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같지만 소설
무더운 여름 방학 중이었어요. 열두 살 연이는 엄마가 만들어 준 수박화채를 국자로 떠먹으며 방학 숙제를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어느새 깜빡 잠이 들었지요. 하지만 금방 깼어요. 연이는 입가에 흐른 달곰한 침을 닦고 다시 잠을 자보려고 눈을 질끈 감았어요. 왜냐하면 뭔가 재미나고 아주 기분이 좋은 꿈을 꾸던 중이었거든요. 그러다가 난데없이 마당 개 화순이가 짖는 바람에 깜짝하고 잠을 깬 거예요. 더위도 잊을 만큼 신나고 재미있는 꿈을 꾸고 있어서 얼른 다시 꿈속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연이는 잠이 오지 않았어요.
“이런 저 멍충이가 다 망쳤네”
연이가 화순이를 째려보며 짜증을 냈어요. 화순이는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늘어지게 하더니 제집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아.. 정말 재미있었는데.. 아이씨.. 기억이 안 나네..”
연이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아쉬워하자, 부엌에서 일을 보던 엄마가 물었어요.
“뭐야? 뭔데 그래?”
“아니, 디게 재미난 꿈을 꾸고 있었는데 화순이가 깨웠잖아.”
“무슨 꿈인데?”
“그니까 그게 기억이 안 난다고요. 금방 꾼 꿈인데 왜 기억이 안 나지? 날이 너무 더워서 내 머리가 익어버렸나?”
엄마는 웃으면서 말했어요.
“그럴 수도 있어. 잘 생각해 봐. 꿈이 재미있댔지? 그럼 연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해 보든지 아니면 좋아하는 것들을 해봐. 혹시 아니? 짠~! 하고 떠오를지.”
엄마의 말에 연이는 웃으며 마당 구석에 있는 수도꼭지에 연결된 호스를 집어 들었어요. 날이 더우면 해가 한창일 오후 시간에 한 번씩 아버지가 그 호스를 들고 마당을 둘러싼 화단에 물을 뿌리곤 했는데, 연이는 그 모습이 너무 좋았거든요. 호수의 앞 꼭지를 엄지로 슬쩍 누르고 물줄기를 넓게 만들어 하늘을 향해 뿌리면 작은 무지개가 만들어지면서 화단에 나무들이 팔을 벌리고 시원한 비를 맞는 것처럼 행복하게 물을 받아 마셔요. 덕분에 기분은 무지 좋아졌는데 꿈은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이번엔 화순이를 집에서 끌어내었어요. 그리고 꽉 안았어요. 연이는 화순이 냄새가 참 좋았거든요. 화순이는 태어나서 한 번도 씻은 적이 없는 지저분한 마당 개지만 목덜미의 북실한 털에 코를 묻으면 보리빵을 갓 구워낸 것처럼 엄청 고소한 냄새가 났어요. 엄마는 연이가 화순이를 붙들고 강아지처럼 큼큼거릴 때마다 잔소리를 했지만, 아무도 몰랐죠. 화순이에게서 그렇게 좋은 향이 난다는 것을요. 하지만 화순이를 안고 아무리 큼큼거려도 도통 잃어버린 꿈이 생각이 나질 않았어요.
뒷마당으로 갔어요. 장독대랑 예쁜 감귤나무 한그루가 심겨 있는 뒷마당에는 지붕과 닿은 기다란 그늘이 늘어져 있어서 벌레들이 참 많았어요. 그중 터줏대감은 무당거미와 집거미인데 검정과 노랑의 줄무늬가 섞인 무당거미는 정말 멋지지만 무섭게 생겼고, 뚱뚱한 회색 몸뚱이에 보슬보슬한 털로 뒤덮인 집거미는 칙칙한데 착해 보였죠. 엄마는 어차피 겨울이 오면 거미는 없어진다며 거미집을 떼어내지 않고 그냥 놔뒀어요. 그래서 연이는 심심하면 한 번씩 거미들을 찾아보았어요. 거미집은 조금 겹쳐있지만 붙어 있진 않았어요. 그리고 무당거미와 집거미는 서로의 집을 침범하거나 부수지도 않았어요. 평화로왔어요. 그래서 연이는 생긴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누가 뭐래도 거미는 분명 착한 벌레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가끔 나비가 붙어 있으면 연이가 살려주곤 해서 거미들은 연이를 싫어했을지도 몰라요. 연이는 텅 빈 거미줄 가운데 무료하게 앉아있는 무당거미와 집거미를 보며 죽은 파리라도 던져줄까 생각하다가 뒷마당을 나왔어요.
집안으로 들어온 연이는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는 동화책 중에 제일 좋아하는 백조의 왕자 이야기를 꺼내 들었어요. 그 책은 어려서부터 연이가 하도 읽어서 책장이 다 한 장씩 분해되고 너덜너덜해졌어요. 엄마는 몇 번이나 그 책을 버렸었고, 연이는 몇 번이나 버려진 그 책을 도로 찾아왔었어요. 연이는 분해된 책 장을 하나하나 소중히 다루며 조심스럽게 읽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엄마의 말처럼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생각이 나는 듯했어요.
‘아, 맞다. 그래 나는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되었어. 그리고 내 책이 불티나게 많이 팔렸던 거야. 나는 유명해졌고 돈을 많이 벌었어. 바다의 수평선처럼 푸른 벌판이 끝없이 이어지는 큰 목장을 샀지. 풀을 뜯는 자유로운 말과 양이 목장의 어디에나 있었어. 크고 화려한 집 앞에서 엄마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아버지는 지금보다 열 배는 더 되는 화단에 물대포를 쏘아 올리는 중이었어. 무엇보다 제일 행복해 보이는 화순이가 목줄 없이 웃으면서 나를 향해 달려왔어. 좋다고 짖으면서. 화순이가.’
“아, 생각났어! 엄마”
“그래? 생각이 났구나. 뭔데? 무슨 꿈인데 그래?”
“엄마, 내 꿈이 뭔지 알아?”
“꿈? 장래 희망? 그거?”
“으응 그래 내 장래 희망.”
“알지. 알다마다. 너 작가가 되는 거라며. 작가가 돼서 돈 많이 벌어가지고 결혼도 안 하고 나랑 아버지랑 화순이랑 다 같이 목장에서 행복하게 사는 거라고 했잖아. 바로 어제. 너 그 방학 숙제에 장래 희망 쓰는 거에 그렇게 쓴 거 아니야?”
그렇다. 이제 생각이 더 잘 난다. 연이의 꿈은 엄마의 말처럼 성공한 작가가 되어 연이가 한없이 좋아하는 엄마와 아버지와 화순이를 데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목장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
연이는 흐릿한 눈웃음을 지으며 카디건의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이제 자리를 털고 잠을 자러 갈 시간이 되었다.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연이의 팔을 부축해 주었다.
연이는 많은 것을 잊었다. 서른이 되기 전에 결혼을 했다는 것도, 자식들과 손주들이 있다는 것도, 치열한 삶에 갇혀 정신없이 살다 보니 무릇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이 된 것도 잊어버렸다. 요양원에 들어온 지도 5년이 넘었고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도 3년이 넘었지만 언제부턴가 연이는 요양원의 동그란 탁자에 앉아 한쪽 팔을 올린 채 침을 흘리며 늘 같은 시간에만 머물러 있었다.
연이의 팔을 부축한 요양보호사는 오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을 듣는다.
“내 꿈은 작가가 되어서 엄마랑 아버지랑 화순이랑 목장에서 사는 거야. 그런데 잠깐 잠이 들었는데 그 꿈을 잃어버렸지 뭐야. 지금 잠들면 다시 꿈을 꿀 수 있을까? 내 잃어버린 꿈을 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