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처음 맞는 겨울에, 곧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뜩이나 아침마다 전기장판에 몸이 붙어 하루종일 찌뿌둥했던 나인데 더 움츠려들 것만 같아 훌쩍 남쪽 제주도로 피신한 여행이었다
첫날은 무척이나 우울하여 호텔에만 있고 싶었는데 성산일출봉에 올라가 일출을 보면서 내 마음에도 해가 들었다
내 불안증세가 가장 심했을 때는 올해 여름 장마철이었는데, 당시 아침마다 눈을 뜨면 몽롱한 정신에 하루가 막연하고 두려웠으며, '내가 정상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내가 왜 이러지 싶을 정도로 길거리를 계속 돌아다녔고, 사람들에게 괜히 말을 걸고 웃기도 하며, 잔고도 없는 마당에 예쁜 옷과 가방을 사러 다녔다. 밥을 먹다가 옆테이블에서 사직 중인 전공의를 욕하는 소리가 들리면 밥을 먹지 못하고 나왔었고, 길거리의 구급차 사이렌 소리에 머리가 아파 주저앉아야 했다. 싸움과 소음에 무척이나 예민해졌다.
다행인 것은 누군가의 따끔한 충고를 통해 병원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과의사 주제에 정신과 약을 먹기 싫었고, 상담을 받을 필요 없고 스스로 고칠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해 왔었다.
상담을 시작하고 약을 먹기 시작했고, 스트레스는 줄기 시작했으며 꽤 차분한 내가 되었다.
중간에 일하던 대학병원에 잠시 다녀올 일이 있어 갔다가 증상이 심해져 약 용량을 잠시 늘였으나, 다시 줄었고 현재는 약을 먹지 않아도 편한 상태가 되었다
사람의 기억이 가지는 힘이 얼마나 놀라운지, 동기들과 갔었던 병원 앞 술집을 스칠 때, 예전에 소중했던 사람과 함께 걸었던 공원길을 걸을 때,
그날의 감정과 웃음이 단 0.1초쯤의 시간으로 회상되었고 바로 슬픔과 불안이 되었다.
다시 그때처럼의 내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
솔직히 말하면 내가 정상이라 믿었던 1년 전의 나는, 그렇게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아니었다.
너무 바쁘고 할게 많아서 나를 돌볼 시간이 없었다
오히려 지금의 정서가 더 편하고 안정적인 상태이다. 어떻게 보면 직업이 사라지면서 나의 정신적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온 것 같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단연 배낚시였다
새끼물고기만 잡아서 다 풀어주느라 수확물은 없었다. 아주 작은 통통배라서 돌아오는 길이 꽤 넘실거렸는데, 눈을 감고 몸을 뉘어오는 그 시간이 두둥실하니 행복했다.
'그래, 나는 넘실거리며 정박할 어디론가로 가고 있구나. 나는 이렇게 충분히 순간을 즐기며 살 수 있다. 그게 어디든, 언제든 크게 중요치 않다.
나는 더 좋은 사람일 수 있고, 부족한 부분은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다.
이렇게 떠밀리지 않고 두둥실 살아갈 수 있다.'
이토록 매일 감사함을 느낀다. 나와 내 앞의 사람에게.
정신과 주치의 선생님은 언제든 불안감이 올 수 있으니 놀라지 마라고 하셨다
모든 병의 호전에는 Fluctuation (기복) 이 있으니 말이다. 당장뿐 아니라 살면서 언제든 그럴 수 있다고 알고 있다.
그렇다고 병이 나에게 다시 찾아올까 두려울 필요는 없다. 분명한 건 이 넓은 바다와 파도처럼 내가 끝없이 넓어질 수만 있다면 어떤 파도라도 품을 수가 있다. 나는 제주 억새처럼 휘어는 지되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제주도 겨울 고요한 밤이다.
조금씩 여기도 추워지고 있어 밖에 있기가 힘들다.
요 며칠은 하루종일 책을 보고 놀았다.
내일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탄다.
그곳은 떠나올 때보다 훨씬 추워져 눈도 온다고 하는데 걱정이 조금 되지만,
지금의 나는 예전과 달리 집 안에서도 편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여유롭고 부지런한 내일의 내가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