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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살, 글씨 쓰는 연습을 시작했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한다. 우연히 같이 놀던 친구의 글씨체를 보고 충격을 받았었다.


'얘가 이렇게 글씨를 잘 썼다고?' 


초등학교 시절을 돌이켜보면 글씨 잘 쓰는 남자는 정말 드물었다. 그런데 나랑 매일 같이 웃고 떠들던 놈의 글씨가 내 예상과는 너무 달랐다. 마치 글씨를 쓸 때만 어른의 영혼이 들어와 내 친구 대신 글씨를 써주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날 이후, 나는 내 글씨체를 바꾸려고 노력했었다. 친구처럼 글씨를 잘 쓰고 싶었다. 다른 친구들도 내가 쓴 글씨를 보고 나처럼 느꼈으면 했다. '와 얘 글씨 잘 쓴다'란 느낌. 


그 노력 덕분일까? 중, 고등학교 그리고 지금까지도 남자치고는 나름 글씨를 잘 쓴다는 이야기를 꽤나 들어왔다. 그러다 보니 한 때는 나름의 자신감도 있었다. 이 정도 글씨면 충분하지라는 생각도 있었고. 그런데 항상 뭔가 아쉬움이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나쁘지 않은 글씨체일 수 있지만, 내가 원했던 글씨체와는 좀 차이가 있었다. 좀 더 어른스러우면서도 무심한듯한 느낌(=필기체)의 글씨체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못 쓰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막 잘 쓰는 건 아닌... 



하지만 7~8살 된 아이도 아닌 내가 이미 수년간 써왔던 글씨체를 갑자기 바꾼다는 건 쉬운 게 아니었다. 아니 일단 시도자체를 하지 않았다. 마치 운전면허는 있지만 운전기사가 있어서 굳이 운전할 일이 없는 느낌..? 게다가 글씨를 못 써서 누군가에게 구박을 받는 것도 아닌데 굳이 바꿀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30살이 넘도록 글씨체를 바꿔 보고 싶다는 생각은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오..? 잠깐만 이번에는 진짜 글씨체를 바꿔볼까?' 하는 계기가 있었다. 


애정하는 유튜버 '무빙워터'의 영상 "면접만 4번 보는 이상한 회사 취업기"를 보던 중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심지어 글씨체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던 영상이다) 


"클래스 101 강의 중 가장 좋았던 강의를 딱 하나만 뽑는다면 무엇을 뽑겠느냐?"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펜크래프트의 필기체 강의"였다. 


TMI지만 내 뮤즈이자 롤모델이 무빙워터다 ㅎㅎ



필기체 강의? 이건 대체 무슨 강의 지라는 생각에 곧바로 강의를 찾아봤다. 썸네일부터 내가 딱 원하던 글씨체가 보였고 뭐에 홀린 사람처럼 좋아요를 눌렀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집에 와서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좀 더 솔직하게 쓰면... 회사에서 5분 정도 미리 보기 강의를 보고 수강을 결심했다 ㅎㅎ)


강의 진행은 매우 단순하다. 간단하게 연필 잡는 법과 자세에 대해 알려준 뒤 '가'부터 시작해서 필기체 형태로 쓰는 법을 보여주고 따라 하는 형태다. 정말 신기한 건 강의에서 배운 글자에 대해서는 내가 신경을 쓰면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사실 그동안은 글씨를 쓰면서 내 글씨체에 대해 크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냥 오늘은 좀 잘 써지네 마네 정도..? 그리고 아마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이미 수십 년간 체득해 온 나만의 글씨체가 있을 것이고 그걸 굳이 바꾸려 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강의에서 배운 포인트를 신경 쓰며 글씨를 쓰다 보니 이전과 조금씩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아직 초기라 큰 차이가 나지는 않지만 이게 쌓이고 쌓이다 보면 내가 원하는 글씨체 형태가 나오겠구나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점점 재미를 붙여가는 중이다. 


어른의 글씨.. 하루빨리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이 과정이 생각보다 재밌어서 주변에 친한 친구 몇 명에게 글씨 연습한 사진과 함께 글씨 연습 중이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뿌듯함과 신기함을 담아 이야기했는데 막상 돌아오는 반응은 생각과는 좀 달랐다. 


"너 글씨 잘 쓰지 않아? 굳이?" 

"야 33살 먹고 쓸데없이 글씨 쓰는 연습을 하냐?" 


사실 맞는 말이긴 하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인데 하는 건 맞으니까. 예전의 나였다면.. '그런가.. 하지 말까...?'라는 생각을 했을 법도 한 반응이긴 했다. 그래도 글씨체를 배우는 게 재밌고, 내 글씨체가 변해가는 게 좋으니 그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히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래 나만 즐거우면 됐지'란 생각으로 계속 강의를 듣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닌 일이거나 쓸데없는 일로 보여도 나에게는 꽤나 재밌는 일이 되어가는 중이니 말이다. 나만의 또 다른 행복 포인트를 찾은 기분이랄까. 요즘 이런 사소하지만 재밌는 일들을 찾는 중이었는데 그 취지에 딱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과장하면 글씨 쓰는 재미를 모르는 사람들이 손해지라는 생각도 들 정도니까. 



그래서 33살 11월의 나는 굳이 글씨체 강의를 다 듣고 계속 글씨 연습을 해나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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