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나물 밥상

by 정옥





햇살은 더없이 좋고, 바람도 향기로운 날이다. 노란 민들레가 별처럼 박혀있는 들길을 지나 솔방죽으로 향했다. 민들레는 지천으로 피었고 초록의 연한 잎사귀가 꽃보다 더 눈길을 끈다. 혀에 닿는 맛을 잘알고 있어서 일까. 불현듯 ‘저 연한 잎을 뜯어다 새큼달큼하게 무치면...’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리운 얼굴 하나가 그 많은 민들레를 덮어 버렸다. 안쓰러움과 미안함과 그리움이 얼버무려져 눈물이 핑 도는 얼굴, 어릴 적 옆집에 살던 순이였다. 그 애에게 참으로 못나고 이기적이었던 일들을 생각하자 맑은 봄바람에 설레던 마음이 금세 우울해 졌다. 햇살 한 자락이 내 양심에 붙어 뼛속까지 들여다보며 조롱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순이는 옆집에 살던 내 단짝 친구였다. 종이인형놀이, 소꿉놀이, 고무줄놀이, 공깃돌 놀이 등 놀이란 놀이는 다 순이랑 했다. 밥 먹는 시간을 빼고는 종일 같이 붙어 지내면서도 수틀리면 머리채를 휘어잡고 드잡이를 하며 싸우기도 하는 그런 친구였다. 그 시절엔 순이네가 사는 형편도 우리보다 훨씬 좋았고 막내딸이라 귀여움도 많이 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열 살 무렵 순이 엄마가 스스로 생을 마치고 나서는 배가 다른 오빠 집에서 천덕꾸러기로 살았다. 순이가 오빠네서 눈칫밥을 먹기 시작하면서 순이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 되었고, 순이의 슬픔은 나의 슬픔이 되었다. 그렇다고 순이를 위해서 내가 특별나게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고 하지도 못했다. 그저 마음만 안타까워 동동거렸다. 순이는 중학교를 겨우겨우 졸업하고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산업체로 내 곁을 떠났다.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다가 소식이 끊겼다 어찌어찌해서 다시 만났다가 그렇게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다. 스물세 살 되던 해에 순이가 시집을 간다며 나를 찾아 왔다. 남편 될 사람은 우리보다 한 살 아래로 방위로 군 복무 중이고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만났다고 했다. 결혼식은 나중에 돈 벌어서 하고 같이 살기로 했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몇 년이 지나고 다시 순이가 나를 찾아 왔다. 그동안 왜 그렇게 연락이 없었냐고 묻는 나에게 정신병원에 들락거리느라 그랬단다. 길을 가다가 하늘을 보면 헛것이 가득해서 비명을 지르게 되고, 자려고 하면 남편 옆에도 헛것이 앉아 눈을 흘기고 있어서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했다. 지금은 좋아져서 널 보러 왔다고, 종이인형 같은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그 뒤로도 순이는 이따금 정신병원 신세를 지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순탄하게 살고 있었다. 조현병을 앓느라 아기도 갖지 못하는 순이가 더 나빠지지 않고 그 정도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은 마음씨 착한 남편 덕이었다. 사실 나는 순이의 남편이 밤업소에서 웨이터들을 관리하는 일을 한다 해서 불량기가 있는 폭력적인 사람일 것이라고 지레짐작을 했었다. 내 짐작과는 달리 그는 성실하고 심지가 굳었다. 스물두 살에 만나 평생을 반복되는 순이의 병수발에 지치고 한눈을 팔 법도 한데 한결같이 다정하게 보살피고 있으니 고맙고 감사했다. 마음고생 많이 하며 성장한 순이에게 전능하신 그분께서 날개 없는 천사를 보내주신 것만 같았다.

어느 해 사는 일이 힘에 부쳐 몸도 마음도 피폐해 졌을 때 여섯 살 딸아이를 데리고 순이에게 간 적이 있었다. 이틀을 쫄쫄 굶고 버스 멀미에 거의 탈진되어 강남 터미널에 도착한 나를 순이가 마중 나왔다. 순이네 집에 도착해서 아무것도 삼키지 못하고 이튿날까지 잠만 자는 나를 순이가 흔들어 깨웠다. 자더라도 밥이나 먹고 자라고. 입안에 모래를 한 줌 물고 있는 것 같이 깔깔하고 썼다. 밥 먹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내 손에 그래도 한 술만 떠보라고 순이가 수저를 쥐여 줬다. 순이가 끓여준 냉이된장국에 밥을 말아 씀바귀, 민들레 무침과 먹으니 시들시들한 얼굴에 생기가 돌고 눈이 번쩍 떠졌다. 살면서 그렇게 따뜻하고 눈물겨운 밥상을 받아본 적은 없는 것 같다. 해마다 봄이 되면 그날 순이가 차려준 봄나물 밥상이 생각나서 마음이 아릿하다.

주유원 한 명 없이 남편과 둘이 주유소를 할 때 순이가 전화를 자주 했었다. 잘해주는 남편이 있어도 속 얘기를 할 친구는 나밖에 없다고 믿는 탓인지 전화를 하면 시시콜콜 끊을 줄을 몰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순이의 전화가 부담스러워서 “지금은 바쁘니까 이따가 전화할게”라는 말로 순이의 전화를 따돌리고는 했다. 자연히 순이의 전화도 뜸해졌다. 어느 날 그립고 미안한 마음에 순이를 찾았을 때는 순이에게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쭉. 순이의 하얀 살결에 핏자국 선연한 상처를 남긴 꼴이 되었다.

언제고 순이를 다시 만나게 되면 봄나믈 가득 차려진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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