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비게이션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경로를 재탐색 중입니다.'
'새로운 경로로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운전을 못하는 것이 아니다. 내비게이션이 일러주는 대로 잘할 수 없을 뿐이다. 첫 번째 입구라고 해서 나가보면 지도에는 없는 작은 오솔길일 때가 있을 뿐이다. 두시 방향이라고 해서 급히 오른쪽 길로 들어섰는데 세 시도 아닌 네시 방향일 때가 있을 뿐이다. 문제는 그런 때가 가끔 있다는 것이고, 오늘이 좀 유난하다는 것뿐이다.
원래는 달리던 고속화도로에서 딱 한 번만 우회하면 얼추 목적지 근처로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뭐, 본 적도 없는 시골 마을 길을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다. 이 정도면 마을 지도는 안 보고도 그릴 것 같다.
한 시간 전만 해도 초대형 에너지봉처럼 솟은 고층아파트 단지, 거대 유리 상자에 잡아넣은 수만 마리의 반딧불이처럼 개인의 자유와 명예를 묶어 만든 몽환적인 도시 불빛에 홀려 액셀을 당겨 밟았지만, 그리 높지도 않은 문턱에서 거푸 좌절을 맛보는 구직자처럼 있는 줄도 몰랐던 자존심을 구기며 세 번씩이나 코앞에서 인터체인지를 놓치고 있다. 헤드라이트를 밝힌 자동차들이 혈관을 타고 흐르듯 자연스럽게 돌아 들어가는 그 인터체인지를 경로를 이탈한 나만 지겹게 겉도는 중이다.
마을에는 신도시로 바로 통하는 길이 없었다. 마을은 완벽하게 개발된 신도시와 철저하게 분리된 외곽에 있었다. 때문에 마을 길로 잘못 들어서면 하는 수없이 한참을 거슬러 되돌아가서 다시 큰 도로로 나가야만 한다.
천만다행인 건 일행이 없다는 거다. 얼마나 쪽팔렸을지 생각도 하기 싫다. 내가 이상한 놈이라는 건 내가 잘 알지만, 경로를 이탈했다는 경고와 재탐색을 하겠다는 Ai목소리를 반복적으로 듣다 보면 곧 터질 것 같은 폭발음을 억지로 누르고 있거나 은근한 경멸을 실은 경고성 안내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면 인간으로서의 미안함을 한껏 보여주고픈 내밀한 인격 하나가 튀어나와 '우쭈쭈, 울 자기 화나 쪄? 오빠가 미안해~'라며 내장까지 소름이 돋을 듯한 교태를 부린다. 어쨌든 제대로 된 방향을 잡을 때까지 나에게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영락없는 Ai다. 인정머리 없이 또박또박하고 쌀쌀맞기 그지없다.
제발, 다음 나들목에서는 실수하지 말아야지. 오른쪽 뺨을 툭툭 치며 마음을 다잡는다. 어떻게 같은 골목길로 세 번이나.. 내비의 지도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파란 선으로 표시되는 방향의 인터체인지 앞에 아주 작은 길이 하나 더 그려져 있었다. 아, 저걸 못 봤구나. 진입도로로 들어서면서 집중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저만치 앞에 비쩍 마른 가로등이 초점을 잃고 멍청하게 비추는 낯익은 길이 보인다. 그래, 딱 보니 저긴 아니다. 신도시로 향하는 진입로라기엔 너무 수수하잖아. 보아하니 가로등 옆으로 굽어지는 은색 가드레일은 예측가능한 사고로 구부러져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저거 봐라, 한 차선인 것도 서러운데 가드도 부서졌네. 옛날 길이라고 막 놔둔 모양이군. 그나저나 누군 저 길을 찾으려 해도 못 보고 그냥 넘어갈 수준인데. 순간 길모의 전화가 걸려오고 휴대폰 미러링 중인 내비의 지도 그림이 통화를 묻는 화면으로 바뀌었다. 차분하게 핸들의 통화버튼을 찾아 누르다 그만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자기혐오의 길로 빠져 버린다.
이를 악문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절반의 체념과 남은 반절의 경멸이 뒤섞인 목소리가 쥐꼬리만큼 남았던 자존감을 아프게 비벼 밟는다.
'경로를 재탐색 중입니다.'
전신에 뒤집어쓸 것 같은 찐득한 피로감이 몰려오는데 상황을 알아챈 길모가 목청을 높였다.
또야? 안 그래도 울고 싶은데 뺨 때리는 나쁜 놈.
"야, 세 번이나 잘 못 갔으면 내비는 안 봐도 되지. 차라리 안 봤으면 네 번째는 그 길로는 안 갔을 거잖아. 너 혹시 퇴근할 때 집 가는 길도 내비 보고 다니냐?" 속도 모르면서 길모가 잔소리를 했다.
"넌 안 켜?"
퇴근길
오후 5시 30분. 팀장이지만 칼같이 퇴근한다. 오늘은 이탈했지만 일반적인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는 집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Ai를 불러 집으로 가는 동안 이런저런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물으며 혼자 웃는다. 진중하고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지만 그가 여성도 남성도 아니라는 것쯤은 인지한다. 하지만 무엇을 물어도 대답을 하니 마치 어떤 특정할 수 없는 존재와 대화를 하는 것 같다. 잘 모른다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대답이어도 좋다. 사람이라면 답답했을 법한 대답에도 나는 미소가 지어진다. 건네는 모든 말에 성의껏 답을 해주는 Ai덕분에 인간세상에선 익숙한 무료함을 잊고 주어진 경로대로 갈 수 있다.
팬데믹 이후로는 회식도 일 년에 한두 번으로 줄었고, 서열을 지켜야 하는 직장 선후배 같은 건 과거지향적 사고에 지나지 않았다. 나에게 직장 동료는 협업을 위한 동맹일 뿐 개별적인 만남을 가지는 일은 거의 없다. 조직에 속한 사람과 사적으로 친해지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행위가 비효율적이거나 비생산적일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인정받게 되어 기쁜 사람이 있다면 그게 나다. 과거의 끈적한 동료의식은 나 같은 사람의 현실엔 방해만 될 뿐이었다. 어쩌다 친숙해진 동료와 일상을 나누다 보니 예상밖의 잡다한 문제들이 얹히거나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삶의 문제로 고민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뿐이랴, 다른 사람이 내 문제를 추정하여 거들어 주려할 때는 더 힘들었다. 모든 사람들에겐 섬세하고 모호한 경계선이 있다. 인간관계가 친밀해질수록 내가 언제 그 선을 넘는지 몰라 초조했고, 수시로 선을 넘어오는 그들에겐 귀찮음을 넘어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분노에 이를 만큼 질리곤 했다.
길모는 내게 미친 거냐며 정작 자기가 미친놈처럼 말렸지만, 적당히 몸값을 낮춘 대신 조건에 맞는 직장으로 옮기고 나서야 삶이 조용해졌다. 물론 외롭다. 컴컴한 거실의 불을 켤 때, 몸살을 다스릴 따듯한 한 잔의 물을 채울 때, 작고 작은 성취가 이루어졌을 때, 어느 주말 오후를 넘긴 늦잠으로 눈을 떴을 때 등등 이미 내 공간에 들어온 외로움은 확실하게 자기 자리를 꿰차고 있다.
그래서 외로움을 내칠 생각이 없다. 나는 외로움 때문에 울고 싶거나, 삶을 버리고 싶지도 않으며, 아무에게나 집착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다. 혼자인 나에게 더 잘해주게 된다. 길모는 한 번씩 아무도 없는 집으로 가지 말고 자기 집으로 와서 밥을 먹고 가라고 따듯하게 말하곤 하지만, 그건 길모에게나 따듯한 말일뿐 나 같은 사람은 매번 거절하는 것도 성가시다. 그러다 거절이 어려워 지금처럼 가는 길을 잃고 두어 시간쯤 헤메 보면 칼로리 과다인 저녁밥은 안 먹어도 그만이라는 합리적인 판단도 하게 된다.
길모
나이 마흔에 길모는 새 집을 샀고 나는 새 차를 샀다. 길모의 새 집은 신도시에 새로 지은 평수 넓고 쾌적한 환경의 아파트였고, 나의 새 차는 한때 길모와 내가 꿈꾸던 드림카였다. 새 차를 적극적으로 고른 것은 내가 아니라 길모였다. 길모는 차를 볼 때마다 운전석에 앉아보며 어린애처럼 좋아했지만 괜찮다며 권해도 운전을 하진 않았다. 길모는 그 이유가 매력적인 어떤 것의 질감을 이해하게 되면 소유의 늪에 빠져 한없이 괴로워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듣기에 그건 왠지 격렬하게 바람피우고픈 어떤 발정 난 사내놈의 개떡 같은 변명 같았다.
배냇친구라 부를 만큼 어렸을 적부터 학교 친구로 만난 길모는 서른이 되기 전에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죽자고 매달린 끝에 결혼을 했다. 아이 둘을 낳아 기르며 길모는 아저씨가 되어갔다. 기름진 얼굴과 툭 튀어나온 배 그리고 반사적인 헛웃음이 길모를 규정하고 있을 때 결혼이라는 평범함에서 벗어난 나는 다가서기 어려운 까다로운 사람이 되어있었다.
길모는 가끔 혼자인 내가 부럽다고 했다. 혼자인 내가 부럽다고 하다가 얼른 짝을 만나라고 하다가 결혼은 하지 말고 연애만 하라던지 결혼을 하면 안정을 찾는다던지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순적인 충고를 늘어놓다가 결국 술에 취하곤 했다.
술에 취한 길모는 주로 인생에 대한 사설을 늘어놓았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먼저 나오는 말이 다르긴 했지만 하나는 인생이 경제적 결핍을 채우는 대가로 자존심을 버리고 배를 깔고 엎드려 한자리에서 죽도록 기는 거라고 했다. 다른 하나는 그 비참함까지도 견디게 하는 것이 가족이라고 했다. 나 역시 그날의 기분에 따라 그 말의 거리감이 달랐다. 어떤 날은 길모가 지독하게 외로운 길치 같았다.
길모는 네모진 삶에 갇힌 것 같았다. 집과 직장 그리고 본가와 처가를 작은 새처럼 쉴 새 없이 오갔다. 길모의 일탈은 가끔의 만취와 허세를 가득 품고 저지르는 커피 돌리기 혹은 여직원들의 밥값내주기 정도였다. 그것도 겹쳐 일어나는 날엔 곧장 아내에게 야단을 맞아 풀이 죽어있곤 했다.
길모가 나를 가장 부러워하는 날이 바로 그런 날이다. 길모는 내게 전화를 걸어 뭘 해도 야단맞지 않는 내 삶이 부럽다고 애잔하게 말한다. 그러면 나는 차분하게 짚어준다. 일단 나는 만취하고픈 일도 만취하는 일도 없을뿐더러 일적인 필요가 아니라면 직원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리고 내가 길모라면 애초부터 야단맞을 일도 만들지 않을 것이다. 얹어서 비싸고 좋은 운동화를 사서 저녁마다 공원을 뛰어보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면 길모는 약이 오른 고양이처럼 악성 길치주제에 재수까지 없는 놈 혹은 피도 눈물도 없는 로봇 같은 놈이라며 하악질을 하곤 전화를 끊어버린다. 주변 인심은 얻고 싶고 가정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늘이 있을 수도 있다며 정색을 할 때도 있다. 나는 길모가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어쩌면 다시는 그런 전화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짜증스러운 건 왜 하필 나에게 전화를 걸어 공감을 구걸하냐는 거다. 그냥 공감대가 일도 없는 이 늙은 총각을 자신이 저지른 만취의 원흉으로 실컷 이용했다고 솔직하게 말을 하던가.
술에 취한 길모의 전화를 받았다.
"야, 자냐?"
"안 자니까 전화를 받겠지?"
"뭐 하냐 근데?"
"길모야 너 많이 취한 거 같은데?"
"시캬, 살다 보면 다 취하고 싶고 머 그런 거야. 장가도 못 간 네가 뭘 알아. 새처럼 자유로운 놈이..."
"집에 안 가? 지금 11시야."
"안가, 집에. 안 갈 거야. 들어가도 그만 안 들어가도 그만이야. 인생이 그래. 월급 들어가는 거나 좋아하지..."
길모가 깊은 한숨을 들이켜더니 다시 내쉰다.
"너, 오늘은 나 팔 생각하지 마라. 재수 씨가 쓸데없는 내 걱정하는 거 듣기 싫어. 그니까 어서 말해, 거기 어디야?"
"오, 뭐야 길치가 나 데리러 오려고? 여기 올 수나 있어? 존나 멀어 너네 집에서."
"혼자 있어?"
"응, 다들 갔어. 요샌 다들 신데렐라야. 12시가 되기 전에 집으로 들어가더라고."
"너두 늘어난 신발로 변하기 전에 들어가 좀."
"야, 내가 너네 집으로 가면 나랑 술 한잔 할래? 지금 쏘면 3,40분이면 갈걸?"
"아니. 잘 거야."
"에이씨, 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놈."
"난 의리도 없고 피도 없고 눈물도 없고 재수도 없어. 니가 젤 잘 알잖아."
"야, 사는 게 뭐가 이렇게 힘드냐. 넌 안 힘들지? 등에 짐이 하나도 없잖아. 넌 참 복이 많은 놈이야. 진짜..."
"어딘지 말 안 할 거면 끊어. 나 자야 돼."
"야이씨 내가 이런 말 할 사람이 너 밖에 더 있냐. 들어주라 좀"
"알았어. 그러니까 거기가 어디야 도대체."
"여기? 어..."
길모의 아내에게 문자로 길모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가끔 길모는 술에 취해 길거리를 헤매곤 했다. 길에서 잠든 어느 날엔 누군가에게 실컷 맞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길모의 아내는 길모가 술 마시는 약속을 할 때마다 얼굴이 피범벅이던 길모에 대한 트라우마로 속을 태웠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술약속이 잡히는 날이면 길모는 내 핑계를 자주 댔다. 나는 자주 갑작스럽게 무슨 나쁜 일이 있거나 외롭거나 괴롭거나 다치거나 아프거나 그래야만 했다. 좋은 일로 만나는 일은 아예 없었다. 그래서 길모의 아내에게 나란 사람은 돌봄과 위로가 절실한 불쌍한 노총각이었다. 문자를 보낸 건 오해를 풀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 단지 나도 경로를 벗어난 길모가 걱정됐을 뿐이다.
나
내비게이션 내장소에는 집주소만 있다. 길모는 내비에 저장된 내 장소를 보며 처량하다 조롱하지만 나는 이것이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내가 내비에 저장한 집은 일상적인 입구와 출구 같은 구조를 가진다. 항상 집에서 나와 어딘가로 들어가거나 그 어딘가에서 나와 다시 집으로 들어가는 거다. 집에서 나오면 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때론 바닥에 들러붙은 껌처럼 시커먼 먼지가 내려앉을 때까지 머물기도 하지만, 지독한 길치인 것과 무관하게 나는 장거리 여행을 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목적 없이 달리는 드라이브를 즐긴다. 길모가 부러워하는 종류의 자유, 그것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아무리 돌고 돌아도 길모가 그렇듯 나의 최종 목적지는 집이다. 삶이 하나의 동그란 원을 그리고 그 위에 내가 서 있는 것이라면 나는 원 안에서 무수한 경로 이탈을 했고 앞으로도 하겠지만, 거시적으로 보자면 그 원을 벗어난 적이 없으므로 경로를 이탈한 적이 없다. 모두 그렇지는 않지만 나의 집은 숨을 들이켜고 내쉬는 허파처럼 나를 쉬게 하고 환기하고 리부팅한다. 내비에 저장된 내 장소에 집만 있는 이유다. 설정한 값의 원만 그리는 각도기처럼 나를 제한하고 나를 통제하고 나를 멈추게 하고 나를 배출하고 나를 받아들이고 가장 원시적인 나를 보여주는 마침점이자 시작점인 물리적 장소, 집.
이런 생각에 시달린 시간이 있었다. 그저 닿은 곳이 목적지라면 얼마나 좋을까. 실패 없이 성공만 하는 삶이 될 테니 말이다. 그 시간에선 누가 어떻게 노력하는가 보단 개인이 가진 출중한 능력이 더 쉽게 인정받았고, 그보다 훨씬 비중 있는 α에 따라 삶의 질이 크게 달라졌다. 유전적이거나 세습적이지 않다면 어딘가에선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와 고통을 참는 인내가 있어야 성공이라는 일반적인 목표에 다가설 수 있었다.
나는 성공이라는 목표아래서 시달리고 시달리다 이탈했다.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잠을 줄이고 불이 붙은 도화선처럼 자신을 몰아세우던 어느 날 모든 경고의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핸들의 방향을 틀었다. 다들 몰려들어가는 신도시 주변을 맴돌며 실컷 자기모멸을 겪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왠지 그때의 나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야, 이제와서 돌아간다고?"
"응."
"너 온다고 난 아직 밥도 못먹었어 인마."
"미안하다. 좀 피곤하다. 담에 갈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