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구겨진 책을 구입하면서

by 설영

<우리는 조금 더 다정해도 됩니다> 서평에세이.

- 구겨진 책을 구입하면서


서점에 책을 사러 갔다. 인터넷으로 주문할 수도 있었지만 배송받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당장 다음 주에 온라인 북토크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겸사겸사 오프라인으로 사기로 했다. 출간된 지 몇 달 안 된 신간이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에세이 매대에 깔려 있을 줄 알았다. 표지를 알고 있던 터라 눈으로 훑으면 바로 찾아낼 수 있었을 텐데 몇 번 둘러봐도 없었다. 에세이 벽면 서가로 가서야 [우리는 조금 더 다정해도 됩니다]를 발견했다.

2권이 꽂혀 있길래 무심코 한 권을 빼들었다. 뒤쪽 띠지가 조금 손상되어 있었다. 다시 넣고 다른 한 권을 다시 뺐다. 이번에는 앞 쪽 띠지가 구겨져 있었다. 함께 책을 고르던 남편은 “이 책은 심지어 누가 한참 읽다가 꽂아둔 티가 너무 나는데?”라며 같이 난감해했다. 나도 살짝 망설이기는 했으나 “이 책이 좀 더 다정해도 된다잖아. 내가 읽은 표시도 나고 띠지도 찢어진 이 책을 사지 뭐. 그럼 나도 좀 다정한 사람이 되는 느낌이 날 것 같아.”

옷을 사러 갔을 때 입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아주 약간 하자가 있는 상품이라면 매장에서도 약간 더 할인을 해주기도 하니까 서점 직원에서 물어보기는 했다. “이 정도 띠지 손상되어 있는 책은 그냥 감안하고 사야 하는 것인가요?” 서점직원은 “네, 일단은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건 따로 없고 아니시면 새로 주문해 드릴 수 있어요.”라고 응대했다. “아니요, 그냥 제가 이거 살게요.”하면서 안쪽 페이지를 넘기면서 계산대로 향했다.

놀랐던 부분은 내가 방금 색을 사면서 약간의 망설였던 순간에 대한 내용이 책에 고스란히 나왔다는 것이다. 남편을 급히 불러 이 부분 좀 보라면서 해당 페이지를 보여주었다. 같이 갔던 아이들도 우리 부부가 눈이 동그래져서 책을 들여다보니 궁금해서 “뭐야? 뭐야?”하며 내가 펴 들었던 페이지로 몰려들었다.

[나는 서점에서 책을 살 때면 책의 상태를 잘 살핀다. 그러고는 일부러 적당히 더럽거나 표지가 구겨진 것을 고른다. (중략)

책이라는 물건은 책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중고품이 되고 그 티가 나기 마련이다. 다시 판매할 수 없게 된 책들은 수거되어 출판사로 반품되고 모두 폐기 처리된다. 그러나 서점은 훼손된 책에 대한 비용을 부담하지 않는다.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책임이 분명히 있을 텐데, 팔 수 없게 된 책을 출판사에 보내고 나면 그만이다.

김민섭, 우리는 조금 더 다정해도 됩니다 <북카페가 된 대형서점> p.140-144]

저자는 북카페처럼 변해버린 대형 서점이 책을 사기보다 읽고 보는 쪽으로 공간을 구성해 놓고 손상되기 쉽게 영업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손상이 된 부분에 대해서 서점은 일절 책임지지 않고 출판사로 쉽게 반품하는 행태를 비판했다. 그럼에도 ‘읽는 서점’을 표방하는 영업 방침을 없애기보다는 일정 부분 함께 책임지는 형태로 바뀌면 좋겠다 바람을 담았다.

나도 대형서점에서 책을 얼마나 들춰보았던가를 생각해 봤다. 아예 랩핑 되어 있는 책이 아니라면 마음에 부담 없이 하루에 수십 권도 더 책을 펼쳐 들었던 것 같다. 그중에는 너무 마음에 들어서 샀던 책도 있고 몇 장 읽다가 덮어버린 책도 있었지만 그런 행위들이 누적되어 더 이상 판매될 수 없을 때 그다음의 절차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만약 이 책이 다정함이나 선함과 상관없는 다른 책이었다면 나는 과연 그 책을 샀을까 반문해 보았다. 아마 나는 최대한 깨끗한 책을 골랐거나 안 샀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제저녁에 사서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는 길, 오자마자 앉아서 단숨에 한 권을 읽었다. 책을 읽을 때 느끼는 온도가 마치 낮의 꽃기운 같았다. 봄꽃이 터지기 시작하는 따뜻한 24도. 법 없이도 살다가 호구된다는 이야기가 인생 꿀팁처럼 통용되는 냉랭한 요즈음에 이런 이야기가 너무너무 반가웠다. 나도 피해 끼치지 않을 테니 사소한 피해라도 내게 절대적으로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너도나도 아우성치는 세상에서 나는 나의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그깟 띠지 좀 찢어진 책을 사는 걸로 대단한 유세라도 되는 양 글을 쓴다고 비난할 사람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고작 그 정도의 행위들이 세상을 더 따뜻하게 만든다고 확신한다.

그런 다정한 ‘유세’라면 대환영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는 기꺼이 너희의 배경이 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