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결국, 우리가 계획하지 못한 순간들로 완성된다.
여행을 하면 나는 부지런한 사람이 된다. 집에서는 아침부터 밤까지 느릿느릿 움직이면서도 낯선 곳에만 오면 이상할 만큼 부지런해진다.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하루를 채우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럴 때면 나도 충분히 부지런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여행지에서 자주 깨닫는다.
이른 시간에만 만날 수 있는 색깔의 하늘을 보며 하루의 일정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미리 예매해 둔 벨베데레 궁전 입장권 덕분에 마음도 한결 가벼웠다. 현장에서 발권하지 못하면 이후 일정이 흐트러질 수 있어서 미리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은 가능한 한 예약해 두는 편이다. 부지런히 움직여 처음 도착한 곳은 까를 성당. 공연으로도 유명한 곳이었지만 시간을 맞추기 어려울 것 같아 내부만 둘러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개방 시간을 잘못 확인하는 바람에 결국 안으로 들어가보지도 못한 채 돌아서야 했다.
“멋있어.”
바로크 건축양식이 어떻고, 역사적 배경이 어떻고 하는 설명은 우리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에 대해 아주 단순한 감상만 남겼다. 하늘이 파랬다면 더 멋있어 보였을 텐데. 잔뜩 흐린 하늘이 조금 아쉬웠지만, 비가 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벨베데레 궁으로 향하던 길에 작은 동네 마트에 들렀다. 입장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고, 정원에서 소소한 피크닉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방울토마토가 한 알씩 떨어져 있는데, 이곳의 토마토는 줄기에 매달린 채로 팔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신선함을 오래 유지하기 위한 방식일까, 짐작해보기도 했다. 마트 구경의 재미는 역시 낯선 것들에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시리얼과 과자들 사이를 천천히 둘러보는 일. 하나하나 다 맛보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우리는 요거트와 초코바만 간단히 골랐다. 차가운 날씨에 야외에서 오래 머무르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도착한 벨베데레 궁전. 먼저 정원을 걸어보기로 했다. 관광객뿐만 아니라 현지인들도 자주 산책한다는 이곳은 무척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길게 늘어선 가로수와 나란히 이어진 건물들, 그리고 넓게 펼쳐진 초록 잔디. 따뜻한 날씨였다면 이곳에서의 피크닉은 얼마나 좋았을까 잠시 상상해보았다. 따뜻한 햇살 아래 오래 머물고 싶은 그런 오후였을 것이다.
남편과 나란히 정원을 걷고 있을 때였다. 한국인 중년 부부가 사진을 찍어달라고 말을 건넸다. 지긋이 나이가 든, 주름이 자연스럽고 온화한 표정의 두 사람이었다. 아내는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함께 미소가 지어졌다. 사진을 찍어드리고 돌아서려는데, 이번에는 우리 부부의 사진도 찍어주겠다고 하셨다. 생각해보니 여행을 시작한 이후로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부탁을 드렸다. “아이고, 예쁘다.” 카메라 각도를 바꿔가며 꽤 정성스럽게 사진을 찍어주시던 모습이 따뜻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문득 엄마가 떠올랐다. 살아계셨다면 아마 저 부부와 비슷한 나이였을, 나의 엄마. 엄마는 나를 ‘공주’라고 불렀다. 독립하기 전까지는 티격태격하며 많이 부딪혔고, 살갑지않은 딸이 익숙했다. 그래서인지 독립을 하고, 사회인이 된 뒤 다정하게 대해오는 엄마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무뚝뚝한 딸이었다. 그런 나에게 엄마는 늘 ‘공주’라고 불러주었다. 밖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딸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어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엄마가 불러주던 그 ‘공주’라는 말이 그리워졌다.
우연히 만난 그 부부 덕분에 사진도 남기고, 엄마를 떠올릴 수 있었다. 여행을 하며 만나는 ‘우연’은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다. 우연이 주는 기쁨은 늘 생각보다 크게 남는다. “좋은 여행 되세요.” 짧은 인사를 주고받고, 우리는 다시 각자의 길을 걸었다. 어느 때보다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입장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정원에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우리도 시간에 맞춰 입장했다. 상궁과 하궁으로 나뉜 벨베데레 궁은 두 곳 모두에서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상궁만 보기로 했다. The Kiss를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궁 내부의 공간은 하나같이 화려했고 수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모네의 작품도 있었고, 교과서에서 보았던 그림들도 여럿 눈에 들어왔다. 그만큼 가이드 투어를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는 가이드도, 오디오 가이드도 없이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래서 어쩌면 많은 것을 놓쳤을지도 모른다. 조금 아쉽긴했지만, 대신 우리의 방식으로 본 장면들은 더 오래 남는것도 있으니까 괜찮았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던 작품, The Kiss.
이 그림을 직접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사람들 사이에 잠시 머무르는 시간에도 마음은 조급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기다림마저 하나의 과정처럼 느껴졌다.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며 마주한 The Kiss는 내 생각보다 더 화려하고 깊게 반짝이는 그림이었다. 눈부시게 빛난다기보다는 빛을 머금은 채 천천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 반짝임이 오래 시선을 붙잡았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그림에는 수많은 색과 패턴이 겹겹이 쌓여 있었고, 그 사이로 두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얼굴을 맞댄 채 눈을 감고 있는 여인의 표정은 평온했고,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을 만큼 깊어 보였다. 사랑이라는 말 하나로 설명하기엔 부족한, 아주 오래된 감정처럼 느껴졌다. 사진으로 볼 때는 몰랐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금박 위에 얹힌 미세한 질감, 빛의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색,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만들어내는 아주 느린 반짝임. 그 앞에 서 있으니 시간의 흐름마저 잠시 느려지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뒤에서 밀려드는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이럴 때면 작은 키가 조금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까치발을 해서라도 조금 더 보고싶은 마음이었다. 다른 작품들도 모두 훌륭했지만 나에게는 이 한 점으로 이미 충분한 시간이었다. 상궁을 나서면서도 작품에 대해 한참을 남편과 이야기나누었다. '행복했다, 대단했다.' 단순한 감정의 나열일뿐이었지만 친절한 남편은 하나하나 공감해 주었다.
모든 관람을 끝내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전에 정원 귀퉁이 벤치에서 소박한 피크닉을 즐겼다. 한여름 초록색 잎이 무성했을 나무는 바삭마른 잎을 떨구고 있었고, 공기는 제법 차웠다. 내가 생각한 피크닉은 아니었지만 벤치에 앉아 남은 여운을 이야기할 수 있었고, 마트에서 우연히 고른 요거트를 먹으며 작은 행복을 느꼈다.
피크닉은 따뜻한 봄과 선선한 가을이면 빠지지 않는 우리의 작은 행사다. 준비는 늘 단순하다. 좋아하는 샌드위치, 때로는 김밥, 그리고 커피와 뜨개질 재료면 충분하다. 한적한 곳에 돗자리와 캠핑 의자를 펼쳐두고 간식을 나눠 먹으며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남편은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고, 나는 뜨개질을 한다. 조용하고 잔잔하게 흐르는 그 시간을 우리는 참 좋아한다.
하지만 그날은 추운 날씨 탓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다음 장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