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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독언 Aug 04. 2023

우리는 왜 예술을 예술 그 자체로 바라보지 못하는가

2023년 더 테일 에이프릴 풀스 후기

분명 본 뮤지컬을 다시는 관람하지 않겠다고 한 말을 들은 지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후기를 적는 것이 참 부끄럽고 민망하기도 하다. 이번 이슈에 다시는 관람할 일이 없을 것이라 못을 박았으나 기어이 후기를 적는다.


초연 때부터 불만족스러운 것이 있더라도 공연 자체는 즐거운 마음으로 관람했다. 그 때문일까? 이번에 돌아온 <더 테일 에이프릴 풀스> 재연의 마지막 공연까지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사뭇 아쉽다. 개인적인 일정과 공연 일정이 잘 맞지 않아 작년처럼 열정적인 관람을 할 수는 없었으나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만족스럽게 떠나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올해는 공연 관람에 대한 마음가짐이 작년과는 사뭇 달라졌다. 작년의 내가 이 극을 어떻게 해석하고 분석했는지가 궁금하다면 본 게시물 본문 하단에 첨부된 링크 내부에서 확인해 보기 바란다.


이미지 출처 = 쇼노트 공식 SNS


이제는 전처럼 애정 어리고 서툰 마음으로 공연을 전반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포스팅을 잘하지 않는다. 공연을 관람한 뒤에 후기를 적는 것도 나에게는 열정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사실 체력의 영역이었다.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들을 달리 표현하자면 공연을 소비하는 소비자가 아닌가. 그러니 소비자의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이제는 무엇인가를 평가하고 개인적인 값어치를 매기는 것도 피곤하다. 견식이 좁고 내 생각에 확신을 느끼지 못하니 더욱 그러할 만하다.


거의 반년의 시간 동안 약간의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누구는 나에게 작년에 비해 올해는 공연에 대한 흥미를 많이 잃은 것이라고 말했으나, 잘 모르겠다. 단순히 횟수로 애정의 척도를 결정하기에는 지금이 훨씬 더 즐겁고 행복하다. 거리를 둔다는 것이 애정이 식었다는 것도 아니고, 흥미가 떨어졌다는 것 또한 아니다. 그저 행복이라는 의미가 함유된 취미인 만큼 힘든 것도 행복한 의미에서의 힘겨움이어야 한다. 티켓팅이 힘들다거나 나는 서울에 거주하고 있으니, 집에서부터 혜화까지의 왕복이 어렵다거나 이와 같이 그저 웃어넘길 수 있던 사소한 고민들과 같은 것들. 그러나 나에게 피로감을 준다면 그것은 내가 제대로 된 공연관람을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러니 내가 공연 관람 횟수를 어느 순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리면서 내가 좋아하는 배우의 회차를 관람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것이 어떨 때에는 나에게는 큰 피로함으로 다가왔다. 작년에는 공연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과 함께 어떠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애정은 여러 가지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니 그저 행복하다. 적당한 거리와 적당히 나와 타협을 하는 선에서 공연을 관람하니 즐거움은 배가 되었다. 작년과 나는 공연을 대하는 태도도 제법 달라졌으니 같은 공연을 보더라도 당연히 시선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물론 당연 작년보다 후퇴한 부분도 그저 제자리걸음을 하는 부분도 물론 있겠으나 일단 공연에 대한 시각이 많이 달라졌다. 그러니 항상 하나의 작품을 분석하고 내 생각에 결론짓는 것을 좋아했다면 올해는 그저 여러 가지 작품들을 관람하고 가볍게 가슴에 남길 것들만 남기는 것 또한 즐겁다. 그러니 관람 후기는 좀 뜸하긴 했다. 작년의 나는 본 작품을 솔직한 자신의 진심을 알아가고 인정하면서 한층 성장하는 것에 무게를 두었다면, 올해의 나는 이 작품을 퀴어함과 작품 자체의 예술성에 초첨 맞춰 관람했다.


작년부터 이 작품이 만족스러웠던 것은 고전적인 매력을 잘 살린 세련된 뮤지컬이라는 것이다. 특히 조명 연출에 대한 것은 늘 좋다고 말하지만 최근 '단도와 몽유병' 넘버에서 존이 거울을 바라보는 장면에 벽에 반사되는 초록색의 조명이 질투의 눈을 연상하게 하여 더욱 좋아졌다. 비교적으로 최근에 나온 뮤지컬이나 연극 중에서도 구체적인 이유를 알 수 없이 낡았다고 여겨지며 촌스럽게 느껴지는 작품들이 있다. 그러나 본 작품은 그렇지 않았다. 관객들에게도 해석할 여지가 충분히 열려 있는 작품인 만큼 배우들이 연기하는 캐릭터들도 모두 다르게 읽히기 때문에 넘버도 무대도 연출도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이미지 출처 = 쇼노트 공식 SNS


초연을 보면서는 처음에는 단지 둘의 관계성을 동등하지 못한 관계에서 오는 불협화음으로 해석했다. 바이런은 무책임하다. 미덕과 자선을 운운하며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고 인간은 나약하다고 결론짓는 행위가 무책임하지 않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쥐어준다고 말하지만 결국 책임은 지지 않는다. 내 눈에는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도움을 주지 않는 바이런의 태도가 단순 타인을 흥미요소로 대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새롭게 돌아온 재연에서는 이상적인 현실과 문학적인 가치에 대한 둘의 사상과 가치관의 대립, 또한 그것이 둘의 관계를 어떻게 갈라놓는지 그것이 더욱 돋보였다. 그러니 둘의 관계가 동등하지 않을 수 있고 그게 현실이라지만 그것이 해석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한가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만약에 존이 적은 소설이 실로 아름다운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바이런이 그렇게 격분했을까? 물론 본인을 뱀파이어와 루스벤으로 묘사하긴 했으나 본 작품을 관람하면서 종종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영원토록 본인이 시에 박제하는 것이 변치 않는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는 바이런이 존과 이 부분으로 대립한다는 부분이 또 하나의 재밌는 부분이지 않을까.


둘에 대한 해석이 변했던 것은 바이런의 추궁에 모르핀을 마시려던 존의 모습에서였다. 모르핀을 마시는 것이 두통에 대한 해결방법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의학적 지식이 무지했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면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인 존이 다시금 모르핀을 마시려고 하는 행위는 단순히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의 도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 존이 모르핀을 마시려고 하는 장면에서 바이런이 존을 만류하는 장면은 그저 존을 걱정하는 목소리로 들렸다. 하지만 단순히 이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던 이 장면이 결국 나를 본 작품의 후기로 적게 만들었다. 내가 연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폭발적으로 터지는 에너지 덕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 에너지가 너무 과하면 피로하게 만드는데, 내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들을 충분히 이해하게 만들고 같이 벅찬 감정을 이해하고 토해내게 만드는 것이 예술의 어떤 하나의 역할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연극 <폭풍의 언덕>에서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에게 했던 '날 버린 널 용서해, 날 죽인 널 사랑해, 하지만 널 죽인 널 용서할 수가 없어'라고 말한 대사가 문득 생각났다. 나는 다른 작품들과 기묘한 기시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동일한 이해 요소를 요구하는 면에서의 연결점 찾는 것을 좋아한다. 앞서 설명했듯 <더 테일 에이프릴 풀스>라는 본 작품에서 이 장면이 항상 존이 목숨을 잃을까 봐 단순히 걱정하고 다그치는 목소리라고 생각되었다면, 지금은 바이런의 걱정이 존이 존 자신을 자학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 분노로 느껴졌다. 진심으로 상대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분을 토해내는 듯한 목소리였고, 나는 그래서 그게 좋았다. 또한 이 연기 디테일로 존이 바이런을 생각하고 절망하는 마음을 더욱이 이해할 수 있었다. 본 작품의 두 인물 모두 실존하는 인물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긴 하지만 창작으로 새로 풀어낸 만큼 캐릭터에 대한 해석은 개인의 자유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 장면이 바이런에게서 비롯된 장면인지 혹은 루스벤에게서 비롯된 장면인지를 말하라고 한다면 본 작품의 장점인 열린 해석에 달려 있지 않을까. 정말 존이 바이런을 사랑했다면 그것은 그 작품의 특성 중 하나일 뿐이고, 캐릭터를 해석하는 배우와 그것을 보고 판단하는 관객의 몫일뿐이다. 이 장면 이후 '이제는 더 이상 싸우지 말자' 넘버 이후 존이 바이런에게 날이 선 모습을 보였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도 하다. 진심의 무게가 다른 것이 눈에 보이면 실망하게 된다. 바이런이 보이는 태도는 본인의 진심이 어떠하든 결국 장난처럼 보였을 것이고, 그것이 존에게는 상당히 실망스러운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거부하고 밀어내는 것이 어느 정도의 방어기제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지 출처 = 쇼노트 공식 SNS


최근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감상한 뒤 친구에게 키워드로 설명을 하려다가 주저한 적이 있다. 어떤 자극적인 요소들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파장이 덜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자극적인 요소들로 하여금 관객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득하는 것이 예술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굳이 관객들이 원한다는 이유로 이런 예민한 요소들을 이야기 속에 욱여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것을 높은 가치로 판단할 수는 있으나 당사자들이 상처받고 괴로워한다면 그것이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에게 이상의 존재는 있다고 생각한다. 이안테가 여성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에 초연을 관람했을 때에는 존이 혹시 여성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잘 모르겠다. 우리 또한 본인의 모습에서 만족하지 않고 실로 이상적인 존재를 그리는 것은 우리 또한 한 번씩 해보지 않았는가. 나 또한 종종 진실로 누군가가 되길 꿈꿨으나 그렇다고 하여 남성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본 작품의 경우 대학로의 상업극이 가지는 특성을 모조리 가지고 있으나 단순히 자극적인 흥미요소만으로 관객들을 유치하는 작품이냐 묻는다면 단호하게 아니라는 답을 내놓을 수 있다. 물론 한 번만 관람해서는 쉽게 관객 스스로 판단하고 해석할 수 없을 만큼이나 복잡하게 베베 꼬아놓았기 때문에 여러 번 뮤지컬을 봐야 생각이 확립된 다는 것은 참 안타까울 노릇이다. 여러 번 뮤지컬을 반복하여 관람했을 때에 해석하는 데 있어 깊이가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지만 관객들이 하나의 뮤지컬을 여러 번 반복해서 보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연출들은 때로는 열이 받기도 한다. 관객들이 작품을 향유하는 것에 있어서 모두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듯 어떤 면을 통해 소비를 하든지 비난할 생각도 없고 솔직히 말하자면 비난할 자격도 없다. 그러나 관객들이 단순 그런 호기심을 통해 뮤지컬을 관람하느냐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라고 답하고 싶다. 호기심이라는 단어를 적고 나니 본 뮤지컬에서 호기심이라는 단어를 어떤 장치로 이용했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 단어를 통해 나는 본 극을 퀴어함에 초점을 맞춰서 해석할 수 있었다. 실상 퀴어극이라고 부르기에는 많이 우스우나 비슷한 결을 하고 있다는 것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지 않은가? 우리는 왜 예술을 예술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것들 중 가장 값비싼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생각하고 창조할 수 있는 예술적 사고라고 생각한다. 점 하나만을 바라본다면 그저 점에 지나지 않으나 그 점들이 모인다면 점묘화처럼 아름다운 예술이 되는 것처럼 뮤지컬도 그러하지 않은가? 점들이 모여 단순히 오합지졸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면 점 하나에는 그러한 가치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니 뜬금없는 말이긴 하나 나는 작품 전반을 보는 것이 좋다. 애드리브 하나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연기는 집중력을 흩트려 놓을 뿐이다.


친절한 극들이 더욱 많이 필요하다는 것은 정말 꾸준한 목소리였다. 배리어프리적인 면에서도 친절한 극은 정말 필수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앞서 말한 이유들을 벗어나 종종 너무 친절한 극들은 관객들에게 본인이 해석하고 분석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간다고 생각한다. 물론 충분히 잘 만든 극들은 그게 무엇이든 좋은 작품으로 남겠으나 때로는 해석할 여지가 열려 있는 극들도 참 즐겁다. 아직도 불에 탄 종이 조각들을 존에게 흩뿌리며 나비 같다고 말하는 장면과, '아름다웠던 순간들 추한 순간들. 그 모두 다 가슴에 묻자고. 죽는 건 순간일 뿐 이야기라는 영원한 비석에 날 새기는 게 두려웠으니' 이 넘버는 매번 나를 설레게 한다.


작년의 후기를 남긴다. 이것도 많관부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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