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태 작가님) 깨진 전조등이 할 일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어느 날 당신이 길을 걷다 의도치 않은 사고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유일하게 혼자 목격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건의 범인이 가족과도 같은 가까운 지인이라면, 없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어떤 행동을 할 것 같은가
이 책에 수록된 단편 소설들을 읽으면서 작가님 특유의 강렬한 첫 문단 시작이 재미있게 다가왔다.
[한낮의 아스팔트 위에 죽은 것이 있었다.]
전조등의 첫 문장이다. 재밌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해석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계기였다. 그런데 이 책이 더 재밌게 다가온 건 이 첫 문장이 강하게 다가오고 난 뒤, 작가님 특유의 어디에나 있을 법한 작가님 특유의 냄새가 나는, 약간은 수수하다고 볼 수 있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잔잔하게 흐른다는 것이다. 문학을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로서는 신선한 방식이었다. 그래서 재주는 없지만 이 글의 시작도 작가님처럼 구성해 보고 싶었다.
그럼 먼저 전조등이란 무엇인가부터 알아보자 전조등은 자동차나 오토바이 등의 앞에 부착되어, 밤에 주행할 때 앞을 환하게 비추기 위해 설치된 전등을 말한다. 따라서 전조등은 무언가의 사고를 예방하자는 차원에서 존재한다. 나는 이런 전조등의 모습이 주인공의 모습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때늦은 첫 연애는 그렇게 시작됐다. 애인의 부모는 밤 아홉 시가 되면 어디냐고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애인이 부모와 싸우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늘 서둘러서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었다. 어느 날 그녀는 유난히 느릿느릿 걷다가 집 앞에서 이렇게 비죽거렸다 “내가 오빠를 좋아하긴 하는데, 너는 진짜 너무 너다” 그는 어리둥절했지만 어쨌든 애인을 실망시키고 싶진 않았다.]
[면접관들은 그의 우수한 학점과 빈틈없는 스펙을 높이 평가했다. 자기소개서에 풀어낸 연극부 경험은 적극성과 도전 정신으로 해석되었다 (생략) 고용 안정성과 기대 연봉을 고려해 완성차 제조업을 기반으로 하는 재벌 그룹에 입사했다]
주인공의 첫 연애, 그의 스펙과 취업을 하는 장면을 통해 그는 하나의 전조등처럼 자신에게 닥칠 무언의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갈등을 최대한 멀리하고 안정성을 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들 외에도 적절하지 않은 부도덕한 행동을 보이는 직장 동기나 상사의 행동을 싫어하는 모습, 결혼 상대를 신중하게 고르는 모습 등을 보며 작가님은 우리에게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정서가 바르고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이 돈을 벌었고 여유도 생겼다면 이제 자신과 함께할 동반자를 찾을 시간이 온다. 주인공은 자신에게 맞는 결혼 상대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그는 노란색 메모 패드에 열두 문장을 정리할 수 있었다.
1. 생물학적 여성이면서 스스로를 여성으로 규정하는 이성애자 사람
2. 나와 모국어가 같은 사람
... 생략 (일신론 기반의 신앙인이 아닌 사람)
12. 흰 바지를 입지 않는 사람
[때로는 자신이 지나치게 신중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럼에도 종업원을 무례하게 대하거나 신용카드 리볼빙을 애용하는 사람과 결혼할 순 없었다. “너무 따지면 결혼 못 한다”라고 조언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말을 하는 친척이 있었다. 그 말은 가성비를 따지라는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전자제품을 고르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으므로 ‘이 정도면 괜찮은......’ 따위에 판단에 기댈 수는 없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사랑에 대해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있기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독자분들 또한 여기까지 읽으면서 주인공의 정직함과 진중함을 보며 그가 진정한 사랑을 찾길 응원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의 마음은 누구나가 할 수 있고, 이미 하고 있기도 한,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욕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지인의 동생의 지인을 통해 자신만의 짝을 찾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나의 주관이 강하게 들어간다. 이 해석이 확실하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그저 한 독자의 시각이라고 생각하고 재밌게만 봐주었으면 좋겠다.
책에 마지막을 보면 뜬금없는 타이밍에 책을 다시 보고 싶어 지게 만드는 문장이 하나 있다.
[그는 어떤 것들은 예고될 수 없으며 호명될 뿐이라고 생각하며 담대해졌다. 당장 해야 할 일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그는 촛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손뼉을 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여기서 말한 예고될 수 없으며 호명될 뿐이라는 그 어떤 것이 주인공의 아내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앞서 말했듯 주인공은 지금의 아내를 만나기 전 자신이 원하는 배우자 상의 열두 문장을 적었었다.
1. 생물학적 여성이면서 스스로를 여성으로 규정하는 이성애자 사람
2. 나와 모국어가 같은 사람
... 생략 (일신론 기반의 신앙인이 아닌 사람)
12. 흰 바지를 입지 않는 사람
그리고 이 열두 문장은 예고될 수 없으며 호명될 뿐, 쉽게 말하면 전부 이루어진 것 같았으나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주인공은 흰 바지를 입지 않는 사람을 원했으나 아내는 주인공에게 흰 바지를 선물했다는 점을 통해 아내 또한 흰 바지를 즐겨 입는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일신론 기반의 신앙인이 아닌 사람을 원했으나 아내가 종교가 없다는 생각은 주인공 혼자 스스로 한 생각에 불과하며 유일신,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의 장소인 성당에 같이 가보자는 제안을 했다는 점, 결혼식을 성당에서 했다는 점을 통해 아내는 기독교를 믿는 신자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럼 2번 모국어가 같은 사람은 설명이 힘들지 않겠냐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녀를 처음 만난 날로 돌아가 보면 이 또한 재미있게 해석 가능하다.
[그는 지인의 동생의 지인의 전화번호를 받았고 간결한 메시지로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연말로 접어들 때라 예약은 쉽지 않았고 썩 내키지 않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택했다. 그는 테이블 위의 조화 장식이 탐탁지 않았으나 그녀는 명란과 시금치를 얹은 가지 요리가 맛있다고 말했다.]
해당 문장은 연말로 접어들 때라 예약이 쉽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택한 것이라고 읽힌다 하지만 연말로 접어들 때라 예약이 쉽지 않았지만 상대방을 위해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택한 것이라고 생각해 보면 다른 관점에서 이 상황을 해석해 볼 수 있다. 그녀가 이탈리아 사람이라면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마지막 1번 생물학적 여성이면서 스스로를 여성으로 규정하는 이성애자 사람… 만일 이 생각들이 맞다면 작가님이 책에 양성애자, 성 정체성과 관련된 힌트를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나도 이 해석에 확신을 가지고 있진 못한다.
하지만 이 해석이 맞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그날 밤 그가 생각했던 결정적인 열세 번째 조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그녀에게 청혼을 위한 준비를 하며 성당에서 숙소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전조등만 같던 그에게 전조등이 깨지게 되는 그 사건이 일어난다.
[그녀의 고개는 조수석 차창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얼굴의 사분의 일 정도가 보였다. 그때 퍽, 하고 작은 파열음이 들렸다. 그는 비교적 침착하게 차를 세우고 비상등을 켰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다 왔어?” 비상등 소리가 딸깍거릴 때마다 차 앞으로 몇 미터쯤의 도로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차 앞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는 왼쪽 전조등만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핸들에서 손을 놓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는 전조등이 나간 것 같다고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이십여 미터쯤 걸은 그가 발견한 것은 덩그러니 놓여 있는 신발 한쪽이었다. 그건 군청색 털 고무신이었다. 발목을 따라 짧은 털이 둘러져 있었다 쓰레기라고 하기에는 멀쩡했지만, 또 누가 신고 다니기에는 좀 낡아 보였다. 크기와 모양을 가늠해 볼 때 그것은 여성의 왼발용이었다. 그는 그 왼쪽 털 고무신과 오른쪽 전조등의 관계를 이해해보려고 했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오른쪽 신발도, 신발의 주인도, 어떤 다른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주인공은 자고 있는 아내를 보다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차로 박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신발 한쪽에 불과했고 어떤 다른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는 주인공이 말하는 왜곡된 기억일 뿐 이 부분에서 다시 첫 문장으로 되돌아가야지만 그 사건의 진실을 알 수 있다고 본다.
[한낮의 아스팔트 위에 죽은 것이 있었다. 검붉은 피가 엉겨 붙은 잿빛 털 뭉치, 얼마 전까지 작은 동물이었던 것의 잔해. 자세히 보기는 꺼림칙했다. 일곱 살의 그는 고개를 돌렸다. 작고 둥근 흙무덤을 잠시 상상했다. 만화에서는 그런 무덤 앞에 나뭇가지 두 개를 엮은 십자가가 으레 꽂혀 있었다. 곧 그는 더러운 것을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는 부모의 말을 떠올렸다.]
주인공은 아무것도 없었다며 그 사실을 왜곡하고 싶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신발의 주인인 여성이 검붉은 피를 흘리며 도로 위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는 고개를 돌렸고 그 시체를 외면했다. 하지만 그 장소에는 주인공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사고가 난 직후 아내는 그 사고의 현장을 보게 된다.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에서 내리려다가 다시 안으로 몸을 숙여 무언가를 찾는 그녀가 보였다. 그녀는 그의 재킷을 꺼내 원피스 위에 걸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후미등을 등진 그녀의 그림자가 아스팔트 위에 길게 드리워졌다]
[그녀는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다 “안에 있는 거, 꺼내봐.” 그녀가 “어, 음, 응” 같은 소리를 내며 반지함을 꺼내 들었다. 그를 보며 “설마?” 했고 그는 끄덕였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돼.” 그는 아득해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지. 나뭇잎 소리도, 풀벌레 소리도 멈춘 듯했다. 그녀가 반지함을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당신 손으로 줘야 해” 그녀에게서 반지함을 받아 들 때 그는 결정적인 열세 번째 조건이,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에 충족되었다고 느꼈다.]
여기서 반지함을 살인 사건이라고 생각해 보고 다시 한번 이 글을 읽어주길 바란다. 지금까지 따라와 주셨다면 나름 재미있는 해석이 가능하다. 사고 현장을 목격한 그녀는 주인공의 재킷 주머니에 있는 그의 핸드폰을 내밀며 당신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런 그녀를 보며 열세 번째 조건이 충족되었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 조건들은 하나같이 맞는 것이 없었기에
그 열세 번째 조건은 주인공이 항상 애타게 찾던 예쁘고 착하고 똑똑하고 재밌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 내용은 그 사고가 일어나기 전, 아내의 연극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녀는 ‘12인의 성난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열두 명의 배심원이 살인 사건의 판결을 두고 다투는 내용의 연극을 하였다.
[첫 번째 투표에서 열한 명의 배심원이 유죄에 손을 들었다. 나머지 한 명의 배심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였다. “저마저 손을 들면. 그 아이는 사형장으로 향하게 되겠지요” 그때 무대 위 그녀와 눈이 마주친 듯한 기분, 흥미로운 토론이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졌다. 마침내 열두 명의 배심원은 피고인이 무죄임에, 적어도 유죄라고 단정 지을 수 없음에 합의하였다.]
이 연극의 소년이 그랬던 것처럼 이 책의 주인공이 살인을 저질렀는지 정말 쓰러진 여성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진실은 그가 잊은 노트북 블랙박스에 저장되어 있을 것이고 행복한 가정의 사진을 찍으려던 아내가 깜빡한 무엇인가에 있을 것이다. 무엇이 되었든 그 진상은 적어도 유죄라고 단정 지을 수 없음은 확실하다. 그러기에 깨진 전조등과 같은 그가 할 일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그는 촛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손뼉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