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나는 사람을 보는 눈이 참 없다
엄청나게 좋아한다는 감정은 대체 무엇일까.
좋아한다는 감정과 사랑한다는 감정의 차이는 그리 어렵지 않다. '00를 사랑해'라는 문장에 이것저것 대입해 보면, 어느 순간 경계가 명확해진다.
얼마 전 전 남자 친구를 만났을 때, 나는 문득 "내가 벅찬 사람이야?"하고 물었다. 실은 이 대화를 나눌 당시 내가 벅차다는 누군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나의 애정이 약간은 부담스럽다고 했다. 전 남자 친구는 잠시 고민하다가 "응"이라고 대답했다. 연애할 적 내가 잘해줬다는 걸 그도 알았고, 나도 알았는데 "응"이라니.
"왜? 내가 너 엄청 좋아했었잖아. 잘해줬잖아!"
"그것 때문에."
깊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길게 사귀지는 않았다. 모호한 관계로 총 11년을 알고 지냈지만, 사귀던 기간은 모두 합쳐서 총 20일 혹은 50일 정도였던 그런 연애.
그런데도 처음 사귀었던 학생 때부터 스물 중반이 된 지금까지 연락은 끊지 않았다. 딱 스물이 된 날에, 내가 처음으로 취할 만큼 술을 마시고―학창 시절 종종 일탈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늘 맥주 한캔 정도에서 그쳤으므로―그에게 미안하다며 전화를 걸었다. 늘 그와의 관계에서 미안한 사람은 나였다. 으레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 그도 잘못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늘 그에게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음주 후 전화를 거는 것은 하나의 습관이 되었고, 그는 늘 나의 전화를 받았다. 스무 살에 맞는 다소 고약한 주사였다. 이 습관을 고친 것은 스무 살을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에게서 '이제 정말 그만하자'라는 통보를 듣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어느 때처럼 다시 전화를 걸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을 즈음, 머리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내가 그의 전화번호를 지운 것은 그를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내게는 그가 나를 계속 받아주는 것이 문제였고, 마음 한편에서는 그가 나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어느 날 내가 정말 필요할 때 그가 나의 전화를 받지 않을까 봐. 그러니 이기적이게도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그때 나는 술기운을 빌려 그의 전화번호를 가차 없이 지워버렸고, 지금까지 그와의 관계에서 내가 한 행동 중 잘한 행동 중 하나였다.
그리고 다시 지금이다. 성격이 급한 내가 따지듯 되물었는데, 그의 답은 타당한 것이었다.
"너는 120만큼을 줄 수 있는 사람인데, 나는 늘 80밖에 주지 못하잖아."
실은 나도 이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이야기로 이 문제에 관해서 설명하자면, 근래 사람을 ‘과하게’ 좋아하지 않는 연습을 하고 있다. 이건 하나의 나르시시즘적인 측면. 상대에게서 내가 보고 싶은 모습을 상대에게 투영하고, 굳게 믿고 신뢰해 버리는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통감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대하기 시작하자―거울 치료는 늘 정답을 가져다준다.―그를 좋아하는 나로서 그 환상을 깨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이 대체 무엇일까 저울질했다. 그리고 기어코 그는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늘 어떠한 키워드와 프레임 속에 상대를 가두느라 상대를 제대로 보는 법을 몰랐다. 그러면서도 한번 마음을 열면 평범하지 못한 정과 애정을 온통 다 퍼부어버리는 것이다.
때로는 미련하고 때로는 집착적이다. 상대에게도 좋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자기 파괴적인 방식임을 알고 있어 나에게도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런 면을 탈피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마음을 비워내는 명상과 상대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계속 글을 적겠지만, 상대를 분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아주 사소한 행동과 습관, 표정, 말투들을 분석하면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에 대해 골몰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나의 음침함을 덜어내기는커녕 더 큰 환상 속에 상대를 가둬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사람을 보는 눈이 참 없다.
누군가를 내 환상 속에 가두지 않고, 엄청 좋아하는 방법이 과연 있을까. 잘 모르겠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는 능력이 나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잘 모르겠다. 때로는 나의 이런 모습이 스스로 질리기도, 때로는 우습기도, 때로는 한심하기도.
나의 장기가 누군가를 한번 좋아하면 나의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그랬다. 그러나 때로 그것은 상대에게 부담이 되고, 상대는 나의 '적당한 애정'과 '적당한 사랑'을 바라는 것이다. 돌려 말한다면 과한 배려였고, 솔직히 말한다면 나의 애정은 늘 그 사람이 원치 않는 방식이었다. 부담을 가지게 하는. 그 사람도 나를 챙기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텐데, 나는 늘 식당에 들어가면 상대를 안쪽에 앉히고 수저를 세팅하고 물을 따라주는 사람이었다. 내가 아니면 안절부절못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러니 아직도 받는 법은 잘 모른다. 실제로 전 남자 친구에게는 실제로 어떤 트라우마까지 안겨준 것 같다. '누군가 날 이렇게 좋아하는 것이 마냥 달가운 일은 아니구나'라고 하는. 사실 이 점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그 또한 나에게 하나의 선물을 주고 떠났다. 이성적인 관계에서의 누군가 나의 손을 맞잡으려 하면 가장 먼저 거부감이 들어버리는 하나의 버릇이자 습관.
고작 사람과의 차이일 뿐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통상적으로 사람은 모두 다르므로 생기는 차이. 그러나 이렇게까지 잘 맞지 않던 우리는 꼬박 11년을 넘게 만났다.
반추하는 습관을 고치려 했으나, 일기를 적으며 다시 반추한다.
그래서 '엄청 좋아'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