질환이 동반되어 있습니다. 즉 노인은 심장, 폐, 신장 및 신경학적 능력이 감소되어 있기 때문에 수술 후 합병증 및 사망률이 증가할 수 있다는 것이죠.


나이, 고령이 수술과 회복에 중요한 평가 기준이긴 하지만 "치료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에 치료를 지연시키면 안 된다."라고 외과학 책에서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노인에서 수술 후 합병증이 많이 발생하고 수술의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라는 의료인의 생각으로 수술의 지연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수술이 지연된다면 오히려 합병증이 발생하고 사망률이 증가할 수 있습니다. Reference : 외과학


할머니는 언제부터 아팠고, 지금은 어디가 주로 아픈지. 어떤 자세를 취하면 아프고, 언제는 안 아픈지.

오래전 검사했던 것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현재 자그마한 시골 동네에 혼자 사시는데, 걸어다니는 것이 불편해서 요양보호사가 정기적으로 방문한다고 했습니다. 8년 전에도 머리에 뇌동맥류가 있는 것을 알았는데, 나이가 많고 위험해서 수술 안 했지만 지금 있는 복통은 너무 심해서 요양보호사가 병원 가보는 게 좋을 거 같다고 하여 동네 "이장님"과 같이 응급실로 오신 것입니다.


할머니는 본인이 이제는 살만큼 살았고, 혼자만 남아있기 때문에 병원 안 가고 남은 시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며 수술하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담낭(gallbladder, 쓸개)에 '담석' 이라고 하는 '돌'은 있었지만 염증이 심하지 않아서 수술을 하면 충분히 좋아질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만약 자식들이나 젊은 보호자가 있었다면 어떤 방향으로 치료하면 좋을지, 연세가 많지만 수술 후에 어떤 과정으로 회복하실 수 있는지 상담할 수 있었을 텐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수술을 안 한다고 하시니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예약된 다른 외래 환자가 있어 진료를 보고 있는데, 응급실에서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과장님.

할머니 다시 수술하시겠데요."


"아. 그래요??

그럼. 입원시켜주시고요.

8년 전에 머리에 뇌동맥류도 있었다고 하시니깐 병실 올라가기 전에 신경외과 과장님 진료 먼저 해주세요."


신경외과 진료가 끝나고 보호자 역할을 하고 계시는 동네 "이장님"과 휠체어 타고 오신 할머니와 함께 외래에서 상담을 하였습니다. 두 분의 말씀을 들어보니 요양원에 누워있다고 하셨던 할머니 아들도 동네 이장님과 주변 이웃들이 도와서 치료받을 수 있게 하고 았다는 말씀과 함께 할머니는 치료받을 돈이 없어서 이번 담낭수술을 거부하셨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수술비 때문에 수술을 안 하신다고 한 거 같아요.

할머니 아들도 요양원에 있는데, 그것도 제가 다 알아봐 드리고 그쪽에서 치료받게 해 드렸어요.

이번에 할버니 수술할 돈은 저랑 마을 사람들이랑 십시일반 좀 모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알아보니깐 나라에서 형편 안 좋은 사람들에게 해주는 "긴급의료지원" 이라는 것도 있어서 그런 것도 할머니는 해당되실 거 같아요."


이렇게 이장님이 말씀하시니 옆에 있던 할머니는.


"나 여기 병원 올 때 내가 입던 옷 다 남주고 왔어."

"이 나이에 수술하다 죽을 수도 있는 거 알고 왔으니깐 수술 설명은 다 나한데 하면 돼요."


"아니고.

옷 얘기는 왜 해요??

죽긴 누가 죽어요."


이렇게 서로 투닥거리며 말씀 나누시는 모습을 보니 마치 딸과 엄마의 모습을 보는 듯 했습니다. 이장님이 머리도 짧게 쑛컷으로 하신 여성분이셨거든요.


TV이나 인터넷을 보면 따뜻한 이야기보다 위험하고 삭막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세상입니다. 코로나로 사람과의 단절도 심해졌고 비대면이라고 하여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오히려 불편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렇게 따끈따끈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별 볼 일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보석 같은 일들이 주변에서 일어나곤 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에 움츠려 드는 요즘이지만 올 겨울 마음만은 그리 춥지 않을 거 같습니다.


"삭막하지 않습니다. 

아직 세상은 따뜻합니다."   

오늘 할머니 수술을 했습니다.

다행히 수술이 잘되었네요.

지금 잘 회복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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