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 군 제대 후 복학 전까지 나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이런 나의 처지를 잘 알던 2달 먼저 제대한 선임이 찾아와 인턴 자리 하나를 제안했다.
"외국계 HR 컨설팅 회사인데 얼마 전 처음 한국으로 들어와 영업을 준비하는 회사야."
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다음 해 3월까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돈이라도 벌 자라는 생각으로 그 제안을 잡았다.
그때 난 전혀 알지 못했다. 그때의 그 선택이 나의 인생 트랙을 완전히 바꾼 최대의 사건이라는 것을....
아니 어쩌면 이미 완성된 내 인생의 시나리오 하나의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게 맞다면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일 뿐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IMF의 후유증을 겪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새로운 정부 하에 IMF를 원활하게 극복하는 것처럼 보도하였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못했다. 많은 회사들이 IMF를 벗어난 이후에도 많은 인력들을 구조조정을 하고 있었다. 당시 날 인턴으로 채용한 회사는 이러한 고객사들의 인사담당자들과 협업하여 구조조정을 도와주고 이후 구조조정당한 인력들을 다시 재교육하여 새로운 회사로 취업을 하거나 창업을 도와주는 회사였다. 조지 클루니 주연의 영화 [인디 에어]에서의 조지 클루니가 소속된 회사라고 보면 된다.
당시 내 나이 24.
사회경험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대기업 금융계에서 구조조정을 당하여 커리어를 마무리한 50~60대 아버지 뻘이나 되는 퇴사자들에게 강의를 하게 되었다. 내가 맡은 강의는 윈도우, 싸이월드, 개인 블로그 만들기, 이메일 사용법 등 당시 내 나이에서는 쉽게 할 수 있었던 IT 강의였다.
난 강의를 하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강의를 수강하는 대부분의 퇴사자들은 이메일 계정 조차 만들 줄 몰랐다. 나름 70-80년대에 명문대를 나왔고 은행 지점장 또는 임윈까지 지내고 나오신 분들인데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IT 지식은커녕 원도우 사용법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약 30년간 한 회사에 있으면서 세상 밖의 변화를 알지 못한 것이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나에게 말했다.
"난 절대 퇴직하는 날이 오지 않을 줄 알았어. 마치 인간은 죽지만 자신만은 그 죽음을 피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는 것처럼 말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미리 준비할걸 그랬어. 60이 다되어 회사밖에 나오고 보니 마치 방금 30년의 형량을 마치고 감옥에서 출소한 죄수처럼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렇다. 이제 곧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그들은 회사에 재직했던 30년보다 더 긴 40년을 잘못하면 아무 일도 없는 백수로 지낼 수도 있는 것이다.물론 백수로 은퇴생활을 지내는 것도 좋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은퇴생활은 여유롭고 우아한 백수생활이지 국가 실버 채용이나 프랜차이즈 창업박람회를 기웃거리며 어쩔 수 없이 쫓기며 지내는 백수생활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대학도 졸업하지 않았던 나는 마치 30년 후의 나의 미래를 보는 것만 같았다.
4개월동안 인턴을 마치고 난 처음으로 하고 싶은 공부가 떠올랐다. 구체적이진 못했지만 내 머릿속에 몇 개의 단어가 맴돌았다.
'직장', '사람', '행복' 그리고 '인생'
난 이 키워드들을 다이어리에 적고 복학을 했다.
그리고 지체 없이 나의 길을 탐색하였다.
3년 뒤 난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그 회사에서 계약직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난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으로 유학을 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잠시만이라도 학비를 벌면서 경험을 쌓을 계획이었다. 운이 좋게도 다시 돌아간 회사는 규모가 꾀 성장해 있었다. 직원은 3배로 늘어 있었고 나를 관리하고 가르쳐줄 상사도 있었다.
나는 매우 운이 좋았다. 나의 상사는 사회 초년생인 나를 매우 자상하고 친절하게이끌어 주었다. 난 지금까지도 그렇게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마치 소설 속에서나 나올법한 무한 에너지 약을 삼킨 사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