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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쉬는 돌 Feb 20. 2024

09 Where is my Eiger?

여행 중에 만나는 천사들




<텐트 밖은 유럽>에서 비 오는 스위스를 다니며, 배우 유해진 님은 안타까워한다. "아.. 이 경치가 아닌데.." 본인은 더 멋진 스위스를 이미 보았으므로 후배 배우들이 구름 낀 경치에도 감탄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내가 꼭 그렇다. 이번에 여행지로 스위스와 이탈리아 피렌체를 고른 것은 순전히 나의 결정. 그 이유는 이십여 년 전 왔던 유럽 배낭여행에서 '꼭 한 번 다시 와보고 싶은 곳'으로 스위스를 점찍었기 때문이었다. 여비가 부족해 융프라우를 포기했어도, 외진 시골 허름한 숙소에서 잤어도 스위스는 나에게 환상동화 같은 기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드디어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이 함께 이곳에 왔는데!!


어제는 비

오늘은 흐림

내일은 비...

날씨요정아 살려줘


지금은 흐릿해진 스위스의 풍경을 다시 되새기고 싶었는데, 내가 느낀 감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는데.. 스위스는 결국 한 번도 맑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고, 융프라우에 올라가서도 우리는 덧없이 하얀 구름만 만나고 돌아왔다. 나는 한 번 봤으니 괜찮다. 하지만 남편과 아이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던 스위스의 모습은 이것이 아니란 말이다!! 아니, 나도 안 괜찮다. 어찌 스위스를 두 번 왔는데도 융프라우를 못 보는 것인가. 정녕 삼대가 덕을 쌓지 못한 것인가. 나에게는 마지막 스위스일 수도 있는데..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란 말을 되새김질하며 결국 인터라켄의 3박이 지나고 그린델발트로 숙소를 옮기는 날이 되었다. 아예 비가 퍼붓는다. 린델발트 2박에 필요한 짐만 최소로 챙기고 나머지는 유스호스텔에 맡겼다. 어차피 이탈리아로 넘어가려면 동역으로 다시 와야 하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비에 패러글라이딩은 취소되고 할 일이 없어진 우리는 유람선을 타고 무심히 떠돌았다. 겨우 찾아 간 퐁뒤 가게는 휴무로 문이 굳게 닫혀있었고, 배고픔에 지쳐 급하게 검색한 체인 음식점은 비싸기만 할 뿐 맛도 없고 양도 적었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우리는 우울한 날씨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비에 젖은 옷과 무거운 마음으로 이미 체크아웃 한 유스호스텔로 돌아왔다. 그린델발트 숙소의 체크인 시간은 3시. 한두 시간 로비에서 그저 몸이나 녹이고 가려는 심산이었다.


남편은 축 쳐진 아이들에게 로비 한편에 있던 포켓볼을 제안했고, 새로운 놀잇감에 아이들의 눈이 다시 반짝였다. 먼저 치고 있던 팀이 끝나자 우리도 동전을 넣었고 아이들에게 기본자세와 간단한 규칙을 알려주었다. 추위에 껴입고 있던 옷을 하나둘씩 벗으며 1호기와 2호기는 점점 승부에 불이 붙었다. 열 살인 2호기가 눈에서 불을 뿜으며 집중하는 표정에 우리 모두 웃음이 터졌다.


이를 악문 2호기. 응원한다 우리 막내


그렇게 우리는 스위스에서의 귀한 한나절을 포켓볼과 테이블축구로 보냈다. (훗날 여행을 끝내며 아이들에게 최고의 순간을 꼽으라니 2호기는 주저 없이 포켓볼을 선택했다. 아.. 2호기 너란 녀석 정말 매력적인 녀석)

신나게 게임을 마치고 그린델발트로 출발하며 우리는 일부러 허세 가득한 몸짓으로 말했다.

"이야, 스위스에서 포켓볼 입문한 아이들은 흔하지 않을걸? 1호기는 자세가 기가 막히던데! 2호기는 마지막 볼이 진짜 멋지게 들어갔지?"

사실 허무했다. 포켓볼 치자고 이 멀리까지 왔단 말인가. 하지만 아이들이 웃었고 나와 남편은 따뜻했다. 그걸로 되었다.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린델발트로 향했다.




벌써 세 번째 같은 기차에 올랐다. VIP패스와 흐린 날씨 덕분이다. 아이거 곤돌라를 탈 때도 그린델발트 근처라서 이미 한 번 둘러본 터였다. 늘에야말로 (내가) 정말 기다리던 그린델발트 숙박인데 익숙해진 풍경에 살짝 본전 생각이 든다.

'이렇게 쉽게, 자주 그린델발트까지 올 줄 알았으면 그냥 인터라켄 숙소에 더 있을 걸 그랬나?'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그린델발트의 숙박비 인터라켄 유스호스텔에 비해 두 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좋은 경치에 (그나마) 합리적인 가격, 깨끗하고 친절한 숙소를 찾고자 들인 수고가 컸다. 우리가 먼저 묵었던 인터라켄 유스호스텔은 규모가 큰 만큼 세탁기나 식당 등 편의시설이 잘 되어있었고, 특히 마지막에 아이들이 포켓볼로 잘 놀고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보, 숙소 옮기느라 하루 시간 낭비한 것도 그렇고.. 아이들도 잘 노는데 그냥 유스호스텔에 더 머물걸 그랬나 봐. 그린델발트는 숙박비도 비싼데"

"아니야, 그만한 매력이 있겠지. 여러 가지 경험해 보는 것도 좋고. 나는 기대되는데?"

언제나 그렇든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남편이 더욱 고마웠다.




우리가 선택한 그린델발트 숙소는 <호텔 히르셴>. 한국에서 숙소를 알아볼 당시에 어른 두 명과 아이 두 명으로 검색하니 더블룸을 두 개 이용하라고 나왔다. 누워서 아이거를 봤다는 후기 한 줄을 믿고 예약한 터였다. 체크인 후에 직원은 자기를 따라오라며 직접 방을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방은 뒷문으로 나가서 빙 돌아 앉은 별채였던 것이다. 말로는 설명이 쉽지 않으니 직접 안내를 해 준 것이었다. 방은 아기자기하고 예뻤다. 동화에 나오는 오두막집처럼 나무와 따뜻한 조명으로 아늑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문제는 창 밖에 있었다. 별채로 들어설 때부터 불안했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우리 방의 뷰는 그야말로 <공사장 + 앞집 벽>이었다. 좋지 않은 날씨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이겨냈는데, 인터라켄 유스호스텔에서 내려다보이던 아레 강의 뷰는 이곳의 반값이라고요!


그린델발트 첫 번째 체크인 한 더블룸. 커튼 뒤로 앞 집 벽이 얼핏 보인다


맥이 탁 풀리며 며칠간의 고단함이 밀려왔다. 방이 두 개라서 화장실도 두 개니 편할 거야,라고 생각했으나 당장 캐리어를 어느 방에 놔야 지도 모르겠다. 짐을 채 풀지도 않은 채 쿱(마트)에서 사 온 닭다리를 뜯어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한 입 먹고 창문 밖을 쳐다보며 한숨 한 번. 나의 불편한 마음을 눈치챈 남편이 분위기를 바꾸려고 밝게 말한다.

"얘들아, 우리 방 정하기 게임하자! 오늘 어차피 방이 두 개라서 두 명씩 나눠 자야 해. 뽑기로 방 번호가 나오는 대로 둘씩 짝지어 자는 거야. 어때? 대신 너희 둘이 짝이 되어도 불평하지 않기. 오늘만큼은 아빠도 엄마를 양보할 수 없다!!"


다시 한번 이글거리는 아이들의 눈. 치열한 눈치싸움과 사투 끝에 결국은 아이들 둘이 한 방이 되었다. 받아들이는 1호기와 좌절하는 2호기, 엄마를 쟁취했다며 열광하는 아빠를 보며 결국 또 웃고 만다.



엄마를 잃어 침울한 2호기를 1호기가 살살 달랜다. 밤새 우리 둘이 티비도 보고, 몰래 게임도 하자며. 단순한 2호기는 금세 계획을 짜느라 신이 났다.




나는 커피로 마음을 달래 볼까 하고 텀블러를 들고 나섰다. 본관 리셉션 옆에 있던 온수기에서 물을 받다가 아까 우리를 안내해 준 직원과 눈이 마주쳐서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Oh.. Where is my Eiger?" (나의 아이거는 어디에 있니? 흑흑)

구름이 내려앉은 날씨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날씨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는다. "혹시 융프라우에 안 갔다 왔으면 라이브 캠도 있어. 내가 날씨를 체크해 줄게, " 라며 친절을 베푼다.

"아니.. 우리 방 창문에.. 아이거가 없어. 나는 앞 집 벽을 보러 온 게 아닌데..."

그녀는 그제야 내 의도를 알아채고 쾌활하게 웃었다.

"네가 그 방을 예약했잖아?"

"그랬지, 하지만 후기에는 아이거가 보인다고 했다고."

"물론, 아이거가 보이는 방도 있어. 구경해 볼래?"

"정말? 그 방이 비어있어? 한 번 봐도 될까?"

"당연하지, 같이 가보자!"


그녀는 또 한 번 리셉션을 비워두고 나와 함께 본관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갔다. 그 방은 우리 가족이 함께 사용하기에 충분히 넓은 데다 창밖에는 구름에 가려진 아이거가 두둥! 지금까지 내가 상상하고 그려왔던 한적한 그린델발트의 전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순간 나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 방, 오늘 비어있는 거지? 우리 이곳에서 2박인데 혹시 방을 바꿔줄 수 있을까?"

"음, 아마도 가능할 거야. 그런데 지금은 스텝들이 퇴근해서 엑스트라베드는 못 갖다 줄 텐데. 여기 소파베드가 있으니 하루 불편하게 자고, 너만 좋다면 엑스트라베드는 내일 넣어줄게."

"좋아!! 나의 아이거가 여기 있었구나!"

"아 참, 그리고 너희 방은 더블룸, 이 방은 슈페리어 룸이라서 추가요금이 좀 있을 수도 있어. 확인해 볼게."


기뻐 콩닥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쫄래쫄래 리셉션으로 따라갔더니 유쾌한 그녀 왈, "아 맞다, 너희 더블룸 두 개였지! 그럼 추가요금 없어." 한다. 오 당신은 천사임에 분명해.

"아, 그런데 어쩌지? 우리가 이미 방을 좀 어지럽혔는데."

"괜찮아, 그건 우리 일인걸. 짐이나 잘 챙겨 와! 여기 새 방 키 가져가고."


원래 체크인했던 방을 최대한 원래 모습대로 복구해 놓고 우리의 새 방에 두 번째 체크인을 했다. 아이들은 두말할 것도 없고, 애써 나를 위로해 주던 남편도 눈이 휘둥그레지며 좋아한다. 발코니로 나가 그림처럼 펼쳐지는 그린델발트의 풍경에 새삼 감탄하기도 하고, 침대에 누워서도 풍경이 보인다며 굳이 한쪽 팔을 괴고 누워도 본다. 엄마를 되찾은 2호기는 두 배로 행복해졌다.


숙소 사진이 없어 홈페이지 사진으로 대체한 우리의 두 번째 방.


발코니에서 보이는 그린델발트 풍경, 행복했다.


마트에 가려고 호텔을 나서는데 직원이 묻는다.

"새 방 어때? 마음에 들어?"

"Perfect!! You made my day. (당신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어) 정말 리얼리 너무 고마워!!"


그곳에서 우리는 꿈꾸는 듯한 이틀을 보냈다.




당신의 여행에서는 어떤 천사를 만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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