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말하자면 탈출하고 싶었던 쪽이었다. 도망간 놈이 없는지 머릿수를 세며, 귀에 이어폰을 감시하던 강압적인 것으로부터. 그러나 도망 칠 용기도 없었으므로 지칠 때마다 그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새파란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면 좋을 텐데
몇 초의 짧은 시간 동안 행복한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면 여전히 팍팍한 현실이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갇혀(?) 지내던 날들이 지나고 정말 여행이라는 걸 다니기 시작했을 때, 행복한 순간이면 나는 간혹 눈을 감았다. 몇 초 후 눈을 떴을 때도 여전히 그곳에 있으면 몇 배나 행복해졌다.
2005년 들어간 첫 직장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적성에도 안 맞았고 보람도 없었다. 취준생의 기간이 길어지자 급한 마음에 그냥 들어간 회사였기 때문이다. 딱 일 년을 버티고 나자 나에게는 퇴직금이 주어졌다. 월급은 성실히 모았으나 퇴직금은 탕진하고 싶었다. 어디를 여행해야 가장 오래, 편하게 머무를 수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필리핀 세부의 어학원에서 두 달 반 동안 세 끼 밥과 일인용 기숙사, 빨래와 청소를 해주는 값으로 내 퇴직금을 모두 가져갔다. 그리고 나의 화려한 백수 시절이 시작되었다.
오전에 영어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고 나면 오후 특강은 들어도 되고 쉬어도 되었다. 근처의 마트나 시장도 다녀오고 그저 산책 삼아 걷기도 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고 맥주를 마셨다.
이른 아침이면 시끄러운 닭 소리에 알람이 필요 없었다. 선선한 아침 공기를 맞으며 뒷골목으로 걷다가 익숙한 빵집에서 딱 하나의 빵만 산다. 내일도 또 올 것이므로. 저녁에는 먹음직스러운 연기를 풍기는 시장 바비큐 노점에서 닭다리를 사다가 저녁을 대신하기도 했다. 봉지 콜라를 홀짝이며 쭈그려 앉아 닭다리가 구워지기를 기다리던 그때 나는 마음껏 행복했다.
주말에는 그곳에서 친해진 사람들과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어학원에서 알게 된 사람들은 나이도, 성별도, 국적도 제각각이었다. 어학연수를 위해 온 한국 대학생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중에서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학교를 다니다 온 친구들은 그 순간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남의 돈 벌기가 얼마나 힘든지 짧게나마 경험했으므로, 내 돈을 소비하며 받는 서비스가 너무나 꿀맛이었다.
직장이 나의 시간을 저당잡아 돈을 주는 곳이라면, 그곳은 나의 돈을 저당잡아 시간과 자유를 주는 곳이었다. 나는 충분히 만족했다.
내가 또 하나 아는 것이 있었다. 이 순간이 앞으로의 내 삶에 다시 못 올 호시절이라는 것. 그래서 매 순간을 즐기고 감사하며 가슴 가득 자유를 누렸다. 시간이 지나가는 순간순간이 아쉬웠다. 돌아보면 너무도 그리울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한을 정해두고 사는 것'은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을 미리 그리워하는 일이다. 좋은 것을 만나면 "우와, 좋다" 하며 동시에 "이 순간이 정말 그립겠지" 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이만큼 좋고 또 이만큼 지독한 일이 있을까. <바르셀로나, 지금이 좋아/ 정다운>
나의 예상이 맞았다.
돌아온 나는 다시 취업을 해서 야근과 특근에 시달렸으며 몇 년 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남들이 다 하는 것들>을 하고 사느라 다시는 혼자만의 여행은 하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지친 누군가에게 꼭 권하고 싶은 경험이다. 좀 무리가 되더라도 한 번쯤 나만을 위해 살아보기. 공부와 취업, 결혼과 육아, 노후까지.. 참 벅찬 과정이 아닐 수 없다. 삶의 딱 한 순간이라도 온전히 '나'만을 위해 쉬어가기.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를 지탱해주는 감사한 시간이다.
요즘도 가끔 길을 걷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는 눈을 감아본다. 내가 사랑한 순간들이 떠오른다. 이른 아침의 빵가게 냄새, 어느 거리의 뜨거운 매연, 해질 무렵의 선선해진 바람 한 줄기. 눈을 뜨면 사라질 찰나의 환영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그 순간 나는 또다시 행복해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