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잠재적일 수밖에 없다
나는 수원에서 아산까지 통학으로 학교를 다니는 통학러이다. 지하철을 타고 통학을 하다 보니, 원치 않게 사람 구경을 하게 된다. 어떤 날은 졸고 있는 직장인을, 어떤 날은 통화 소리에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내는 사람을 보기도 한다. 그러다 가끔, ‘1호선 빌런’이라 불리는 존재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날도 평소처럼 학교 귀가 길에 지하철을 탔는데, 앞쪽 칸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젊은 남자와 노인 한 분이었는데,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젊은 쪽이 꽤 거칠게 굴고 있었다. 목소리가 커지고, 욕설이 오가고,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그때 사람들이 하나둘씩 휴대폰을 꺼내 들었고 일부는 상황을 휴대폰으로 촬영했고, 일부는 조용히 그 장면을 관찰하거나 아예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찍는 건 쉬웠지만 말리는 건 어려웠다. 그 젊은이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오히려 “찍어봐, 다 신고해 봐”라며 비웃듯 말했고 자리에 앉으려다 사람들이 슬그머니 피하자, 자신이 뭐라도 된 것 마냥 어슬렁 거렸다. 이 상황이 굉장히 이상하고 무서웠다. 모두가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했다.
‘무관심’이라는 단어가 이날처럼 구체적으로 느껴진 적이 없었다. 우리는 관심이 사라진 시대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반대인 것 같다. 너무 많은 관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쏠리고, 정말 필요한 순간에는 외면한다. 누군가의 사생활은 끝없이 파헤치면서, 정작 눈앞의 부조리엔 침묵한다. 어쩌면 ‘무관심’은 단순한 무심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방패일지도 모른다. 괜히 개입했다가 불똥이 튈까 봐, 괜히 나섰다가 ‘오지랖’이라는 말을 들을까 봐.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익숙하게, 그리고 능숙하게 외면하는 법을 배워버렸다.
생각해 보면, 이건 기술의 발전이 만든 결과인 것 같기도 하다. 화면으로 세상을 본다는 건, 세상과 나 사이에 유리막이 하나 더 생겼다는 뜻이다. 그 유리막은 안전하지만, 동시에 감각을 둔하게 만들고, 눈과 귀는 열려 있지만, 마음은 닫히게 되고, 관심은 있지만, 개입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인 방관자다. 언제든 누군가를 찍을 준비는 되어 있지만, 손 내밀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물론 모든 문제를 ‘무관심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용기와 판단이 동시에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날의 지하철 안에서 내가 느낀 건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일종의 체념에 가까웠다. “이런 상황에서는 나라도 조용히 있는 게 낫겠지.” 아마 다들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이 쌓이고 쌓여, 사회는 점점 더 무심해지는 것이다.
그날 이후로 지하철을 탈 때마다 한 가지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이구나. 잠재적 방관자, 잠재적 피해자, 잠재적 가해자이구나. 결국 우리는 불편한 장면 앞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쪽을 택하게 되고, 무관심은 방패가 되어 순간마다 사회의 온도가 조금씩 식는다는 게 참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