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나는 돈을 열심히 모은다. 작은 것도 아끼고 다시 쓰고. 외식 대신 부족한 실력으로나마 집밥을 해 먹는다. 사회생활 하는 남편에게는 그나마 괜찮은 옷을 골라 사 입히지만, 아이들이나 나는 가성비를 따져 옷을 고른다.
여행을 위해서다.
신혼 때 남편은 기념일이나 출장 후에 선물을 준비했다. 와인, 옷, 화장품 등.. 고맙긴 했지만 요긴하게 사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생고생하며 다녀온 신혼여행은 두고두고 떠올리며 추억했다. 그제야 남편은 알았다. 이 여자에게 제일 좋은 선물은 여행이라는 걸.
결혼 전에는 한 사람의 비용만 있으면 훌쩍 떠날 수 있었다. 결혼을 하고 나니 두 사람, 그것까지도 괜찮았다. 이제 우리는 넷이 되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숙소도 좀 끼어서 자고 음식도 나눠먹으면 되니 큰 차이를 못 느꼈는데, 이놈들 이제 나보다 훨씬 많이 먹는다. 잠은 또 어떻고. 잠결에 다리를 올리면 숨이 턱 막힌다. 4인실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네 배가 든다. 얼른 커서 독립하면 좋겠다.
고민 끝에 렌트를 하지 않고 기차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나마 유레일패스는 성인만 구입하면 만 11세 이하의 아이들은 무료로 어른과 함께 이용할 수 있다. 우리 집 1호기는 6학년이지만 다행히(!) 생일 이전이라서 딱 만 11세. 비용이 많이 절약되었다. 3학년인 2호기는 물론덤이다.
이동수단 결정 후에는 피렌체-비엔나 구간의 쿠셋(야간열차)을 예약했다. 하루에 1대뿐이라 예약이 빨리 마감되기 때문이다. 성수기가 아니라서 4인 쿠셋 자리가 남아있다. 휴, 다행이다. 기차여행을 하기로 결정 한 큰 이유 중 하나가 야간열차였기 때문이다. 밤을 가로질러 국경을 건너는 덜컹거리는 기차의 매력이라니!
"야, 우리 이제 나이가 몇이냐. 밤까지 기다렸다가 충분히 자지도 못하고 아침에 역에 덩그러니 내렸을 때 그 피곤함! 너 잊은 거 아니지? 잘 생각해라. 애들 골병든다."
귀에 맴도는 친구의 말을 휘휘 쫓아버리며 예약 완료 버튼을 딸깍 눌렀다.
도시마다 역 주변의 가성비 좋은 4인실까지 예약을 마쳤다. 3일 전까지는 무료취소 가능한 숙소들이 많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내가 처음 배낭여행 하던 그때는 라떼는.. (컷)
이제 여행은 돌이킬 수 없다. 못 가게 되면 손해가 크다. 예약을 하나하나 마칠수록 여행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물론 그것을 즐겁게 받아들이면서도 '어떡하지, 나 진짜 가나 봐.' 하는 반 미친 상태가 되어간다.
남편과 몇 년 전 크로아티아 여행에서 우리는 주방이 있는 숙소라면 한 두 끼는 밥을 해 먹었다. 혹시나 하고 챙겨간 고추장 작은 통과 김을 시작으로 해 먹기 시작한 것인데, 이국적인 음식을 즐기지 않는 남편은 아주 좋아했다. 마트에서 고기와 쌀, 야채를 조금씩 사서 저녁에 구워 먹고, 남은 밥은 다음날 아침에 끓여 먹으니 속이 편했다. 토마토와 치즈, 식빵으로 점심 도시락을 싸 먹기도 했다. 부족한 재료와 식기로 준비하니 기대감이 낮아서 오히려 만족도는 더욱 높았다.
원래도 높은 유럽 물가, 그중에서도 살인적이라는 스위스 일정에 대비하여 먹을 것을 준비해 본다. 작은 쿠커와 간단한 양념소스들, 캠핑용 작은 국자와 주걱, 참치와 김 등이다.
5월의 스위스는 좀 춥겠지? 긴 옷과 경량패딩을 넣어 본다. 이탈리아는 좀 더울 수도 있는데. 반팔 반바지를 넣는다. 혹시 몰라 얇은 장갑도 챙겨 넣고, 편하게 신을 슬리퍼도 가져가야지. 짐이 늘어난다.
소중한 식량을 탑재한 가장 크고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남편이 오스트리아로 출국했다. 3일 후, 우리는 스위스행 비행기를 탄다. 이틀 동안 취리히를 구경하고 나면 학회일정을 마친 아빠와 만나 진짜 여행을 시작하는 계획이다. 벌써 남편의 빈자리가 크다. 긴 비행시간과 이틀간의 취리히 일정. 나 괜찮겠지?
여행 출발 이틀 전에 엄마를 집으로 모셔다 드리고 5월 11일, 드디어 아이들과 비행기에 올랐다. 스위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로 계획된 15박 16일 여행의 시작이었다.