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취향권
A: 사람들이 각기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신기한 거야. 취향이란 건 누군가는 너무도 아낄 노래에 '이런 건 음악도 아니야'라고 할지도 모르는. 어떤 사람한텐 쓰레기가 어떤 사람한텐 보물이 되는 거지.
B: 하나의 대상에 전혀 다른 받아들임이지.
#1. 천부취향권
: 취향은 절대 주관적인 개념이다.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불가침의 권리이다. 온전히 나에 의해 정의되고 나로부터 근거하는, 다른 누구도 부인하거나 따질 수 없는 영역이다. 왜 이건 좋아하고 저건 싫어하냐고? 단지 내가 그렇게 느끼기 때문에. 다른 거창한, 학문적인, 납득가능한 이유는 필요 없다. 또 그건 꼭 고상할 필요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노골적일 필요도 없다. 어떤 조건도 필요 없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 취향이라는 특권이니까.
A: 응, ‘맛'이라는 것도 그렇다.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다른 맛을 느끼는 게 아니야. 같은 맛을 느끼면서도 그게 맛있다, 맛없다고 나뉘는 거야.
B: 그렇다면 '맛없다'는 건 거의 없다고 생각해. 물 같은 거 빼고. 모든 건 맛이 있는데 누군가는 그걸 좋아하고 다른 쪽은 그렇지 않은 거뿐이지.
#2. 맛없다는 건 없다.
정말로 ‘맛없는(無)’ 건 찾기 어렵다.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만장일치를 이루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수용될 수 있는 이 무의 상태도 찾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가 싶기도 하다.
맛없다는 것은 왜 그토록 특별할까. 그러니까, 이 맛없는 맛이야말로 모두가 똑같이 느낀다. 다른 건 각기 다르게 느끼는데 불구하고 말이다. 어떤 맛이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면, 유일하게 무(無) 맛만이 그 주관성을 극복해 낼 수 있다
'맛없는 물’과 ‘당연한 말’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 둘 다 제 각기의 주관성을 극복하고 모두에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이다. 물을 안 마시는 사람이나,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와 같은 당연한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얼마 못 가 죽거나, 이미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니 이것들이 세상에 꼭 필요한 것들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사람은 물 없이는 몇 주 살 수 없다. 또 우리 사회는 이 당연한 말들을 필요로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합의가 필요하고, 이 당연한 말들을 기둥 삼고 있다.
그런데 둘은 또 되게 재미없다. 그래서 인기도 없고. 코카콜라가 소울푸드인 사람은 있어도 물이 소울푸드인 사람은 없지 않나. 또 ‘살인하지 말자‘를 좌우명으로 삼는 사람은 없다.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세상에 당연한 말을 계속 들어주는 것보다 힘든 일도 더 없지 않은가.
무색무취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이 지루함을 참는 것은 너무 힘겨운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유색유취한 그 무엇은 그 기간에 차이가 있을 뿐 언젠가 우리에게 '질림'을 선사한다. 이 '질림'을 피하기 위해서는 '지루함'을 선택하는 길 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은 변덕스러움이다. 변덕스러움은 질림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이 변덕스러움을 개인적/사회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는 통제시킬 필요성이 있고, 따라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지루함을 택했다. 우리 인생에 있어 지루함은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요구된다. 인류 역사에 있어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서 마찬가지로.
A: 그래, 취향이나 맛이나 절대 주관적인 거지. 그래서 그 주관성을 뛰어넘기 위한 시도들이 의미 있는 것 같아. 왜 아무리 제각기의 취향이나 미각을 가졌다고 해도 전반적인 합의가 이뤄지는 경우도 있잖아. '21세기 명작 100선'이라던지 '미슐랭 스타' 같은 표지는 그런 초월성을 증명해 준다고 볼 수 있지.
B: 거기에도 어느 정도의 반론은 있겠지만, 적어도 이것들은 우연히 같은 취향이나 입맛을 가진 소수만의 무엇은 아니라는 얘기니까.
#3. 맛있는 물, 명작
명작이라는 이름에는, 이 까탈스러운 제각기의 '취향'이란 변덕을 어느 정도는 모두 만족시킬만한 수준에 이르렀단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니 온갖 취향들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말의 무게를 이해한다면, 명작이라고 부를만한 것들은 얼마나 위대한지.
#4. 얼마만큼이나 다르다는 것.
인간이라는 종으로 같은 범주에 있는 탓에 우린 서로를 비슷한 존재로 보곤 한다. 하지만 독립적인 존재로써 개개인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다른 종과 다른 것만큼이나, 어떤 면에서는 그보다 더.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믿는 만큼 우린 더 자주 맞부딪친다. 우리는 매우 다양한 방면에서 매우 다르다. 결코 같지 않다.
#5. 취향이 같다는 것.
그럼 이 오묘한 ‘취향’이 같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때론 사랑에 빠지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꽤 좋은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불어넣기도 하는 그 겹침. 이 우연함은 아주 가볍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