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있는 것을 해야 합니다. 라는 말을 들었다. 관심의 의미는 이끌려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 단지 끌려서, 시작하는 것이 더 쉬워진다면 그 과정이 그렇지 않은 것을 할 때보다 더 자연스럽고 편해 보일 수 있다.
다만 결과가 좋아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끌리는 것과 끌리지 않는 것을 하는 것. 두 가지 방향 모두 원하는 결과를 얻을 확률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든, 관심 있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즐거운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다. 그럴 때면 맘껏 응원해주고, 같이 좋아해왔다. 다만 그것이 끌려서. 라는 전제가 필수는 아니었다. 나는 관심 있거나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 것을 잘 못하거나, 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에 가깝다. 그리고 생존에 유리한 것들을 해 왔다. 사는 것과 좋아하는 것 사이. 그런 것들이 나를 만들어왔을 것이다.
나는 또래에 비해 생존능력이 떨어진다. 독립한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전기세나 가스비 내는 것을 까먹어서 연체 비용을 더 내기 일수고, 재태크도 하지 않고, 실생활에 유용한 정보도 잘 모른다. 내 월급도 잘 몰랐는데, 몇 년 전부터 정신 차리고 월급여를 보기 시작했다. 어떤 순간에는,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는 어떤 사람들의 대화 맥락을 잘 읽을 수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곤 하는데 나중에 생각하면 이 컨텍스트가 이런 의미였지. 라고 알게 된다. 이런 것들은 내가 관심을 가지지 않지만 알아가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취향이 없느냐. 그건 아니다.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을 뿐, 내 대화 방식이나 말투에서, 먹는 것이나 입는 것, 내가 사는 곳이나 머무는 곳, 주로 가는 곳에서 묻어났을 것이다.
사실 전에는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하는 일은 의사결정을 위해 의견을 들어야하고, 회의도 많다. 그 의견을 취합해서 분석하고 원하는 목표로 가기 위해 추려내야 한다. 그래서 머리 속은 자주 시끄러웠다. 광화문에 있는 회사를 다녔던 시점에는 야근이 잦았고, 광화문에서 성북동 집까지 오는 길은 자주 컴컴했다. 차 안은 너무 조용해서 귀가 아플 지경이었는데, 오히려 편안했다.
전에 명동 성당을 보고 난 뒤, 집에 와서 성당을 잘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랫만에 명동 성당에 갔다. 다시 본 성당은 내가 스케치한 것보다 더 크고 높았다. 명동 성당으로 가기 위해 오르는 계단의 수도 적절해 보였다. 그리고 성당 건물 지하에 동굴 같은 작은 성당이 있었다. 촛불이 켜진 곳에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분위기에 압도되었는데, 광화문 회사에서 집까지 차로 운전할 때와 같은 고요함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각자의 차에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보니, 끌리는 것도 거의 생존에 가까운 수준이다. 수도원에 가야하나.
오랜만에 본 명동 성당은 조용하고 묵직하고 컸다. 집에 오니 엄마가 전화를 했다.
"너 내일, 모레 휴가라고 했는데. 회사 그만둔 거 아니지? (성당에 코빼기도 안비치던 네가) 왠일로 성당?"
"아니야. 좋아해서 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