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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쉬는 돌 Nov 22. 2022

도망 혹은 현실도피

도망가자



나에게도 있었나 싶은, 까마득한 고등학교 때 일이다.

마침 방학이라 보충수업쯤은 빼먹어도 될 것 같았고

기차도 타고 싶고

또 몇 가지 이유들을 생각해 냈지만 사실은 친한 친구와 말다툼을 했기 때문이었다.

어디엔가 쑤셔 박았던 용돈을 모으고 모아 역으로 향했다.

근사하게 기차를 타고 여행을 다녀오면 기분이 좋아지겠지?


하지만 기차표는 없었고, 터미널로 다시 찾아가니 버스는 동대구에서 환승해야 했다. 한참을 걸려 도착한 경주, 나의 목적지는 할머니 댁이었다. 고등학생인 내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안전하게 외박할 만한 곳은 그곳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역 근처 시장에서 돈을 탈탈 털어 소고기를 조금 샀다. 신문지에 둘둘 말아준 고기를 덜렁덜렁 들고 할머니 댁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할머니는 놀라셨을 거고, 반가웠을 테고

아주 조금은 귀찮았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갑자기 들이닥친 사춘기 손녀를 맞는 할머니의 마음은 잘 모르겠다. 가서의 기억이 없는 걸 보면 할머니와 도란도란 시간을 보낸 것 같지는 않으니.

집으로 전화를 했고(당연히 핸드폰은 없던 시절)

엄마는 좀 놀라긴 했지만 다행히 목적지가 할머니 댁이라는 것에 안심한 듯, 욕 몇 마디로 끝났던 것 같다. 

짧은 방황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걱정했다는 친구의 한 마디로 상황은 잘 해결되었고

나의 여행은 그저 작은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나는 금 안다.

그것이 내 몸에 흐르던 '현실도피'의 시작이었다는 걸.

그 후로 나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생기면 주로 도망가는 쪽을 택했다.

어떤 때는 시간이 약이 되어 잘 해결되기도 했고, 어느 때는 도망쳤던 순간보다 몇 배로 큰 파도가 되어 돌아와 휘청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도망 다니던 삶을 살던 중,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나타났으니

바로 아이들이었다.

아무리 힘들어 바닥까지 떨어져도

내 속으로 낳은 것들을 버리고 도망갈 수는 없었다.

삶의 가장 큰 복병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치기로 했다.

15년 전 나를 해방시켜 주었던 곳으로.

나의 삶에서 가장 힐링의 시간을 보낸

세부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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