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낯선 시간, 낯선 공간으로

익숙함을 두고 낯선 곳으로 떠났다.

by 꽃들레

역시 출발 전 공항에서의 시간이 가장 설레는 순간인 것 같다. 어쩔 줄 모르는 기분 좋은 두근거림으로 가득한 시간. 처음 떠나는 장거리 여행이라 더 들떴던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제일 멀리 떠난 곳은 베트남이었다. 30대 추억을 남기기 위해 친한 친구와 떠났던 자유여행. 이런저런 고생이 많아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 친구보다 더 친구 같은 남편과 함께 첫 장거리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준비하는 내내 충분히 설렜지만, 늘 그렇듯 모든 일이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여행 직전 여러 가지 일이 겹치면서 컨디션이 무너졌고, 출발 당일에는 비행기를 탈지 말지 고민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공항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들어가는 길에 병원을 발견했지만, 이른 시간이라 불이 꺼져 있었다. 그대로 공항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공항 안에도 응급시설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보이는 건 약국뿐이었다. 급성 임파선염에 위경련까지 겹쳐 진통제 주사라도 맞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고, 남편도 설렘보다는 걱정이 가득했다. 안내데스크 직원은 내 안색을 보고는 비행은 무리일 것 같다며 119를 불러주겠다고 했다. 남편 역시 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 순간 드는 생각은 딱 하나였다. '내가 얼마를 들여서 가는 여행인데, 포기 할 수 없지!' 조금만 쉬면 괜찮아질 거라며 남편을 안심시키고 버텨보기로 했다. 비행기 출발까지는 두 시간 이상 남아있었고, 공항 내에 마련된 휴식 공간에 누워 잠시 눈을 붙였다. 꼭 떠나야 한다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정말로 정신이 몸을 이긴 것처럼, 잠깐의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그토록 괴롭던 통증이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무사히 비행기에 탑승한 뒤 승무원에게 따뜻한 물 한잔을 부탁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괴롭던 통증이 가라앉았고, 기내식까지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남편도 놀라고 나도 놀랐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여행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처음 떠나는 장거리 여행이라 걱정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잘 보낸 13시간이었다. 어쩌면 장거리 여행이 체질일지도 모르겠다.




창밖으로 보이는 낯선 풍경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드디어 도착하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다.
“걷기만 해도, 여기저기 눈을 돌리기만 해도 외국에 온 것 같은 곳에 가보고 싶어.”

나의 모든 여행은 일본이었다. 가깝기도 했고, 비용 부담도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일본 여행 몇 번만 아꼈어도 유럽 갔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 돈을 아낀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유럽에 도착했다. 문제는 입국심사였다. 영어 울렁증이 있는 나에게는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이런 걸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지? 보통 어떤 질문을 하지?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지?’

도착하기도 전부터 같은 질문을 반복했으니, 남편은 이미 지쳤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원래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미리 걱정하는 사람이니까. 다행히 아무 질문도 받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다. 물론, 차가운 눈빛으로 훑어보는 느낌에 잔뜩 긴장하긴 했지만.


입국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으러 가는 순간에도 유럽에 도착했다는 감동보다는 긴장이 더 컸다. 알아볼 수 없는 낯선 글자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 “Hi, Hello” 정도가 전부인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문맹자가 된 기분이었다. 일본어는 독학으로 공부했고, 짧게나마 도쿄에서 지낸 경험도 있어서

일본 여행은 비교적 익숙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다행히 생존 영어가 가능한 남편을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잔뜩 긴장한 채로.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번 여행 내내 추위와 감기에 시달리게 될 줄은. 예약해 둔 호텔로 향하는 지하철 안은 낯설고도 신기했다. 길쭉한 키의 사람들을 보며, ‘아, 정말 유럽에 왔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왜 모두 겨울 외투를 입고 있을까. 유럽 사람들은 원래 추위를 많이 타는 걸까. 여행 전 9월과 10월 동유럽 날씨를 검색하며 옷을 챙겼다. 누군가는 한낮에는 반팔을 입었다고 했고, 누군가는 가을이라 쌀쌀하다고 했다. 결국 어떤 말이 맞는지는 직접 와보기 전까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과 고민 끝에, 아주 춥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고 초가을 옷차림으로 준비했다.


그런데 도착해서 마주친 사람들의 옷차림이 심상치 않았다. 겨울 부츠를 신은 사람, 패딩이나 두툼한 코트를 입은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다. 13시간의 비행으로 피곤하기도 했고, 도착한 시간이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 2~3시쯤이라 몽롱한 상태였다.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호텔로 향했다. 데스크 직원의 표정과 말투는 예상보다 더 차가웠다. 나는 조금 놀랐다. 유럽의 서비스는 친절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글로만 접했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서비스직 직원들이 대체로 상냥한 편이라, 그 차이가 더 크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평가하려는 마음은 아니지만 낯선 표정과 말투에 괜히 더 긴장된 것은 사실이니까. 어쨌든 무사히 체크인을 마치고 방에 들어서는 순간 비로소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객실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예산에 맞추다 보니 중심지에서 조금 벗어난 곳이었고, 벌레가 있었다는 후기를 보고 걱정이 많았지만 층고도 높고 공간도 넓었다. 무엇보다 머무는 동안 단 한 번도 벌레를 마주치지 않았다.



아주 피곤한 상태라 그대로 씻고 쉬고 싶었지만, 이미 저녁 식사를 예약해 둔 상태였다. 돌이켜보면 실수였다. 여행을 계획할 때, 가능한 한 알차게 보내고 싶은 마음에 일정을 꾹꾹 눌러 담았다. ‘첫날, 도착 후 체크인 그리고 저녁 식사.’ 인기 있는 곳이라는 말에 미리 예약까지 해두었으니, 어쩔 수 없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섰다. 무거운 캐리어를 내려놓은 덕분에 몸은 한결 가벼웠다. 덕분에 주위를 둘러보며 걷는 여유도 생겼다.



낯선 풍경이 주는 신선함. 그제야 비로소,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기는 생각보다 훨씬 차가웠지만, 그 순간에는 그저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내내 조여 있던 긴장이 차가운 공기를 따라 조금씩 풀려나가는 기분이었다. 몸 깊숙이까지 시원해지는 느낌. 답답했던 비행기 안에서도, 양손 가득 끌고 다니던 캐리어에서도 벗어나 비로소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이제야 온전히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하철을 타고 20분 정도 이동해 도착한 동네. 한국인 리뷰가 좋았던 ‘립스 오브 비엔나’라는 식당을 예약해 두었다. 이미 해가 진 늦은 시간이라 거리는 한산했고 불이 꺼진 가게들도 많았다. 날이 밝으면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겠지. 그렇게 걷는 동안 우리가 가져온 옷이 점점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해방감처럼 느껴졌던 시원한 공기는 어느새 손끝이 시릴 만큼의 추위로 변해 있었다. 그렇지만 걱정은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지금은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낯선 건물, 낯선 표지판, 낯선 사람들. 생경한 풍경 속에서 눈은 쉴 틈 없이 모든 것을 따라가고 있었다.


잡화점인지, 문구점인지 모를 가게. 영업은 종료되었지만, 가게 안은 불이 켜져 있었다. 이 가게뿐만 아니라, 몇몇 가게들이 영업을 종료한 상태였지만 매장안 불이 곳곳이 켜져 있었다


구글맵에 의지해 도착한 ‘립스 오브 비엔나’. 자리를 안내받고 주문을 위해 메뉴판을 펼쳤다. 남편은 메뉴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다. 생존 영어 정도만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영어 울렁증이 있는 나에게는 남편은 능력자처럼 느껴졌다. 얼른 읽고 설명해 달라는 마음으로 나는 말없이 남편만 바라보고 있었다. 유럽 맥주가 맛있다는 이야기에 기대가 컸지만, 급성 위경련이 겨우 가라앉은 직후라 맥주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결국 ‘hot water’를 주문했다. 도착하자마자 감기 기운이 올라온 남편은 콜라를 골랐다. 대표 메뉴인 립을 주문하고, 실패할 확률이 적어 보이는 치킨도 함께 주문했다.



역시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일까. 우리가 아는 그 맛이었다. 특별히 더 부드럽다거나, 양념이 인상적이라거나 하는 요소 없이 그저 무난한, 평범한 맛. 한국 시간으로는 이미 새벽이었고, 우리의 생체 리듬도 그 시간에 머물러 있었다. 음식은 생각보다 잘 들어가지 않았다. 아깝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결국 절반 이상을 남긴 채 첫 식사를 마무리했다. 식당을 나와 주변을 조금 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바닥난 체력과 예상보다 차가운 공기 때문에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공항에서 숙소로 이동할 때는 정신이 없어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오스트리아의 지하철은 우리나라와는 조금 달랐다. 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방식이 아니라 손잡이를 돌려 직접 열어야 했다. 지하철이 멈추면 객차 안이든 밖이든 스스로 문을 열고 타고 내려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처음에는 꽤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문은 자동으로 닫혔다. 남편은 에너지절약차원에서 상당히 좋은 시스템인것 같다고 극찬을 아끼지않았다.

객차 수도 적은 편이었고 내부도 그다지 깨끗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생각보다 더 낡고 지저분하게 느껴져서 놀랐다. 유럽이라면 공공시설도 깨끗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일까. 소소한 부분이지만 충격을 안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 역시 낯선 공간이었지만 문을 닫는 순간 이상하게도 안도감이 들었다. 비엔나에 무사히 도착했고 무사히 첫 식사를 마쳤고, 그리고 이렇게 우리의 공간으로 돌아왔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시차 적응을 걱정했던 것도 기우였다. 남편도 나도 하루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씻고 눕자마자, 마치 전원이 꺼진 것처럼 잠들어버렸다. 다음 날 알람이 울릴 때까지, 정말 기절한 듯 깊이 잠들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낯선 감동을 기대하며 Good n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