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반의 이야기다.
나는 오래도록 어머니의 젖을 떼지 못하는 온 동네 소문난 아이였다. 어머니의 젖이 몹시 필요한 아기였을 땐 아버지나 열 살 터울 진 언니의 등에 업혀 물질을 나간 어머니를 찾았고, 스스로 잘 걷는 어린아이가 되어서는 혼자서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
대여섯 어린 걸음으로 부지런히 걷노라면 집에서 20분쯤 걸리는 불턱(현재 탈의장의 옛 이름)에 갈 수 있었다. 어리다고 말할 수 있는 모든 절기의 시간 동안 나는 불턱에 가서 노는 일이 많았고, 그렇게 물질을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다 함께 돌아오는 길이 언제나 좋았다.
불턱의 작은 입구에 앉아 어머니를 기다리는 일은 심심하지 않았다. 갯바위를 지나 나에게 날아오는 바람은 그날그날이 달라서 어느 날은 거칠고, 어느 날은 보드라웠다가, 또 어느 날은 비린 갯내음을 달고 썩은 고기처럼 다가오거나, 어느 날은 막 베인 풀 위를 지나온 것처럼 싱싱한 바다 향을 실어오기도 했다. 마치 ‘오늘은 말이야’하고 시작하는 친구의 목소리처럼 나는 바람에 실리는 갯내음으로 바다를 알았고, 바람이 몰고 오는 파도의 소리와 크기로 어머니의 귀환을 가늠했다.
잉태된 순간부터 어머니와 함께였던 바다에 대한 나이 이해는 본능에 가까웠다. 소소한 물결이 이는 바다는 장난스러운 아이처럼 친근했지만, 말없이 잔잔한 바다가 오히려 무서웠다. 잔잔하다 못해 허공의 무게감이 느껴지던 수면 위로 어머니와 삼춘들의 숨비소리가 교차로 들리면 어머니를 기다리던 어린 내 가슴에도 애매한 불안감이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2. 숨비소리
어머니의 숨비소리는 숨을 베어내는 소리였다. 풀을 베거나 나락을 베는 일처럼 숨을 베어냈다는 말이다. 어머니는 잠수를 위해 몰아 들이켰던 큰 숨을 다시 지상으로 끌고 올라와 보이지 않는 긴 나락처럼 차곡차곡 베어 삶의 경계인 수면 위로 뱉고 또 뱉어내는 그런 고단한 삶을 살았다. 모든 해녀들이 그랬듯이.
불턱에 살다시피 한 내가 혹시라도 해녀일을 하겠다고 나설 것 같았는지 어머니는 철이 들어가는 나를 보며 물질은 반드시 스무 살 이전에 시작해야 한다는 생뚱한 말을 자주 했다. 그리고 그 말의 끝으로 갈수록 만약 해녀가 되고 싶다면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폐활량이 기형적으로 늘어서 더 큰 숨을 몰아 담을 수 있고, 그래야 더 많은 물건을 걷어 올려서 돈을 벌게 되는 거라며 나는 이미 시기를 놓쳤다고 했다. 더구나 긴 숨은 고사하고 나처럼 가늘고 길기만 한 여린 손가락으로는 거친 해물껍데기를 견딜 수 없을 거라면서 연필 잡는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열네 살에 물질을 시작한 어머니도 때론 숨이 짧아 아쉬운데 나 같은 심심이는 해녀로서 절대 자격미달이라고 단단히 못을 박았다.
어머니는 서운할지 모르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어머니의 그런 저런 가지치기가 아니더라도 나는 해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나는 숨비소리가 싫었다.
당연히 숨이 길면 그만큼 더 많은 수확이 가능하고, 긴 숨은 더 긴 숨비소리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사람마다 숨의 길이가 다르듯 숨비소리도 해녀마다 달랐다. 나는 어머니의 숨비소리를 분간할 순 없었지만, 바람이 수상한 바다로 나설 때면 어머니와 삼춘들은 저마다 달랐던 그 숨비소리로 바다 위의 서로를 챙기곤 했다. 초인적인 호흡을 조절하며 그들이 바다 위로 뿜어내던 그 아름다운 숨소리는 해녀들의 능력치를 가르는 기준임과 동시에 그들이 지금은 안전하다는 생존 신호였다. 나에겐 그랬다.
어린 나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수면에 접착된 스티로폼 방울처럼 둥둥 떠 있는 테왁을 세며 숨비소리를 들었다. 낮게 솟았다가 차분히 가라앉으며 긴 꼬리가 흩어지는 숨비소리는 종을 알 수 없는 아름다운 새의 소리 같기도 하고, 날이 흐리거나 갑작스러운 어스름이 몰려오기라도 하면 육지를 갈망하는 유령의 애절한 휘파람처럼 들리기도 했다. 가끔은 어머니와 삼춘들이 벗어둔 옷가지를 모두 끌어다가 그 속에 숨어들만큼 오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차되는 숨비소리가 잠시라도 끊기면 바람은 나의 귓가에서 팽팽 쇳소리를 내며 경고하듯 맴돌았고, 그때 나의 오감이 가장 공격적으로 반응했었다.
깊은 바다를 헤매다 나온 해녀가 참고 참았던 한숨을 애절하게 마디마디 베어 뱉는 바다 위의 그 지루한 숨소리는
호오~이~ 호오~이~ 호오~이~
일렁이는 물살 위로 불안한 바람을 타고 온 숨비소리들이 바람에 묻어온 비린 향기처럼 코앞에서 흩어지고 있었다.
3. 불턱
숨비소리에 귀 기울이며 어머니를 기다리던 불턱은 대개는 갯바위가 시작되는 곳, 들물(밀물)이 와도 안전한 곳에 돌을 쌓아 벽을 만들고, 마땅한 자리를 골라 솥단지를 앉힐 수 있는 불을 지필 턱을 만든 지금의 해녀탈의장 같은 공간이었다. 지금의 시설과는 차원이 다르다. 말할 것도 없이 비위생적이었으며, 초라하다는 말조차 부족할 정도로 열악했다. 전기는 불안정했고, 샤워 시설은커녕 꼭지를 단 수도도 없었다. 화장실도 없어서 숨을 수 있는 갯바위 여기저기에다 일을 보면 하루 두 번 들물이 와서 쓸어갔다.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돌담 구멍들은 작은 돌, 종이뭉치, 시멘트 부스러기 같은 잡다한 것들로 메우고, 그 돌들에 어떻게 박아 넣었는지 모를 녹슨 못들에는 어머니와 삼춘들의 테왁이나 잠수복을 걸었다. 그 아래로 대충 버리기 직전의 살림 도구나 어딘가 고장 난 집기들이 시끄럽게 자리를 지켰다.
두꺼운 각목을 격자로 놓고 얇은 슬레이트를 덮은 지붕에는 아마도 난파된 어선에서 나왔을 폐그물 같은 것들을 가져다가 여러 겹을 겹쳐서 두텁게 널어놓았다. 어디에도 창문은 없었다. 대신 메우지 못한 돌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닷바람과 자연광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불턱의 내부는 항상 습하고 침침했고, 갯비린내가 진동했다.
천정에는 늘어진 빨랫줄처럼 덜렁이는 전선에 얼룩덜룩한 작은 백열전구 여러 개가 매달려있었다. 그나마도 아낀다고 하나 건너 하나는 전구의 대가리를 돌려 꺼놓았었다. 불턱의 정식 입구에는 나무문 두 짝이 썩은 이를 보이며 웃는 늙은이들처럼 사이좋게 달려 있었는데, 나는 누가 열어주지 않아도 삭아서 벌어진 문 틈사이로 언제든 드나들 수 있었다. 반대로 물질을 나가는 바다 방향으로는 반짝반짝한 양철을 덧대 만든 튼실한 쪽문이 달려 있었다. 그 문만 유난히 새것 같았던 이유는 항상 직통으로 바닷바람을 맞아 자주 녹이 슬어 구멍이 났기 때문에 어머니와 삼춘들이 거의 정기적으로 각자의 주머니를 털어 자주 문을 바꾸기 때문이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는 반드시 문을 갈아야 했는데, 푼돈이 아쉬워 문을 바꾸지 않은 어느 해 겨울은 문 달기를 미룬 삼춘들을 쉬지 않고 비난하느라 매일같이 불턱 안이 시끄러웠다. 나는 그 쪽문을 훤히 열어 놓고 매운바람을 맞으며 쫄쫄 콧물이 흐르고 양 볼이 탱탱하게 부어오를 때까지 바다를 바라보며 어머니를 기다렸다.
물질을 마치고 갯바위로 올라온 해녀는 오리발을 벗고 수경을 이마 위로 걷어 올린다. 테왁은 어깨에 걸치고 그 아래 무거운 망사리는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엉덩이로 받쳐든다. 그리고 오리발을 들고 아가들처럼 아장아장 갯바위를 밟아 나온다. 삼춘들 틈에서 어머니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가끔 어머니를 먼저 알아보고 달려 나가면 어머니는 오리발을 건네주며 환하게 웃었다.
어머니와 삼춘들이 불턱으로 돌아오면 망치로 꽹과리를 치는 것처럼 떠드는 거센 말소리에 한동안은 귀가 멍해지고 머리가 띵했다. 어머니와 삼춘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떠들었다. 천둥 치듯 말하고 벼락같은 소리로 웃었다. 살아 돌아 나온 것을 자축하듯 들떠있었고, 너나없이 맹렬히 싸운 전과에 대한 자화자찬을 늘어놓았고, 그제면 누군가 지펴놓은 불턱에선 타닥타닥 거센 불이 붙어있었다.
4. 삶의 아이러니
삶의 슬픈 아이러니는 누군가의 불행으로 누군가는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을 얻는다는 데 있는 것 같다.
갯바위에는 누군가에겐 피하지 못한 불행이었을 난파의 조각들이 파도에 밀려와 걸려 있었다. 해녀들 말고는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던 그것들은 가끔 새롭게 바뀌어 걸리곤 했는데, 더러는 부러진 묘비처럼 조각난 채로 누워있거나 또 더러는 붉은 삼각 기나 고동색 통발과 함께 얽혀 구조를 기다리다 지친 조난자처럼 절망적으로 묶여 있기도 했다. 부서진 배에서 나온 잔해들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가슴이 저리도록 가련했다.
어머니와 삼춘들이 불턱 가까이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주워다가 불턱의 땔감으로 사용했다. 지독한 연기는 났지만 불도 피우고, 쓰레기도 치우는 제법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지금 같아선 말도 안 되지만, 그땐 누군가의 불행이나 공공에 대한 배려보다는 그렇게 해서라도 바다의 온도로 식어버린 몸을 덥히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 무엇도 생존보다 위에 있지 않았다.
거기에 어머니의 냄새가 있었다.
비릿한 갯내음, 그 속에 스며든 자욱한 불턱의 탄내, 그날의 소라 문어 전복 해삼 미역에선 바다 깊은 곳으로부터 끌려 나온 천연의 싱그러움. 그리고 그 모두를 어머니의 축축한 젖가슴이 품고 있었다. 삶과 죽음이 복잡하게 얽힌 그 가슴을 끌어안고 밀려드는 탄내에 취해 어머니의 작은 살점을 베어 물면 그것이 내 모든 기다림의 완벽한 보상이었다.
5. 얕은 연못
내가 스무 살 정도가 되어서야 어촌계의 힘을 빌어 화장실과 샤워시설이 있는 작은 건물을 지어 해녀탈의장이라고 불렀지만, 당시 불턱에는 몸을 헹굴 때 가장 필요한 수도시설조차 없었다. 대신 근처에 깊이가 얕고 바닥은 질척한 뻘인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굵은 비가 한 번씩 와야 볼만한 정도이다 보니 어머니와 삼춘들은 연못에 물이 찰 때마다 부지런히 그 물을 길어다 가마솥 옆의 커다란 물항(물독)을 서둘러 채웠다. 그것도 못 미더워 나무 대문 옆에 커다란 고무 대야를 두고 따로 물을 모았다.
연못 물에선 바다와 다른 비린내가 올라왔다. 그리고 낡은 바가지가 연못의 바닥에 닿아서 그랬는지 오래 불은 먼지 같은 것들이 섞여있었다. 시간이 지나 가라앉으면 대야의 윗 물은 얼추 맑아졌지만, 바닥에는 씹어 삼킨 파래김을 토해 놓은 것처럼 푸르스름과 누르스름 중간의 침전물이 몽글몽글 고여서 마치 살아 있는 뭐라도 되는 양 능글맞게 건들거렸다. 그렇게 바닷물과는 또 다른 비린 연못의 빗물을 데워 그들의 짠 내 나는 몸뚱이를 헹구는 데 썼다.
연못이 가물어 갈라진 바닥을 드러내는 날이 많아지면 그나마도 어려워 할 수 없이 대충 몸의 물기만 닦아내고 마른 옷을 걸쳐 입어야 했다. 마른 옷이 젖은 소금기에 들러붙어 성가시게 몸을 죄는 그런 날은 다들 심기가 불편하고 짜증이 많아져서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괜한 속풀이 같은 산발적인 싸움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싸움은 비가 오면 씻겨지는 먼지 같았다. 비가 내리고 연못에 물이 차오르면 꽥꽥거리는 오리 떼처럼 연못으로 몰려나가 손잡이가 부러진 바가지며 귀가 없는 냄비며 찌그러진 양동이까지 물을 뜰 수 있는 온갖 도구를 손에 들고 물을 떠 나르기 바빴다. 그날은 천방지축 어린 소녀들처럼 비명을 섞어가며 뛰어다니는 어머니와 삼춘들이 누런 이가 다 보이도록 입을 벌려 웃었고, 내 눈엔 누구 하나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물이 데워지기 시작하면 어머니와 삼촌들은 서로 바가지를 찾아들었다. 가까운 삼춘의 잠수복 뒷 목 부분을 손으로 움켜 틈을 만들고 막 미지근해지기 시작한 비린 물을 퍼서 그들의 차가워진 몸 안으로 더운 기가 흐르도록 차례 없이 부어주었다. 그러면 죄수복처럼 온몸을 벌겋게 죄던 싸구려 고무 잠수복도 마찰을 줄이며 벗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그리고 허리에는 노상 붉게 쓸린 자국이 남게 마련이었다. 비싼 값을 치르고 새 고무 잠수복을 입을 때면 그 상처가 더 심했다. 어머니는 그 쓰린 상처를 줄여보려고 온몸에 콜드크림을 잔뜩 바르거나 참기름을 바르며 고무 옷을 입었지만, 상처를 내지 않고 고무 옷을 벗어낼 방법은 없었다. 새 고무 옷에 맞지 않는 몸뚱이가 서둘러 길들여지길 바랄 수밖에. 그렇게 어머니의 몸이 고통에 길들여져야 내 삶도 더 편해질 수 있었다.
물이 줄면 다시 연못의 바닥을 긁어 물을 채우고 태울 것이 모자라면 더 먼 갯바위로 달려 나갔다. 그런 고사리 심부름꾼으로 불려 다니면 어머니는 눈을 흘기며 나무랐지만 나는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갯바위는 자칫하면 미끄러져 다치기 쉬웠고, 연못에는 장어처럼 미끈한 몸뚱이로 지그재그 헤엄을 치며 돌아다니는 연두색 물뱀인 돗줄레(독사)가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것들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버릇처럼 타일렀다. 가끔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연못에서 헤엄치는 돗줄레를 찾아보곤 했지만, 어머니의 염려처럼 돗줄레가 자주 보이지는 않았고, 나락 부스러기 같은 소금쟁이들만 쓸다 남은 먼지처럼 떠다니고 있을 때가 훨씬 많았다. 물론 갯바위에서는 자주 미끄러져 무릎과 종아리가 성할 날이 없었지만 말이다.
6. 날것처럼
내겐 서로의 잠수복을 힘주어 벗기며 쏟아내던 그들의 불평과 악에 바친 비명조차 즐겁게 들렸다. 내지르는 목청만으로도 생살을 벨 것 같았던 살벌한 욕지기와 이해할 수 없는 비속어를 동반하며 귀청을 때리던 그들의 불경한 웃음소리조차도 오감을 세우고 듣던 숨비소리보다 훨씬 듣기 좋았다. 그것은 삶의 활기(活氣)였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을 쯤이면 한 사람씩 잡아들인 작업물을 대야에 쏟아 저울로 재었다. 다만 뭔가를 읽고 쓰는 일에는 다들 자신이 없었는지 누가 나서서 제대로 된 무게를 기록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잡아들인 작업물의 무게를 기억하곤 생물별로 분류된 대야에 섞어 담았다. 하지만 의도인지 아닌지 무게를 속이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있었기 때문에 가끔 거친 싸움이 나기도 했다. 저울질할 때의 싸움은 진짜 살벌했다.
눈을 부릅뜨고 서로의 저울 눈금을 살피지 못하면 누가 무게를 속이고 작업물을 섞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속이는 사람 말고는 모두가 조금씩 손해를 보는 구조였기 때문에 누군가 나서서 결손 된 무게의 손해를 감수하지 않으면 싸움은 끝나기 어려웠다. 공격할 대상이 마땅치 않았으므로 의심이 가거나 일전에 혐의를 받았던 삼춘들이 다시 소환되기 시작하면 큰소리로 시작된 분쟁이 삽시간에 육탄전으로 번지기도 했다. 때문에 주로 그날 가장 많은 물건을 건져 올린 삼춘이 희생하거나 희생을 요구받았다. 간혹 제 작업물의 무게 자체를 포기하는 어머니나 다른 삼춘이 번갈아가며 나서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분탕질에 익숙한 어느 삼춘들은 뒤돌아 입술에 손을 모으며 키득거리며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머니에게 달려가 귓속말로 고자질을 했지만, 어머니는 짓궂은 장난을 받아들이는 큰언니처럼 다 알고 있으니 괜찮다며 웃었다.
나중에는 저울을 재고 나면 큰소리로 누구, 뭐, 얼마라고 외치기로 했는데, 나는 어머니가 억울하지 않게 하려고 삼춘들이 외치는 무게를 듣고 기억할 수 있는 한 전부 외우려고 들었다. 그 덕에 오히려 어머니가 싸움에 말린 적도 있었다.
일단 욕설이 오가는 싸움이 시작되면 미옥이 삼춘이 내 귀를 막거나 옷가지 같은 거로 머리부터 무릎까지 나를 감쌌다. 듣지도 보지도 말라는 뜻이었지만 그러기엔 내 귀가 밝았고 호기심도 많았다. 입으로 시작한 싸움이 몸으로 번지면 그 채로 나를 안아서 불턱 밖으로 내쳤다. 옷가지를 걷어내고 슬그머니 엿보면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다닥다닥 붙어서 우르르 이리 몰렸다 저리 몰렸다 하면서 잠수 두건 때문에 다들 최대한 짧게 해 놓은 파마 때문인지 머리채도 한방에 못 잡고 억세게 옷잡이만 하다가 드드득 드드득 실밥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그러다 결국 누군가는 쓰러지고 밟혀서 욕설과 비명이 섞이면 정작 피비린내가 날 것 같던 싸움은 오래가지도 못하고 몇몇은 주저앉아서 싸움과 전혀 상관없는 신세 한탄을 하거나 신세타령을 하면서 울부짖었다. 무너지는 젠가처럼 우수수 내려앉은 그들은 맥없이 이리저리 돌아앉아서 주저리주저리 아무도 듣지 않는 자기 얘기를 빈 허공에다 한숨처럼 내뱉었다. 그것은 육지에서 듣는 또 다른 숨비소리 같았다.
어머니와 삼춘들은 서로 귀담아듣지 않는 '세상에서 누가 가장 불행한지'에 대해서 한참 동안 넋두리를 했다. 신기한 건 시간이 지날수록 화해나 이해를 벗어나 중구난방이던 이야기들이 종국에는 무언가를 공고히 하기 위한 논의가 되거나 앞으로의 발전을 모의하는 회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날은 회의가 늘어나는 엿가락처럼 길어지고 길어져서 저녁이 지나고 별사탕 같은 밤하늘의 별이 보일 때까지 불턱 밖에 버려진 깡통처럼 앉아서 하염없이 기다리기도 했다.
어머니는 저울질에 나서기 전에 나를 품었기 때문에 주로 가장 나중에 저울을 받아 들었다. 축축한 가슴으로 나를 품은 어머니는 바다를 마주한 작은 쪽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아무것도 남지 않은 텅 빈 젖을 물렸다. 그때 어머니는 거미줄처럼 긴 시선을 늘어뜨리며 멍하니 당신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스라한 어머니의 시선이 닿은 곳엔 어김없이 검푸른 바다가 너울대고 있었다.
삼춘들이 한 번씩 나서서 나는 젖먹이 아기라서 학교에 못 갈 거라고 놀렸지만, 나는 그냥 웃었고 그런 놀림으로는 상처받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빈 젖을 문 채 남은 한쪽의 젖무덤을 욕심껏 더듬거렸고, 어머니의 튼튼한 겨드랑이 사이를 타고 온 바닷바람을 귓바퀴로 느꼈다. 그러다 문득 잠이 들기도했다.
어머니의 가슴은 짠 내와 탄내와 연못의 비린내와 싱싱한 해산물 내음이 온통 뒤섞여 있었다. 나의 생존을 유지하는 시스템이 오묘하게 버무려져서 어머니의 가슴에 눅진하게 들러붙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반나절을 넘게 기다려 어머니의 빈 젖을 물었던 것은 핑계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오십 년이 지났지만 코 끝에 걸리는 기억은 생생하고 앞으로 50년을 나아가더라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일생에 다시없는 완전한 나의 시간이었다.
7. 고집스러운 아이
나는 이상한 아이였다. 아무리 달래고 얼러도 어머니의 가슴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목청이 센 삼춘이 나서서 무섭게 윽박지르거나, 자상한 삼춘이 나서서 동전이나 사탕으로 유혹해도 꺾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신의 젖꼭지에 머큐롬을 바르거나 쓰디쓴 마이신가루를 덮쳐 바르기도 하고, 가끔은 티 안 나게 익모초 물을 진하게 우려 적셔놓기도 했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쓴 맛은 지나가게 마련이었고, 머큐롬은 지워지게 마련이었다. 젖을 떼지 못하면 학교에 가지 못한다는 말에도 그딴 학교엔 가지 않겠다며 눈을 감았다. 어머니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웃옷을 걷어 올렸고, 삼춘들은 지독하다며 혀를 찼다.
나는 어머니를 이겼고, 삼춘들을 이겼고, 건질 수 있는 모든 좋은 평판을 기꺼이 버렸다. 주변엔 조롱이 가득했지만 나의 완전한 시간을 누군가의 억지에 의해 방해받지 않았다. 나에겐 분명한 선택의 문제였다. 하지만 이기적인 애착으로 괴로웠을 어머니는 배려하지 않았다. 그것이 고집이라면 나는 고집스러운 아이가 틀림없었다.
그래도 삼춘들은 나를 아꼈다. 삼춘들마다 냄새가 다르다고 킁킁 코를 대며 쫓아다니고, 연못의 독사에게 이름을 지어 부르고, 해삼과 문어에게 말을 걸며 혼자 놀아도 어둡고 냄새나는 불턱을 마냥 좋다 하고, 사탕의 단맛을 거부하며 어머니의 빈 가슴을 강아지처럼 파고드는, 삼춘들은 이해 못 할 이상한 아이였지만 나는 항상 그들의 시선 안에 있었다. 어머니가 아무리 바빠도 어느 삼춘은 반드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를 보면 말을 걸고, 웃고, 허기를 달래기 위해 꿍쳐둔 떡을 주거나 나중에 께끼(하드) 사 먹으라며 몰래 동전을 쥐어주었다. 모아 놓은 해삼을 손으로 주물러 모조리 흐물거리게 만들거나 작은 문어만 골라 연못에 놓아주어도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뒤섞어 놓은 바람에 한 참 속고쟁이를 찾아 헤매도 삼춘들은 내게 꾸지람을 하거나 모진 말을 하지 않았다.
학교를 다니고 사춘기가 되어서도 가끔 불턱에 가면 삼춘들은 똑같았다. 말을 걸고, 웃고, 떡이나 빵을 찾아주거나 꼬깃꼬깃 구겨진 천 원짜리 지폐를 쥐어주곤 했다. 물론 심부름도 했다. 간식을 사러 다녀오거나 저울에 무게를 재어 계산을 마치는 일부터 어질러진 불턱을 치우기도 했다. 다만 다 큰 내가 이유 없이 불턱에 가는 것을 어머니는 아주 싫어했다.
8. 해녀
어머니는 바다를 사랑했다. 바다를 믿고 의지했다. 바다는 어머니의 어머니 같았다.
사춘기의 언젠가 나는 어머니에게 왜 해녀가 되었느냐고 물었었다. 나이는 어리고, 배우지 못하고, 살아갈 방법도 모르겠고, 상처한 아버지는 술독에 빠져 같이 사는 막내딸이 먹는지 굶는지도 모르더라고 했다. 밀물이 차면 마당 안에 바닷물이 들어오는 코 앞이 바당(바다)인 집에 살았던 열네 살 어머니는 외할머니를 잃고 매일 바다를 보며 한없이 울었다. 울다가 울다가 해녀가 되었다고.
실은 넋 놓고 바다를 보던 어느 날 물 위에 뜬 콕테왁(박으로 만든 테왁)을 붙잡은 해녀를 보고는 새삼 느닷없이 '내가 살 길이 저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번쩍 나더라고 했다. 그때의 그 강렬한 확신은 어머니 자신도 평생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너무 확고해서 어머니는 곧바로 행동으로 밀어붙였고, 이래저래 낡은 수경 두 개와 구멍 난 테왁을 얻어 풀을 발라 대충 고친 다음 무딘 까꾸리를 허리춤에 달고 해녀들을 찾아가 스스로 해녀가 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까마득한 옛날이기도 하고 장비도 어설펐지만 해녀들의 규율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어머니의 도발적인 행동은 어느 해녀가 나서서 공격적으로 망신을 주더라도 아무도 어머니의 편이 되어줄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원래 해녀들의 텃세가 드세고 독해서 막상 해녀로 받아들여지더라도 연고나 연줄이 없으면 그 세계에서 해녀로 살아남기 어렵다고 했었다. 주도적인 괴롭힘의 문제라기보단 누가 옆에서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으면 물질은 자살행위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고아나 다름없는 어린 어머니를 배려한 선배 해녀들이 큰소리 없이 품어주긴 했지만, 아무도 나서서 가르쳐주지 않은 탓에 어머니의 물질이 좀처럼 늘지 않아 처음 몇 년은 혼자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었다고 했다. 자신이 가진 숨비소리의 한계를 늘려가면서도 결코 그 한계를 넘지 않는 법을 익혀야 했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는 삶이 아무리 버거워도 바다를 보고 있으면 숨이 잘 쉬어진다고 했다. 바다는 어머니 자신이 선택한 확고한 삶의 방식이자 지구가 절단 나지 않는 한 영원히 존재할 작업장이었고, 오장육부의 바닥까지 북북 긁어다 푸념을 하더라도 까발릴 염려 없이 들어주는 일생의 반려(伴侶)였다.
내가 태어나기 전 부모님은 언니와 오빠들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아버지의 이종 사촌 누이가 기반을 다지고 있던 서울의 동대문 시장에서 자리를 잡아보겠다며 상경했었다. 그러나 일 년을 못 버티고 어머니가 먼저 바다로 돌아왔고, 몇 달 후 아버지도 가족들 곁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한 번씩 그때 좀 참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내비쳤지만, 어머니는 자신이 바다를 떠나 살 수 없는 천상 해녀임을 그때 가장 확실하게 알았노라고 했다.
해녀는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들이라 죽을 때까지 물질을 한다는 말이 있었다. 물질을 할 체력이 없으면 갯바위 근처로 나가 몸이라도 적셔야 한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해녀가 무슨 바다사자나 펭귄, 혹은 썰물에 버려진 망둥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깊은 물질에 자신이 없어지면 늙은 해녀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불턱을 나갔지만, 그런 이유에서인지 동네에선 구순을 바라보는 해녀할망들이 낡은 테왁을 메고 허리만 잠기는 갯바위를 언저리를 뒤지며 다니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그때마다 내 어머니도 그들처럼 늙을 거라 예견하면서 뭔가 모르게 속이 꼬였다. 숨비소리도 내지 못하는 궁상맞은 퇴물들.. 갯바위에 얹어져 찢어진 귀만 펄럭이는 빛바랜 붉은 삼각기들.. 흐믈흐믈 팔지 못하고 먹지도 못해서 도로 바다에 버려지던 산란을 마친 어미 문어들.. 같았다.
어머니는 2013년 이른 봄, 당신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그 바다에서 숨이 졌다. 차라리 보다 일찍 퇴물이라도 되었으면 좋았을걸. 열네 살에 시작해 무려 64년이라는 시간 동안 물질을 했던 어머니의 마지막 숨비소리는 그러니까 내가 아니라 그 바다가 들었다.
바다는 난파의 잔해를 들고 왔듯이 부유하던 어머니를 예전 불턱 근처 갯바위로 데려다 놓았다. 상한 곳이 없었고 심지어 표정은 평화로웠다. 궁상맞지 않았다. 바다에서 숨 쉬다 바다에서 숨 거둔 해녀다웠다. 하지만 나는 많이 아팠다. 가엾은 어머니의 임종을 5남매 중 어느 자식도 남편인 아버지조차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한없이 슬프고 비통한 일이었다.
9. 바다
어머니의 바다와 나의 바다는 판이 달랐다.
어머니의 바다는 살아 있는 바다였다. 어머니를 이해했고, 어머니의 평생을 품었고,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켰다. 바다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마지막을 지킬 자격도 있었다. 차고 넘쳤다.
나의 바다는 액자에 박힌 그림처럼 아름답지만 숨을 쉬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나는 바다에서 멀어졌다. 어쩌면 어머니의 말처럼 해녀가 될 수 없었던 열여섯 나이에서부터, 혹은 어머니의 가슴에서 더 이상 탄내를 찾지 않게 된 순간에서부터 천천히 멀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바다와 이어져 있던 어머니라는 끈을 놓치고 나니 나의 바다에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몇 해를 보내고 어머니의 바다를 가보았다. 많은 것들이 이미 오래전에 변해있었다. 남아 있는 삼춘들은 더 늙었고, 불턱은 더 크고 좋은 시설이 되어있었다. 온돌이 들어오는 방, 물질도구를 걸어두고 말리는 짱짱한 건조대, 개인 사물함, 냉장고, 전자레인지, 부엌공간, 여럿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따듯한 물이 나오는 샤워장, 해산물을 손질하기 좋은 싱크대, 전자저울... 물론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삼춘들의 목소리는 탁하긴 해도 여전히 듣기 좋았다.
예전의 불턱자리를 찾아보았다. 어머니를 잃기 전부터 연못은 메워져 길이 되었고, 불턱은 흔적조차 없어졌고, 갯바위에는 파도에 밀려와 걸렸던 너저분한 난파 조각들 대신 누군가 쓰다 버린 빛바랜 생활 쓰레기들이 밀려와 있었다.
비리지도 않고 탄내도 없고 그리운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마른 바위에 앉아 전처럼 바다를 마주 보았다. 수평선이 보이던 먼바다에는 긴 방파제가 건조되어 한없이 나아가고픈 시선조차 짜증 나게 가로막고 있었다. 어색하게 떨리는 물결 위로 그날의 쿰쿰한 바다 내음이 막막한 방파제에 부딪혀 웅웅 우는 바람에 실려왔다. 하긴, 단지 그것만으로도 시간이 되감겨 나는 다시 어머니를 기다리는 작은 아이가 된 것 같았다.
그것이 삶을 향한 애착이건 집착이건 무슨 상관인가. 나는 이기적인 자식이었다. 그저 줄곧 어머니의 빈 젖을 기다리는 다 큰 젖먹이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다시는 어머니 없이 완전한 시간을 추억할 일도 어머니 없이 내가 완전해지는 시간도 없을 것이다.
어머니의 숨비소리를 찾고 싶은 오감이 길 잃은 아이처럼 낯선 수면 위를 방황하고 있었다. 내가 사랑한 바다는 어머니를 통해서만 바라볼 수 있는 거친 삶의 바다, 나의 바다는 어머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