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까마귀는 전생을 기억한다. 그들이 살던 마을과 어머니들 그리고 아내들 자식들에 대한 모든 기억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수세기동안 까마귀가 어둠의 존재로 여겨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생을 기억하는 그들을 사람과 가까이두면 여러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그들에겐 복수와 사랑 같은 문제에 대한 한풀이였지만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산으로 산꼭대기로 쫓아버렸다. 어쩌다 산아래로 내려오는 까마귀는 돌팔매를 맞거나 덫에 걸려 도살당한 채 높은 가지에 무더기로 걸리곤 했다.
까마귀는 점점 불운의 상징이 되어갔다. 사람들은 그들을 지옥의 사자라거나 악마의 심부름꾼 마녀의 종자라 부르며 온갖 추잡스러운 일을 꾸미는 존재로 만든 이야기를 세상에 퍼뜨렸다. 까마귀들은 사랑하던 이들 곁으로 다가갈 수 없었고, 지독한 고통을 안겨준 이들의 머리에 똥을 싸거나 죽은 쥐들을 던지는 소소한 복수조차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깊은 산속, 어두운 골짜기, 사람이 살기 어려운 춥고 높은 곳으로 흩어졌다. 한때는 하늘을 덮을 만큼 컸던 무리들도 겨우 수십 마리의 무리만 유지하며 사람들의 눈을 피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까마귀를 바라보는 불안한 시선은 바뀌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까마귀는 사냥감으로도 삼기 싫은 그저 기분 나쁜 어떤 존재에 지나지 않았고, 까마귀들에게 사람은 전생의 삶도 모르면서 함부로 까부는 그런 구제불능에 지나지 않았다. 하늘을 나는 까마귀를 보면 사람들은 마른침을 뱉었고 사람만 보이면 까마귀들은 서둘러 산꼭대기 저편으로 날아가 사라졌다. 그렇게 서로 터부시되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까마귀들 사이에서도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다만 사람들은 일어난 이야기에 살을 붙여 더 무섭거나 더 아름답거나 더 슬프게 만드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이야기들이 마법이나 마술 혹은 요술, 변신술 같은 것들로 화려하게 채워졌지만, 까마귀들의 이야기는 전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까마귀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모아 전하며 전설이라 불렀다. 물론 마을에서 멀어질수록 새로운 전설은 거의 생겨나지 않게 되었지만, 모든 인간이 그렇듯 사연 없이 태어나는 까마귀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그러다 한 까마귀가 태어났다.
까마귀는 밤에만 마을로 내려가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의 집 근처 가장 높은 전나무 꼭대기 가지에 앉아 매일 같이 슬피 울었다. 처음엔 파자마를 입은 한 사내가 나와 나뭇가지 사이로 불을 비추며 그를 찾았다. 하지만 까마귀가 번뜩이는 노란 눈을 감으면 사내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사내는 이따금 나무를 향해 새총 같은 것을 쏘거나 돌을 던졌다. 독을 바른 고기를 잘라다 나무마다 걸어 덫을 놓기도 했다. 하다 하다 마당 밖 높은 나무를 울며 베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여인이 나타나 그의 땀과 눈물을 닦아주며 그냥 놓아두자고 하자 그는 대꾸도 하지 않고 부질없어 보이는 사냥을 포기했다.
그녀의 이름은 이브였다. 이브는 두 아들을 낳은 어머니가 되어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남편은 다름 아닌 그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자 친형인 카인이었다. 전생의 전생과 그 전생에서도 이브는 그의 아내였다. 그의 형으로 태어난 카인은 이브를 짝사랑하며 따라다니던 그녀의 사촌, 머슴 혹은 마을에서 가장 돈이 많은 추잡스러운 노인네였다. 그러나 모든 삶에서 이브의 선택은 언제나 그였고, 흔들림이라곤 없었다. 그가 앞선 죽음이 되기 전에도 이브는 그의 약혼녀였다.
카인은 열정적인 기자였고 자랑스러운 형이었다. 카인은 내전 중인 외국에서 목숨을 걸고 취재하다 팔과 다리에 총상을 입고 영웅이 되어 귀국했다. 형이 다친 몸으로 귀국하던 날 그는 이브와 함께 형을 마중 나갔다. 이브는 다친 형을 보더니 어쩔 줄을 몰라했다. 형은 그런 이브가 여동생처럼 귀엽고 사랑스럽다며 웃었다.
동생은 도시재생전문가로서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아이들을 많이 낳아 작은 학교처럼 만들 거라며 뼛속까지 비혼주의자였던 카인을 웃음 짓게 하곤 했다. 넓은 마당 바깥으로는 키 큰 나무가 많아 공기도 맑고 자연방풍도 되는 곳에서 매일 캠핑을 나온 것처럼 아이들과 더불어 자연과 함께 하겠다고 했다. 형제는 꿈을 나누고 현실을 보듬으며 서로를 아꼈다. 카인이 동생을 위해 할 수 없는 일은 없었고, 동생이 형을 위해 버릴 수 없는 것도 없었다. 그들은 그럴 줄 알았다.
동생은 신문사가 기획한 성대한 환영 파티에서 잔뜩 취한 카인을 트럭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술에 취해 잠들었던 카인이 몸서리를 치며 눈을 뜨더니 갑자기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총성이 난무한 전쟁터에 있는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피하라는 둥 숨으라는 둥 깁스가 풀리지 않은 팔을 제멋대로 휘두르다 순식간에 주먹으로 동생의 얼굴을 치고 핸들을 자기 쪽으로 힘껏 돌려버렸다. 하필 갓길로 차를 세우려던 동생만 정신을 잃고 남의 집 담벼락 모서리를 정면으로 들이받으며 상체가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가 생사를 오가는 수술을 하는 동안 이브가 달려왔고 카인의 탓인 줄도 모르고 동생의 죽음을 괴로워하는 형을 부둥켜안았다.
그가 까마귀로 나서 이브를 찾아 헤매는 동안 카인은 이브와 결혼을 하고 그의 전 재산까지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가 이브와 살고자 했던 조용한 마을에 그가 지으려 했던 아담한 집을 지었다. 집 주변으로는 동생이 심어놓은 나무들이 벌써 높게 자라 있었다. 집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지인들은 한 번씩 수군거렸다. 이브는 영리하게 선택했고, 카인은 기막히게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이브의 어쩔 수 없는 선택과 달리 카인이 운이 좋은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팔과 다리에 총을 맞고도 영웅으로 거듭났고, 동생이 죽어나간 사고에서도 혼자 살아 동생이 이룬 모든 삶을 상속받았고, 냉소적인 비혼주의자에서 아름다운 아내와 아들을 얻어 따듯한 가족을 이루었으니까 말이다. 거기다 카인은 자신의 경험을 풀어낸 칼럼을 쓰다 책으로 펴내며 큰 성공까지 거두었다. 그덕에 얼마든지 더 크고 좋은 집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카인은 웬일인지 까마귀의 울음이 멈추지 않는 그 집에서 이브와 평생 함께 하기를 바랐다.
그녀를 놓치고 전생의 모든 기억을 품은 까마귀로 태어난 그는 이전 생에서 다하지 못한 50년의 수명을 까마귀로 살아가야 하는 처지였다. 신은 이것이 벌이 아니라 다음 생으로 가기 위한 잠시의 기다림이라 위로했지만 그의 처지와 비슷한 까마귀들은 하나같이 괴로웠다. 그들 중에는 99년을 까마귀로 살다 갔거나, 일부러 사람들에게 잡혀 죽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다 간 까마귀도 있었고, 사랑하는 아들을 찾아 머나먼 외국의 땅까지 다섯 번이나 쫓아 날아 간 까마귀도 있었다. 복수를 위해 사람들에게 해코지하려는 까마귀는 셀 수 없이 많았다. 대부분은 경미한 테러로 끝나지만 어떤 까마귀는 복수를 위해 자신의 날개 끝에 불씨를 달고 원수의 집으로 달려들었다가 복수와 상관없는 어린아이들을 죽게 하고 말았다. 신은 그의 영혼을 형벌의 모과나무 가지 끝에 있는 영원히 익지도 썩지도 떨어지지도 않는 정지된 시간의 열매에 묶었다. 그는 두 아이들이 까마귀로 살아야 할 시간 동안 지상의 어떤 새도 다가서지 않을 고독한 푸른 모과로 가지에 매달린 채 162번의 더위와 163번의 추위를 견뎌야 했다. 모과에서 벗어나더라도 그는 다시 까마귀로 남은 시간을 채워야 했다.
15년. 까마귀는 이브를 바라보며 15년을 울었다. 이브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100년이라도 더 까마귀로 살 수 있기에 사실 그의 가장 깊은 원망은 이브의 배신에 있지 않았다. 자신을 죽게 하고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은 오히려 자신이 일군 모두를 차지한 형을 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이브를. 형과 이브의 결혼은 산채로 묶여 심장을 뜯기는 처참한 배신 같았다. 오직 형만은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이브에 대한 사랑은 다음 생에 약속된 보답으로 여겨지면서 괴로움이 덜어졌다. 그러나 카인을 향한 분노의 마음은 언제 그 뼈아픈 복수를 어떻게 이루어낼까를 계획하면서부터 점점 까마귀로서 남은 시간을 가득 채우는 동시에 쫓기는 초침처럼 조급해지고 있었다. 그가 우는 까마귀의 울음소리는 그리움으로 가득한 애절함에서 점점 끓어오르는 분노의 소리로 거칠고 사납게 변해갔다.
형벌을 감수하고라도 아이들을 죽여버릴까.. 아니다, 물론 놈은 고통스럽겠지만 그러면 이브가 나를 미워하게 될 거야. 게다가 자칫 실패하면 저들이야말로 포악한 성체로 자라 세상 모든 까마귀를 잡아 죽이는 사냥꾼이 되겠지. 그건 나 자신과 더불어 다음 생을 기다리는 형제들에게도 못할 짓이 될 거야.
이브를… 아니, 안된다. 이브야말로 일말의 죄가 없는 순수한 영혼이야. 나는 그녀를 지켜야만 해.
아무래도 카인을 직접 죽이는 게 좋겠지. 다만 쉽게 끝내면 안 돼. 끝까지 고통스럽게 해야 해. 만약에라도 그가 쉽게 죽어버리면 그것이야말로 싱거운 복수가 되고 말 거야. 까마귀의 전설에 오르내리는 반드시 그런 복수라야 해. 나는 그럴 자격이 있어. 난 다 기억하니까. 그래, 그냥은 죽게 하지 않을 테다.
완벽한 복수의 순간을 꿈꾸며 다시 20년이 지났다. 까마귀는 끝이 하늘에 닿을 듯 더 높아진 나무 꼭대기에 앉아 매일같이 음울하게 울었지만 그의 울음은 나무 위 하늘에서만 빙빙 맴돌았고, 나무아래로는 먼 산의 메아리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이브는 한 아들이 병으로 죽은 후 그의 어린 딸을 맡아 키우는 할머니가 되었다. 이브는 손녀를 돌보는 일에 신경 쓰느라 다행히 아들을 잃은 슬픔을 잊어갔다. 카인은 어느 밤 집으로 돌아오던 중 노화로 무너지는 교각에서 차량과 함께 떨어지는 큰 사고를 당했지만 역시나 불사조처럼 살아 다리만 조금 절게 되었다. 그 덕분에 카인은 이브의 자상한 보살핌을 더 많이 받았다.
이브의 손녀는 이브와 판박이처럼 닮아있는 다섯 살이었다. 손녀는 까마귀가 우는 시간이면 한밤중인데도 마당에 나와 그 울음소리에 답을 하려는 듯 따라 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찌나 기가 막히게 흉내를 잘 내던지 소녀가 궁금해진 까마귀가 하루는 나무 아래로 내려와 삭은 울타리에 앉았다. 그리고 까마귀 울음을 흉내 내며 조용히 눈물 흘리는 어린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소녀는 어느새 열 살이 되었고, 까마귀는 길들여진 앵무새처럼 소녀의 어깨나 머리 또는 팔뚝에 앉아 이브의 집 마당과 부엌을 들락거리게 되었다.
이브는 까마귀가 불길하다며 피했고 카인은 신기하다며 빵이나 생소고기 혹은 감자칩 같은 것을 자주 집어주곤 했다. 까마귀는 그렇게 그들의 삶 귀퉁이에서 십수 년을 함께 보냈다. 그는 그동안 차가운 이브의 곁에서 자신을 까마귀로 사랑해 주는 소녀와 함께 안전하고 따듯하고 굶주리지 않았다. 사실 그는 조금 행복하기도 했다.
소녀가 스무 살이 되고 이브의 집에서 떠나게 되었을 때 그제야 까마귀는 정신을 차렸다. 까마귀의 머리에도 희끗한 털이 몇 가닥 나 있었고 이브는 어느새 풍성한 백발이었다. 얼마 전부터 카인은 아침이면 침대에서 스스로 일어나 나오지도 못할 만큼 부쩍 쇠약해져 있었다.
까마귀의 시계도 카인의 시계도 어쩌면 이브의 시계도 그리 멀지 않은 시간 안에 멈춰 서게 될 것이었다. 까마귀는 가련한 소녀를 생각해 복수를 늦추었지만 소녀가 떠나면 곧바로 카인에게 달려들어 그의 눈을 파버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허파와 간, 심장을 차례로 공략할 계획이었다. 영혼에도 같은 상처가 남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까마귀에 의해 신체가 훼손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특히 이브가 그랬다. 이브는 그들이 함께 하는 동안에도 가느다란 실눈으로 까마귀를 의심스럽게 바라보거나 틈나는 대로 가족들 곁에서 까마귀를 밖으로 내모는 역할에 충실했다.
소녀가 떠나기로 한 날 아침 다소 흥분한 까마귀는 부산스럽게 퍼덕거렸고 오랜만에 목청을 다듬으며 꺽꺽거리거나 우르륵우르륵 까악 까악 소리를 내었다. 준비운동이라도 하듯 새삼 부리를 딱딱 치기도 했다. 카인과 함께 소녀를 공항까지 배웅하려던 이브는 몹시 심란해져서 카인에게는 집에 있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하고 까마귀는 긴 빗자루를 흔들며 집밖으로 내몰았다.
이브가 소녀와 떠나자 까마귀는 카인의 닫힌 방 창문에 앉아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늙은 카인을 노려보았다. 카인은 까마귀에게서 시선을 돌려 책을 보는척했지만 오래지 않아 체념한 듯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침대에서 힘겹게 내려와 창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카인은 이브가 간식으로 준비해 두고 간 차를 마시며 까마귀에게는 이브가 구운 무화과 스콘을 차받침용 접시에 잘게 부수어 담아 주었다.
카인이 침대에 기대앉길 기다리다 천천히 창문 안으로 들어선 까마귀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노란 눈을 번뜩이며 부서진 스콘을 밟고 지나 카인에게 달려들었다.
언제부턴가 카인은 알고 있었다. 손녀가 데리고 들어온 까마귀는 카인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고, 한사코 거리를 두는 이브에게서 아련하게 슬픈 눈을 돌리지 않았다. 카인은 까마귀가 전생의 기억을 안고 태어난다는 속설을 믿지 않았지만 손녀의 까마귀가 예사롭지 않다고는 느꼈다. 카인이 확실하게 동생을 알아본 날은 손녀가 두 손으로 까마귀의 등을 잡고 우승트로피처럼 머리 위로 들어 올렸을 때였다. 배가 뒤집힌 까마귀가 잔뜩 오므린 발가락을 신경질적으로 활짝 폈을 때 까마귀의 발바닥 한가운데는 아이가 붙여놓은 스티커처럼 1센트짜리 동전보다 좀 더 작은 동그란 붉은 점이 있었다. 솜털이 보송한 아기였던 동생의 보드라운 발바닥 한가운데도 그 이질적인 점이 있었다. 스무 살을 갓 넘어서도 실핏줄이 보일 만큼 하얗고 납작 빵처럼 도톰했던 동생의 발바닥에는 낙인의 흔적 같이 또렷한 붉은 점이 있었다. 카인이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주검에서도 새하얀 시트 아래로 노출된 맨발에 깊게 베어 뭉그러진 붉은 점이 비겁한 그를 원망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브가 집에 돌아왔을 때 카인은 두 눈이 파이고 가슴과 옆구리에는 수없이 찔린 상처로 피범벅이었다. 카인의 두 팔은 마치 소중하게 안은 것처럼 죽은 까마귀를 감쌌고 카인의 살과 피가 발라져 흐르는 까마귀의 부리는 심하게 부러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인과 까마귀는 평화롭게 잠든 것 같았다.
이브는 비명을 지르며 카인의 팔에 감싸인 까마귀를 떼어내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그마저도 성에 차지 않아 나중에는 까마귀의 모든 형체가 짓이겨질 때까지 밟고 또 밟았다. 이브에게는 붉은 점도 아무 의미가 아니었다. 이브에게는 오직 두 눈을 잃은 카인이 천국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고, 간을 잃은 카인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고, 심장을 잃은 카인이 모든 사랑을 잊고 방황하게 되리라는 믿음만 남아 끝없이 가슴만 찢어질 뿐이었다.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할 카인이었기에. 이브는 미친 듯이 까마귀와 신을 저주하다 정신을 잃었다.
마침내 까마귀는 자신의 시계에 딱 맞추어 결코 평온하지 못할 원수의 죽음으로 완벽한 복수를 이룬 까마귀들의 또 다른 전설이 되었다.
환생을 앞둔 그에게 다가와 신이 속삭였다.
누가 진짜였을까?
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 내가 사람을 흙으로 빚어 구웠지. 정말 공을 들였다네. 처음 그들은 완벽했어. 영혼의 숨을 불어넣기 전에 내가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를 걸세. 그들은 말 그대로 순수하고 거짓 없고 사랑스럽고 몇백 년을 살아도 거뜬할 정도로 건강했지. 그래, 그들은 몇 알의 열매와 물만으로도 살 수 있었고 굶주림을 전혀 알지 못했어.
우주에 걸어둔 셀 수 없는 별들 중에 특히 아름다운 지구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지. 그때만 해도 지구상 어디에도 어떤 생물에도 오염이라고는 없었네. 그 안에 아담과 이브라는 작고 작은 사람 둘을 만들어 넣어두었을 뿐인데. 그들이 그토록 번성해서 굶주리고 싸우고 지구를 망가뜨릴 줄을 누가 알았겠나. 맹세코 나도 예상치 못한 일이야.
하지만 흥미롭더군. 처음엔 굶주리는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짐승을 사냥하더니 다음엔 먹을 걸 가진 이웃을 공격해 빼앗았지. 그러더니 자식이 많아질수록 더 큰 무리가 되고 더 강한 무리가 된다는 것을 터득했어. 그리곤 그토록 많은 왕이 나왔지. 왕이 많아질수록 전쟁과 고아, 기근이 훨씬 더 많아졌지만 어찌 된 일인지 사람들은 왕에게 충성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더군. 진짜 왕은 여기 있는데 말이야.
아주 복잡해지기 시작했지. 애초에 내가 사람에게 심어둔 가장 원초적인 감정은 순수한 사랑 하나였네. 단순하기 그지없는 서로에 대한 사랑이었는데 인간들이 번성하면서 마치 하나의 심장에서 나왔어도 가는 방향이 다른 혈관들처럼 다양해지기 시작했어. 모성애, 부성애, 이성애, 동성애, 동지애, 우애, 우정, 나라 사랑, 이웃 사랑, 동물 사랑, 곤충 사랑, 자동차 사랑, 애착 인형 별의별 이름이 다 붙여지더군.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일일이 다 붙일 수 있는 것이 사랑이었어.
이성 간의 사랑은 머리가 아플 정도였네. 도대체 뭘 원하는지 여전히 모르겠어. 왕들의 전쟁보다 더 심각한 것이 사랑싸움이란 생각이 들었네. 그런 사랑에서 입은 상처는 회복도 어려웠지. 틀어진 사랑은 질투나 분노 혹은 집착이 되기도 하고 전쟁의 빌미가 될 때도 있었네. 사람들은 사랑을 위해 산다고들 하지만 정작 서로를 믿지 않았지. 사랑은 그들이 밟고 선 대지처럼 굳은 믿음 위에 있는데 말이야. 아무튼 나는 자네가 나아갈 저 세상에는 그 사랑이 참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말해두고 싶을 뿐이야.
혹시 사랑하지 않으면 멸망하리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아마도 그 말은 사실일 거야. 사랑을 잃으면 삶의 의미도 없어지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네가 나아갈 저기 저 사람들, 저들은 그 소중한 사랑을 순간의 어리석음으로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네. 알량한 믿음도 없으면서 사랑하는 마음 위로 이기적인 갈망을 먼저 덮어씌우거나 모자란 자신을 비추며 왜곡하곤 하지. 바로 자네처럼.
그렇다고 나를 비난하진 말게. 내가 손을 놓고 있던 것이 아니니까. 알다시피 나는 아들을 보내지 않았나. 서로 사랑하라고 아들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걸세. 그러나 아들의 바람처럼 내 이름만 부른다고 모든 영혼을 천국으로 데려올 순 없었지. 삶이 지저분하면 영혼도 지저분한 법이라 그런 것들은 불결해서 난 용납이 안되거든.
나는 지옥을 만들진 않았네. 다만 구원받은 영혼들이 모여사는 천국의 별을 만들었을 뿐이야. 그곳으로 가지 못하는 영혼은 세상을 떠돌다 소멸하지. 나쁜 기운으로 떠돌거나 음산한 기운으로 떠돌거나 어디에나 잘 들러붙기도 하지만 내가 돌보지 않으면 결국 사라진다네. 다 내 손 안에서 시작된 일이기 때문이야.
그래도 어쩌겠나 하나뿐인 아들이 그토록 가슴 아파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여러 생을 살아보는 환생을 생각해 냈네. 뭐 여러 생을 거치다 보면 정말 구원받을 만큼 좋은 삶을 살다 올 수도 있지 않겠나 생각한 거지. 그러다 까마귀도 만들었네. 까마귀는 영혼의 보자기일세. 운명적인 수명을 다 살지 못하고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억울한 영혼을 까마귀에 담아두었다가 수명을 채우는 시간이 다하면 다시 환생을 시키는 거야. 기회를 주는 것이라네. 그것도 아주 여러 번. 게다가 다시 태어나면 까마귀로 알았던 전생의 기억들과 그동안 까마귀의 눈으로 본 것들은 기억할 수 없지만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알아보게 되지. 내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기억하게. 아무튼 그렇게라도 사랑하는 이를 찾으면 모든 게 참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명심해야 할 것이 있었지. 여러 생을 거쳐서 오직 한 사람을 찾다 보면 그 사랑이 너무 당연하고 익숙해서 껍데기만 보고 깜빡 속을 수가 있거든. 잘 보아야 해. 모든 사람에게는 표식이 있는데, 얼굴이나 몸 안에 난 작은 점, 큰 점, 날 때부터 가진 흉터, 비뚤어진 눈썹, 튀어나온 광대 유난히 작은 새끼발가락 같은 것들이지. 자연의 어떤 생명체도 똑같이 생긴 개체가 없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 정말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네.
아무튼 대부분 사람들의 눈에는 하도 평범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만 사랑을 알아보는 이에게는 매우 특별해 보이는 것들이야. 분명 자네에게도 있을 걸세. 그런 것들은 한번 보고 나면 잊을 수가 없지. 그런데도 이런 디테일을 무시하고 그저 웃는 모습이나 다정한 목소리에 빠져 엄한 데를 헤매기도 하더라고.
아담, 혹시 자네는 이브가 가진 표식을 기억하나?
이브는 아담을 사랑했네. 이브는 단 한 번도 아담을 몰라본 적이 없었어. 그리고 항상 이브가 아담을 먼저 찾았지. 이브도 까마귀로서의 시간을 충분히 가졌으니까. 이브는 아담의 발바닥에 있는 표식을 결코 잊지 않았다네. 하지만 아담은 그저 저녁마다 주어진 사과처럼 이브가 주는 사랑을 우걱우걱 받아 씹어먹을 줄만 알았지. 잘 생각해 보게. 그런 이브가 왜 카인을 선택했을까.
카인은 이브를 정말 사랑했지. 카인은 이브를 만나고 단 한 번도 이브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네. 그것이 진짜 문제가 되었지. 전전생에서는 그가 아담을 해쳤고, 전생에서는 아담이 그를 해쳤네. 이번생에서는 카인이 아담을 해쳤다고 생각하겠지? 까마귀는 복수를 위한 도구가 아니지만 복수를 한다고 해서 내가 특별히 벌을 주진 않을 거야. 다른 무고한 희생자만 없다면 상관없거든. 명백한 건 카인이 자네를 억울하게 만들었으니 까마귀의 전설 입네 어쩌네를 가지고 자네를 탓하진 않을 거란 말이야. 하지만 아담, 자넨 껍데기에 씌인 진실을 바로 보지 못했다네.
그저 지금 내가 궁금한 건 자네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이 무한에 빠진 사랑싸움을 끝낸 것인가? 하는 것일세. 카인과 이브는 같은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갔지만, 사실 카인은 이브였고 이브가 카인이었네. 자네는 달라진 이브를 끝내 알아보지 못했어. 그리고 이브의 끔찍한 실수를 더 끔찍한 복수로 갚았지. 이제 아담을 사랑했던 이브는 까마귀로도 나지 못하고 천국의 별에도 가지 못하고 머지않아 소멸하게 될 거야. 저런 영혼의 상처로는 까마귀로도 잉태될 수 없고, 천국으로 들이기엔 또 너무 너덜거리다 보니 어쩔 수가 없네. 하지만 걱정 말게, 자네와 카인은 결국 구원받게 되니까. 다음 생에는 서로를 죽일 이유가 전혀 없잖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