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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뇽 Nov 22. 2024

책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그건 기억일 뿐이다. 사랑은 사랑으로 남아있다.

제주도 여행 중에 책방 같은 숙소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그나마 제목이 친숙하다는 이유로 읽은 책이다.

일본 애니매이션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비현실감과 차분한 인간애가 있는 작품이다.


이 글의 남자주인공 가미야는 어렸을 때 어머니를 심장병으로 잃었다.

이후 친누나는 초등학생인 남동생을 돌보며 집안일, 공장일을 하기 시작했으나, 일찍부터 소설을 쓰는 것에 재능을 보였던 그녀는 도저히 꿈을 좇는 일에 시간을 투자할 수 없음을 느끼고 집을 나가게 된다.

그동안 누나의 바래져가는 꿈과 한탄, 그 뒤의 수많은 단념을 지켜보았던 가미야는 집을 나가는 누나와 눈을 마주쳤을 때 ‘그냥 가’라고 하며 묵묵히 용인하였다.

이 후 집안일은 온전히 그의 몫이 되었고, 아직 중학생일 뿐이었지만 꽤 잘해냈으며, 공부도 잘해 좋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의 꿈은 고등학교 졸업 후 공무원이 되는 것이었고, 이미 어느 새 성공적으로 등단하여 문예계 최고의 상을 바라보는 대작가가 되어가는 누나의 귀가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어느 정도 순탄히 흘러가고 있었고, 그저 조용히 할 일을 하며 미래를 맞이하는 것이 하루 일과였는데, 그 동안의 나를 뒤엎는 여자애가 나타난다.


히노는 선행기억상실증이라는, 상상 속에나 있을 것 같은 질환을 앓고 있어, 사고가 난 지점부터 기억이 더 이상 저장되어 있지 않으며 쌓여가지 않는다.

학교, 국가의 재량으로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는 있겠으나, 이후의 미래를 꿈 꿀 수도, 새로운 인간관계를 시작할 수도 없는 블랙홀에 빠져버렸다.

인간의 특권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꿈꾸는 것일텐데, ‘너는 기억상실증이야’라고 하는 머리맡의 쪽지를 보며 매일 절망하지만 그녀는 이내 활짝 웃는다.

그녀의 기억은 단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한순간의 감정은 호르몬의 작용이라 단순하기 그지 없지만, 절망에도 희망을 놓치 않는 그 마음은 변치 않는 그녀의 ‘성격’일 것이다.


가미야는 이 여자를 보며 곧 사랑에 빠졌음을 알게 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여자 때문에 ‘내 세계’가 생겼다. 해야할 것을 하는 삶이 아니라, 바보같고 엉뚱하지만 순수하게 그녀를 기쁘게 만드는 일을 하기 시작한다.

대게 행복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일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그에게 사랑은 그렇게 히노와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행위였다.


그녀에게는 배울 점도 많았다. 

축적되지 않는 삶이었으나,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매일 일기를 쓰고 아침마다 그 것을 읽으며 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 기를 쓰는 히노를 보며 친누나의 모습을 함께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삶의 태도는 가미야를 변화시키기까지 했다. 평소 같았으면 하지 않았을 일이었으나, 그는 누나의 문예상 수상 사실에 화를 이기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그동안 참았던 말을 내뱉고 만다.

‘아빠가 우리를 돌보지 않을 동안, 누나가 다 했어. 아내를 앞세운 본인에게, 소설을 쓰지만 막상 신인상 출품도 못하는 본인에게, 도취된 상태로 도망치고만 있잖아.’


누나가 귀가하고, 아버지가 집안일을 시작하며 분열되었던 가족이 다시 화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을 때, 히노도 ‘무사히 졸업’이라는 삶의 축적된 성과를 이루었을 때, 가미야는 어머니와 비슷한 심장병으로 돌연사한다.

히노의 일기장과 수첩에서 자신의 흔적을 모두 지워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여자가 자신의 부재에 더 이상 슬퍼하지 못하도록 해달라는 유언과 함께.


결국 유언을 받들어 와타야와 가미야의 누나는 히노의 기억에서 가미야를 지워버렸고, 정말로 히노는 그가 원하던 미래를 살게 된다. 부재에서 오는 상실감, 불안감 없이 평탄한 몇 년을 지냈고, 기억상실증이 회복되어 기억을 저장하기 시작했고, 대학 진학도 했다.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잊어버렸다는 단서가 조금씩 생각나기 시작하고, 이내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 가족과 옛날 친구들, 가미야의 누나를 통해 그를 기억 속에서 살려내기 시작한다. 

‘과거에 사로잡히지 마라. 혹시 다른 좋은 누군가를 만나면 그에게 사랑을 주어야 한다.’라는 누나의 당부가 있었으나 그건 나중의 일이다.

사랑을 마무리하지 못했고, 온전히 떠나보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를 기억해내고 그려내는 것은 지난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상처가 남더라도, 묵혀 둔 슬픔을 소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죽음 직전까지도 함께 꿈꿔주었던, 나의 미래를 살고 있음에 감사하는 것은 일종의 추모 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히노가 지금껏 어떤 글자와 영상 기록에도 없었던 가미야의 모습을, 벚꽃나무 아래에서 그려내는 것을 통해 마무리된다.

가미야는 히노를 보며 그녀와 함께 하고 싶은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고, 

히노는 매일 아침 절망을 마주하면서도 일기장 속에만 있는 가미야와의 과거를 보며 행복을 찾았다.

그렇게 히노의 미래와 가미야의 과거는 히노의 머릿 속 어느 지점에서 만나게 되었다.


사랑을 정의할 수는 없으나, 

불행의 무더기 속에서도 하나의 행복을 발견하는 힘을 주는 것이 아닐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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