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 환자, 감정
함께하는 주변 사람들의 감정이 나에게로 전달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같이 일하는 사무실 안의 동료에게 안 좋은 일이 있어 우울한 분위기가 감돌면 그런 감정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전달됩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기분이 안 좋으면 자연스레 말과 행동이 조심스러워집니다.
외과의사인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정확한 결정을 해야 하고 환자의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서도 가장 명확한 솔루션을 선택해야 하는 이성적인 외과의사일지라도 환자 때문에 감성적으로 변하고 환자의 컨디션에 따라 그날의 감정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환자가 힘든 고비를 견디고 한발 한발 운동하는 모습을 보면 저 또한 힘차게 하루를 시작하게 되고, 환자의 회복 속도가 더디고 이런저런 나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면 누군가의 주먹에 실컷 두들겨 맞은 듯 제 마음도 아프고 먹먹해집니다.
아침 일찍 병원으로 출근한 의사들은 자기 환자의 차트를 확인하기 위해서 컴퓨터 모니터를 켭니다. 입원환자라고 되어 있는 명단을 보면서 맘 편히 클릭하는 이름이 있는가 하면 두근거리며 걱정스러운 마음에 클릭하는 이름도 있습니다.
경과가 나쁜 환자의 차트를 클릭할때면 마치 시험 점수나 협격 여부를 확인하는 수험생처럼 긴장되는 마음으로 모니터 앞에 앉게 됩니다.
합격일까 불합격일까??
몇 점일까??
몇 등일까??
환자가 좋아졌을까??
아니면.. 더 나빠졌을까??
환자 한 명 한 명의 얼굴과 성격이 다르듯이 똑같은 치료를 했다고 해도 그 효과는 차이 나기 마련입니다.
같은 약으로 치료하고 같은 수술을 했다 해도 좋아지는 속도, 회복되는 정도가 모두 다릅니다.
건강하고 다른 병이 없었던 환자일수록 큰 수술을 받았을 때 체력적으로 아무 문제없이 회복될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많고, 다른 병들을 함께 가지고 있는 환자라면 내가 예상하는 속도와 방향대로 회복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환자가 수술 후 회복을 잘 못하고 점점 문제가 하나 둘 나타난다면 저 또한 그런 어둡고 기분 나쁜 감정에 빠지고 무력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면 외과의사도 맘고생을 합니다.
내가 뭘 놓치는 것은 없는지.
수술할 때 뭔가 좀 더 했어야 했나??
수술하고 적극적으로 운동하지 않고, 협조적이지 않았던 환자가 생각나기도 하고
그때 좀 더 강하게 환자를 다그치지 않았던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나기도 합니다.
수술했던 환자의 건강이 안 좋아진다는 것은 기계의 부품을 교환하고, 인형이나 장난감이 고장 나서 고치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특히 외과의 환자가 안 좋아지는 것은 '살고 죽는 문제'입니다.
우리 몸의 장기는 서로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대장의 일부에 병이 생기거나 소장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부분만 기계부품을 교환하듯이 칼로 자르고 수리할 수 없습니다.
즉, 수술해야 하는 타이밍이 있고, 치료해야 하는 타이밍이 있는 것이죠.
적절한 시기를 놓친다면 처음에 발생했던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 몸 전체에 또 다른 악영양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외과의사는 그 환자의 몸 상태에 따라서 감정이 요동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알기에 내가 생각했던 속도와 방향으로 환자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머릿속에서는 수만 가지 생각들이 가득 차게 됩니다.
이러다가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내가 뭘 더해야 할까??
약을 바꿔볼까??
다른 검사를 해볼까??
다시 수술을 해야 할까??
수술하면 환자가 버틸까??
환자의 건강 상태가 내 감정을 전염시키는 것입니다.
계속 구역감이 들어 식사도 못하고 누워만 있는 환자를 보면 뭘 더 해봐야 할까 라는 생각에 저의 마음도 짙은 안개처럼 가라앉게 됩니다.
어제 이렇게 약을 바꿨는데, 좀 더 좋아졌을까??
열나는 것이 좀 줄어들었을까??
식사 양은 좀 늘었을까?
소변 양은 좀 어떨까??
의과대학생때 의학과 3학년쯤 되면 1주일에 한 번씩 또는 2주일에 한 번씩 시험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의사국가고시, 전문의 시험, 세부전문의 시험, 또 다른 전문분야 시험 등..
시험에는 이골이 날정도로 숫자와 글자라는 관문을 누구보다도 전쟁 치르듯이 헤쳐왔지만..
며칠째 누워있는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매시간 오르락내리락하는 환자의 체온, 혈압, 소변양, 피검사를 나타내는 숫자 하나하나에 맘 졸일 수밖에 없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환자의 이런 기록들을 매일 아침 확인하는 것은 그 어떤 시험보다도 두렵습니다.
어제보다 나빠지는 숫자를 보면서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책을 찾아보고 논문을 찾아보고 다른 분야 선생님과 상의하면서 온갖 방법을 찾아보게 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법을 찾아봐야 하니까요.
어제보다 좋아졌으면??
가슴 한편을 쓸러내리며 휴~ 가능성이 있는 건가??
이렇게 치료 방법을 바꾼 게 맞았네. 이환자한테는 이게 맞는가 보다.
저의 감정도 덩달아 가벼워집니다.
요 며칠 마음 졸인 환자가 있었습니다.
수술하고 협조가 참 안되었던 환자인데, 결국은 회복이 잘 안 되고 있었고 심지어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보호자에게 환자의 상태에 대해서 설명하고 아주 안 좋은 결과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설명까지 했었습니다.
약도 바꿔보고, 여러 가지 검사도 해보고 다른 분야 선생님들과 상의도 하고..
다시 수술을 해야 하나 고민까지 했었습니다.
만약 다시 수술을 한다면 가망이 없습니다.
그 큰 수술을 다시 한다면 환자가 버티지 못할 거 같았습니다.
여러 고민 끝에 바꿨던 치료가 이제는 조금씩 효과가 나타납니다.
이제는 매일 아침 환자의 차트를 열어보는 것이 시험 결과 확인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제는 식사양도 좀 더 늘었고, 오들 오들 떠는 것도 사라졌어요.
어제부터 컨디션이 좋아진 듯해요."
라는 간병하시는 분의 말에 제 마음속의 짙은 안개도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이렇게 외과의사는 환자에게 물들어가고 전염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