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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쉬는 돌 Apr 25. 2024

(번외)밀라노 탈출기 #1

당신에게는 없어야 할 고난의 하루


밀라노-피렌체 구간의 급행열차가 취소되어 생긴 에피소드로, 아주 길고 지루함을 먼저 알립니다. 혹시 우리같은 경험을 하시는 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은 마음에 남겨보지만 이런 일이 자주 있지는 않은 것 같더군요. 허허




아침 8시, 스위스 그린델발트의 꿈같은 숙소를 떠나왔다.

내내 내리던 비는 다행히 그쳐 있었지만 구름은 끈기 있게 산허리를 붙들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12살, 9살의 아이 둘과 캐리어 3개가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챙겨야 할 아이템들이다. 다행히 남편이 합류하여 함께 있으니 천군만마처럼 든든하다.

마음은 가볍지만 짐까지 가벼워 지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크면서 여행에서 가지고 다닐 짐이 많이 줄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버려야 할 미련이 많은 모양이다.


오늘의 일정은 스위스를 떠나 이탈리아 피렌체로 도착하는 것이다. 총 4번의 기차를 타야하니 긴장의 수치를 80으로 맞춰본다. 게다가 여정의 마지막 밀라노-페렌체 구간의 열차를 아직 예약하지 못했다. 이탈리아 국경을 넘은 도모도솔라 역에서 물어볼 생각인데 잘 되겠지.



기차역 몇 군데를 거치면서 바깥 풍경과 함께 슬슬 사람들의 모습이나 말투도 바뀌어갔다. 아이들이 평가하기를, 스위스 사람은 차갑지만 친절하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따뜻하지만 불친절하다 했다. 아이들의 통찰력이 새삼 대단하다.



도모도솔라 역에 내려 스낵부스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고 아이들에게 첫 젤라또를 선물한 뒤 역무원에게 달려갔다. 밀라노-피렌체 구간을 예약하기 위해서였다. 전 날 인터넷으로 예약을 시도했으나 번번히 결제창에서 넘어가질 않았다.

역무원은 우리의 물음을 듣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날씨 때문에. 기.차.는. 없.다.고.

응?? 그러면 안되는데? 밖에 햇볕이 나잖아. 무슨 날씨탓?


며칠 전 비가 많이 왔다고 했다. 어쨌든 우리의 기차는 없는 것이다. 원래 밀라노에서 피렌체는 급행열차로 2시간. 우리는 대안이 필요했다.

도모도솔라에서 밀라노로 가는 한 시간여 동안 남편과 나의 사투가 시작되었다. 마음이 잘 맞는 여행파트너인 남편 덕에 여러가지 방법이 생겼다.


1. 밀라노 역에서 다시 한 번 기차를 알아본다.

2. 기차가 불가능할 경우를 대비하여 플릭스 버스를 예매한다.

3. 밀라노에서 1박 후 내일 피렌체로 이동한다.


1번은 현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이동중에 2번을 해결하기로 했다. 플릭스 버스를 알아보니  4시간이 걸리고 그나마 가까운 시간은 모두 매진이다. 결국 우리가 예약한 시간은 저녁 8시 버스. 현재 시간은 오후 1시다. 좌석도 당연히 뿔뿔이 흩어졌다. 4명 가격은 약 16만원.

다른 것 보다 가장 큰 문제는 도착 시간이다. 밤 12시에 시내 외곽에 도착하면 숙소까지는 어떻게 가지? 택시는 잡힐까? 캐리어가 3개에 사람이 4명인데 한 차에 탈 수는 있을까? 아이들이 이 여정을 견뎌낼 수 있을까?


이제 긴장의 수치는 100 이 되었다.


"엄마 아빠가 이런 좋은 곳에 너희를 데려 왔단다. 고맙지?"

에서  "너희들을 끌고와서 고생을 시키는구나. 미안하다."

로 바뀌는 순간이다.


버스 표를 구입하고 나니 다음 미션. 갑자기 7시간을 머무르게 된 밀라노에서 무엇을 먹고 보고 탈것인가.

뒷 일정이 너무 고단할 것 같아서 밀라노에서의 시간이 즐겁지가 않다. 남편과 둘이라면 광장에서 맥주라도 한 잔 하면 되겠지만. 캐리어를 맡기고 아이들에게 무리가 되지 않을 만한 일정이 무엇일지 머리를 굴려본다.


엄마아빠가 비상상태가 되자 아이들은 둘이서 잘 논다. 별한 장난감 없이도 둘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깔깔거리고 있다. 다행이다. 1호기는 상황 판단이 빠르다.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동생과 더 잘 놀아준다.


이제 밀라노 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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