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이 떡 벌어지게 아름다운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서 행복한 몇 시간을 보낸 대가로 우리는 두 다리를 반납했다. 출구로 나왔을 때는 내일 하루 정도는 걸을 수 없겠다 싶게 지쳐있었다. 어제의 숙소로는 갈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은 나를 위해 남편은 두 발 대신 차로 숙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몇 개의 작은 방들을 구경하고 난 뒤, 한적한 농촌 마을로 접어들었을 때, 거짓말처럼 예쁜 잔디밭 마당이 있는 집이 나타났고 우리는 그곳에서 하루를 묵었다.
주인집과 3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독채 민박이었다. 두브로브니크의 위치 좋은 숙소와는 정반대인, 한적함이 주는 평안함을 만끽하며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작은 마을을 산책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웃어준다. 거실도 넓은데, 싱글 침대가 두 개나 있는 방도 하나 더 있는데 우리 둘만 있다는 게 아쉬웠다. 누구랑 왔으면 좋았을까 하며 주변 사람들을 떠올려보았다. 물론 가족들과 다 같이 왔다면 제일 좋았겠다는 결론이었지만.
아, 아이들. 엄마 아빠가 훌쩍 떠나버린 아이들은 어땠냐고? 역시나 많이 힘들어했다. 처음에 우리 부부는 시차 계산을 해가며 열심히 영상통화를 했더랬다. 그런데 며칠 후, 친정엄마에게 문자가 왔다. 웬만하면 전화하지 말라고. 엄마 아빠 얼굴을 보고 나면 아이들이 더 힘들어한다고.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고 나면 안심이 되었던 엄마의 마음과는 달리 아이들은 잘 놀다가도 통화 후에는 급격히 기분이 안 좋아진다고 했다. 그러고 나면 다시 제 컨디션으로 되돌리기가 너무나 힘들다고 하셨다. 특히 엄마 곁을 항상 맴도는 첫째가 많이 속상해하는 모양이었다.
그 후에도 계속 친정엄마와 연락하며 아이들이 아프지는 않은지 밥은 잘 먹는지 걱정하는 내게 엄마가 말씀하셨다.
"너, 아이들 아프다고 하면 거기서 돌아올 거야? 엄마 보고 싶어 운다고 하면 올 거냐고. 못 오잖아. 어차피 못 올 거 여기는 잊어버리고 실컷 놀다 와. 힘들게 결정해서 떠난 여행, 본전 뽑고 신나게 놀고 오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야. 여기 일은 엄마 아빠한테 맡기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알아서 해볼게."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엄마의 그 말을 듣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많은 것들을 감수하고 떠난 여행이었다. 많은 이들에게 빚을 지는 느낌이었지만 나에게는 무엇보다 필요한 시간이었다. 귀한 기회였다. 그곳 걱정을 하느라 여행을 실컷 즐기지 못할 거면 아예 시작도 말았어야 한다, 이왕 간 거 제대로 놀고 오라는 엄마의 말이 너무도 고마웠다. 아이들의 보드라운 살에 얼굴을 부비고 싶은 깊은 감정을 추스르고 친정엄마 말씀대로 작정하고 신나게 놀았다.언제부터 엄마 말을 이렇게 잘 듣는 딸이었다고.
결국 열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집에 와보니 작은아이는 열이 나고 있었다. "형아, 우지 마. 엄마 아빠 열 밤 자면 온대 쪄." 하며 고사리 손으로 형을 위로해서 할머니를 놀라게 했던 아이였다. 4살 아기가 그 상황을 이해한다 해도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우리 가족은 서로의 냄새를 맡으며 며칠을 내내 붙어 있었다.
그 후로 완벽하게 치유된 내가 넓은 마음으로 아이들의 모든 것을 수용하게 되었냐 하면 그건 아니다. 여전히 나는 급하고 소리 지르고 야단 치는 엄마다. 그렇지만 그 여행을 다녀오기 전의 나와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많은 도움을 받아 가능했던 감사한 여행이므로. 그 안에서 나 역시 얼마나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지 다시금 알게 되었다.
항상 아이들의 속도에 맞춰 걷고 멈추었던 나와 남편이 몇 년 만에 서로의 손을 잡고 둘만의 보폭으로 걸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가끔은 버겁게 느껴졌던 아이들의 존재가 절절히 그립던 날들이었다.
이제는 아이들도 좀 더 자라서 엄마 아빠 없이도 몇 시간쯤은 아무렇지도 않다. 남편과 내가 번갈아가며 각자의 시간을 가지기에도 아무 무리가 없다. 늘 엄마 곁을 맴돌던 첫째는 이제 나더러 쉬고 오라며 친정으로 보내줄 줄 아는 속 깊은 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