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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Doe Jun 09. 2022

어느 날 내가 서 있던 상상조차 못 했던 곳

2012년을 반짝이게 만드는 기억이 있다. ‘신들의 봉우리’ 늦은 오후 도서관에 앉아 그 책을 읽었다. 창밖에서 든 노을이 황금처럼 빛났다. 가끔 그런 순간이 있다. 정해진 시간에 약속된 행동을 하는 느낌이 든다. 인생에서 딱 한 번만 있을 것 같은 사건을 만나고는 한다. 시시하거나 사소해도 그때가 오면 느낄 수 있다.


아무튼 그건 히말라야 등반에 관한 다섯 권짜리 만화책이었다. 서사가 무척 흥미로웠던 것 같다. 일본인 알피니스트가 홀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도전하는 내용이었던가.


그렇지만 오히려 마음을 사로잡았던 쪽은 섬세한 그림체였다. 정교하게 그려진 건물들, 모든 선이 선명하게 이어져 있었다. 특히 산세를 그려낸 부분은 만화책일 뿐인데도 웅장해 보였다. 읽고 나니 히말라야에 가 본 적이 없는데도 희미한 향수가 느껴졌다. 


네팔행 비행기에 오른 것은 그로부터 6년이 지나 초여름이었다. 어느 날 대학교 동기가 히말라야에 오르자고 말했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가벼운 목소리였다. 뒷산에 가자고 말할 때도 같은 무게였을 것이다. 비행기 표를 예매하는 순간까지도 현실감이 없었다. 사실 지금도 내가 정말 네팔에 갔다 온 것인지 의심스럽다.



18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직항을 택할 만큼 여유로운 형편이 아니었다. 중국을 경유하는 저가 항공이 절반 정도 저렴했다. 왕복 비행기 삯이 100만 원 안팎이었을 것이다. 저녁에 청도에 도착했고, 거기서 8시간 정도 머물러야 했다. 구석진 곳 안마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읽을 만한 것을 가져가긴 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뜬 눈으로 무료한 밤을 지새웠던 것 같다.


그 밤이 온전히 지나가고 나서야 간신히 네팔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공기에서 다른 향이 났다. 내가 모르는 어떤 향신료 냄새처럼 느껴졌다. 그냥 기분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숙소에서 픽업 차량이 나왔다. 그들은 웃고 있었고, 생화로 만든 목걸이를 목에 걸어주었다. 금잔화처럼 보였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이국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들은 모두 영화에 나올 것 같았고 생소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신호등 없는 도로가 오토바이와 차들로 빈틈없이 북적였다. 그들의 표정이 너무 무심해서 내가 이방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거울이 있었다면 거기 비친 얼굴은 옅은 분홍색이었을 것이다.


숙소는 같이 갔던 선배가 고른 곳이었다. 예전에 사원이었다고 들은 것 같다. 곳곳에 예스럽고 고요한 느낌이 깃들어 있었다. 정교한 석조와 나무로 된 창틀이 인상적이었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에는 힌두의 신들이 매달려 있었다.



방을 구경한 다음 거리로 나갔다. 마침 축제 기간이었다. 사람들을 위해 사원에서 평생을 보내는 어떤 신녀가 있다고 들은 것 같다. 아마 평생 이국의 풍경을 볼 수 없겠지. 그녀가 신에게 바친 자유를 숨 쉬듯 당연하게 누리며 나는 걸었다. 어쩌면 우리는 타조와 까마귀처럼 서로 다른 생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거리에는 볼 것이 많았다. 썰물처럼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향불이 일렁였다. 전신주가 휘청거릴 만큼 육중한 전선을 이고 있었다. 선사시대부터 자란 고목처럼 보일 정도였다.



비좁은 골목을 달리는 차들은 매드맥스의 폭주족처럼 굴었다. 같이 걷던 선배가 간신히 차를 피해 발등을 건사했다. 신녀가 살펴준 덕이었을까. 그렇지만 선배는 감사 대신 따끔한 단어들로 운전자의 뒤통수를 쏘아붙였다. 그것이 그날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언어였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어떤 단어도 알아들을 수 없어서,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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