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차 상태 좀 봐주시겠습니까?”
“누나야, 친구한테 부탁해서 병원비 할인 좀 받을 수 있을까?”
부지런하다고 해야 할지 민폐라고 해야 할지 나로서는 알쏭달쏭한 남편이다. 가까운 곳에서 차 점검을 받으면 될 일인데 멀리 있는 고향 형님에게 차를 맡기고, 몇 푼 안 되는 할인액 때문에 몇 다리 건너는 인맥까지 동원한다. 손해를 보더라도 혼자서 해결하는 게 편한 나는 타인에게 의존하는 남편이 민망했고, 남편이 느껴야 할 부채감도 내 몫처럼 느꼈다. 남편은 아는 사람끼리 서로 도우며 사는 건 좋은 거라고 명랑하게 말했다. 그 말이 나를 설득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없기에 간섭할 수 없었다. 이해하기 힘든 영역이긴 해도 소소한 득템과 사람에 대한 고마움들이 쌓여 가자, 남편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어쩌면 남편은 의존이 아니라 소통을 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창 시절 나는 특별히 친한 친구가 없었다. 대신 두루두루 잘 지냈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친구가 많아 보였다. 그럼에도 내적 공허감을 느꼈던 건 정서적 친밀감의 부재에서 오는 외로움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가오는 친구를 그저 마주할 뿐 환대한 적이 없고, 내가 먼저 손 내미는 건 더욱 어려웠다. 타인의 마음을 살피며 그저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나의 소통에는 뭔가 빠진 것이 있었다.
경주 역사 문화 포럼에서 여성학자 정희진은 ‘인간은 소통 불가능한 존재’라고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만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언제나 ‘조우’이며 영원하지 않은 우연적인 행운이라고 했다. 인간의 고유성을 전제로
한 말이다. 자칫 고립된 존재로 착각할 수 있겠으나, 이는 나와 상대에 대한 존중의 근거이다. 자기 고유성을 인식한 사람은 타인의 고유성도 인정하는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독립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건강하게 소통한다고 한다. 남편은 필요하면 도움을 요청하고, 자신의 능력 안에서 누군가를 돕는다. 그렇게 든든히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 관계를 두려워 하는 나는 독립이 아니라 고립이었다. 불안과 두려움에 성벽을 높게 쌓고, 작은 창에서 눈만 내민 채 최선을 가장한 착하고 외로운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소통이 중요하다는 것만 알고 소통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내가 둘러싼 성벽은 타인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막이 될 수 있다. 아니면 내 성벽 안에 가족을 가둬 보호라는 명목으로 일방적인 폭력을 가할 수도 있다. 그리고 보호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이들은 나처럼 또 고립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너 잘되라고 그러지’와 같은 말에 담긴 폭력성을 고민해야 했다.
우크라이나 민화를 그림책으로 만든 ‘장갑’ 이야기는 작은 장갑 속에 들쥐, 개구리, 토끼, 여우, 늑대, 멧돼지, 곰까지 들어간다. 천적 관계도 있고, 작은 동물은 큰 동물에게 압사될 수도 있는데 이들은 찾아오는 이에게 불평 없이 자리를 내준다. 그리고 동물들이 장갑 속에 함께 사는 모습을 보면 엉켜 있지 않고 서로 거리를 둔 자리에서 각자에게 맞는 창을 내고, 언제든 소통 가능한 다정한 모습들이다. 홀로이되 함께 있고, 함께 있되 홀로가 될 수 있는 동물들의 거리가 아름답게 보였다.
다행히 나는 나를 다치게 하지 않고 스미듯 천천히 내 성벽을 내리기 시작했다. 내 말을 아주 귀하게 들어주고, 내가 못 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 남편의 태도에서 말이 아닌 실천적 차원의 ‘존중’을 배웠기 때문이다. 존중은 내 위치가 안전함을 느끼게 하고 내 고유성을 인식하게 했다. 그럴수록 가족들의 고유성을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과제였다. 가족들을 존중하기 위해 내가 자주 던지던 질문이 있다. ‘내가 옳을까?, 중요한 문제일까?, 누가 더 속상할까?’ 이 세 가지는 내 감정에 초점을 맞춰 상황을 해석하지 않으려는 내 노력이었다. 그 결과 아들의 일기장에 나는 자주 나쁜 엄마로 등장했고, 딸은 엄마가 틀렸다고 생각할 때 자기 생각을 조심스럽게 표현해 준다. 민망한 상황이지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아이들이 건강해 보여 좋았다.
등산을 하다가 가끔 하늘을 본다. 하늘을 향해 나뭇가지들이 한껏 뻗어있는 것을 보면 복잡해 보이면서도 그 공간에서 자리 다툼하지 않는 조화가 오묘했다. 한 가지가 뻗어있는 아래로 위로 혹은 비껴서 뻗는다. 멀리서 보면 볕이 들어갈 틈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늘을 수직으로 바라보면 가지들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는 틈이 가득하다. 틈으로 들어온 햇살은 서로를 자라게 한다. 가족 관계도 마찬가지다. 고립이 아닌 독립적인 개인으로 나아가기 위해 서로를 자라게 하는 틈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프라이버시는 존중해야 하며, 관심과 소통을 위해 너무 멀어서도 안 된다.
우리 가족은 서로가 햇살을 나눠 가질 수 있는 틈을 지키며 아직도 자라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