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멘털 관리'가 가장 힘들다.
“으~ 쌉쌀하고 달달하니 좋다.”
매일 아침 엄마와 나는 식후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나는 카누 미니 하나에 물 적당량. 엄마는 반 개를 넣고 설탕은 두 스푼...ㅎㅎ
사계절 변함없는 우리의 커피 레시피다.
커피 한 모금 마시고 하는 엄마의 말 또한 날마다 똑같다.
“커피는 뜨거울 때 마셔야지.”
지난밤을 어떻게 설쳤든, 아침에 일어나 온몸 여기저기 통증이 몰려온다 해도, 커피 한 잔 마시는 그 시간, 우리는 평화를 누린다.
사실 수술 후 엄마는 한참 동안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수술 후 먹는 약의 가짓수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고, 정형외과 약을 먹지 않게 된 이후에도 수면장애가 심해 카페인은 최대한 피했던 것이다. 하지만 몇 달 전부터는 그냥 먹기로 했다. 무엇보다 식후 커피 한 잔 마시는 그 시간의 평화를 즐기는 게 중요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뭘 가려. 얼마나 살지 모르는데, 먹고 싶은 것 먹고살아야지.”
엄마가 자주 하는 말이다.
우리도 카페인이니, 위장이니 그런 것 따지기보다 엄마 마음의 평화를 우선 생각하기로 했다.
수술 후 거동이 불편해진 지금까지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엄마가 좌절하는 것이었다. 그 누구보다 주도적이고 활발하게 움직이던 동네 인싸이자 동네 달리기 1등이었던 엄마가 걷지를 못해 집안에만 있는 현실은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엄마도 적응하기 쉽지 않았을 터였다. 우리에게 미안해 최대한 표시 내지 않는다 해도,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한숨과 좌절의 말들은 있기 마련이다. 우린 엄마가 그렇게 좌절에 빠질까 봐 겁이 났다.
대소변을 받아내는 건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멘털 관리’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잠시라도 엄마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우리에게 미안해하며 속상한 것이 싫었다. 그런 점에서 동생과 둘이라는 게 참 다행이었다.
프리랜서인 나는 회의와 녹화가 있는 날 외에는 집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집에서 일을 할 때면 컴퓨터를 엄마 옆에 놓고 일을 했다. 엄마는 내가 일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했다. 자신 때문에 우리가 뭔가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도 위안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24시간 당신과 붙어 있어야 하는 걸 미안해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우리가 하는 말이 있었다.
“엄마, 인생 총량의 법칙이란 게 있대. 난 어렸을 때 엄마랑 같이 못 있어서 지금 같이 있는 거야.”
시골 오지에서 자란 우리는 중학교를 졸업하면 인근 도시의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하지만 난 인근 도시로 가지 않고 멀리 떨어진 수도권으로 와야 했다. 80년대, 교통이 지금처럼 좋지 않아 방학 외에는 집에 갈 수가 없었다. 그나마 보충수업이 있어 며칠 있다 올라와야 했다. 인근 도시로 진학해 주말마다 집에 오는 친구들과 달리 가족을 볼 수 있는 날은 1년에 며칠 되지 않았던 셈이다. 우린 그때 함께 하지 못한 시간을 지금 보충하는 것이라며 엄마와 옛 일을 추억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럼 시간은 몽글몽글 즐겁게 흘러갔다.
내가 일을 하는 동안, 혼자 누워 있어야 하는 엄마를 위해서 우린 유튜브와 OTT를 활용했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은 ‘안 싸우면 다행이야’ ‘인간과 바다’, 그리고 ‘우리말 겨루기’였다. 그만큼 엄마는 바다와 퀴즈를 좋아했다. 그래서 유튜브를 통해서 치매 예방을 위한 ‘단어 찾기’ 게임을 하고, 넷플릭스에서 ‘도시 어부’ 시리즈를 시청하기도 했다. 그러다 우리가 새로 발견한 엄마의 취향은 각종 체력 서바이벌이었다.
‘피지컬 100’ ‘강철부대’ 등 생각지도 못했던 프로그램을 엄마는 좋아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이 모든 게임과 프로그램을 엄마 혼자 보면 그다지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쁜 일이 끝나면 우린 가능한 엄마와 함께 단어를 찾고 TV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가 혼자 멍하니 TV를 보는 모습을 보면 괜히 마음이 아파져 같이 앉아서 감탄하고 품평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또 하나는, 뭐라도 엄마가 할 일을 찾아주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하지도 않던 김치를 담그자며 엄마를 휠체어에 태워 시장에 가서 배추를 사고, 집에 와서 함께 김치를 담갔다. 음식을 할 때도 채소 손질 등 앉아서 할 수 있는 건 가능한 엄마를 시켰다. 엄마가 먹고 싶다는 게 있으면 재료를 사 와 엄마의 지시를 받으면서 만들었다. 빨래 개는 것부터 김치 담그는 것까지 엄마는 자신이 할 일이 있을 때,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직장에 다니는 동생은 퇴근해서 올 때마다 엄마가 좋아하는 간식을 사 오고,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며 엄마와 시간을 보냈다. 동생은 춤도 늘었다. 너스레를 떨며 때로는 엄마 앞에서 장난처럼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며 우린 함께 웃었다. 하루 종일 둘만 있다가 동생이 퇴근해 오면 엄마는 신나 했다.
“우리 딸, 오늘도 고생했다.”
문을 들어오는 동생을 엄마는 늘 이렇게 맞아줬다.
동생은 들어오자마자 엄마에게 다다다 다가와 어떤 간식을 사 왔는지 보여주고, 얼른 먹어 보라며 채근을 한다. 그러면 이내 집은 시끌벅적해진다. 동생은 욕실에서 씻으면서도 큰소리로 엄마에게 말을 걸고, 엄마와 난 동생이 사 온 간식을 먹으며 맛을 품평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일 때문에 나가는 날이나 주말이면 언니들이 먹을 것이나 옷 등 엄마 선물을 사 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멀리 사는 오빠와 남동생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이 24시간을 채울 수는 없는 법. 엄마는 우리가 속상할까 봐 표시 내지 않으려 하지만, 수시로 표정이 어두워졌다. 화장실 갈 때마다 허리를 잡고 뒤를 따르는 우리에게 미안해했고, 걷기 운동을 할 때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자주 듣다 보면 나 역시 속이 상하고 때론 짜증이 나기도 했다. 아마 혼자서 엄마를 돌봤다면 이런 마음 때문에라도 쉽게 지쳤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럴 때면 또 동생이 농담도 하고 춤도 추면서 우리를 웃게 했다.
동생과 난 우리 자신의 체력 관리와 멘털 관리에도 힘을 쓰자고 수시로 서로를 독려했다.
“우리가 지치면 안 돼.”
당시 가장 많이 했던 말 중 하나다. 우리가 지치면 엄마를 돌보는 건 더 힘들어지고, 우리가 힘들어하면 엄마는 더 힘들어할 게 뻔한 일. 그래서 우리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지치지 않기 위해 조절하는 것을 무엇보다 중시했다.
우리가 지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지금도 그리 힘들지 않게 보낼 수 있는 가장 큰 비결이 아니었을까?
거기에 6남매가 늘 한 마음으로 엄마를 생각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려 했던 마음이 더해졌던 것도 컸다. 어떤 이들은 서로에게 미루고 원망하는 경우도 있다는데, 우리 형제자매들은 엄마와 함께 있는 우리를 믿어줬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먼저 나서서 해 주었다.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우리의 생활은 무너지지 않았고 엄마와의 동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 사람의 일. 모르기 때문에 더 멀게 느껴지는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